103화.
누군가는 죽은 이를 보고 듣는 것을 병이라 했다. 슬픔에서 비롯된 망상일 뿐이라고, 그 환상이 끝나면 슬픔을 이겨 낸 것이라 그렇게 말했다.
하나 헤레이스에게 그 말은 틀렸다. 선명히 보이는 아이는 분명 괴로웠지만, 들리는 목소리는 귀를 틀어막고 머리를 벽에 부딪쳐 따라 죽고 싶을 만큼 고통스러웠지만, 그것마저 없다면, 괴로움에 허덕이는 것마저 허락되지 않는다면…….
왜 삶을 이어 가야 하는가.
에르젠은 헤레이스에게 목숨보다 소중한 존재였다. 그런 아이가 죽었을 때 그녀의 생명도 진작 끝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헤레이스가 스스로를 멸시하며 아들을 안은 손에 힘을 줬다.
“에르젠, 엄마도 곧 갈게. 더는 혼자 두지 않아.”
이대로 에르젠을 안은 채 얼마 남지 않은 온기를 나누다 보면 금방 끝날 터였다. 에르젠의 머리카락을 쓰다듬던 헤레이스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
‘에르젠, 내 아들…….’
정신이 몽롱해지며 몸이 서서히 차가워질 때였다. 에르젠의 목소리가 헤레이스의 귓가에 박혔다.
“살기로 했잖아.”
순간 눈을 뜬 헤레이스의 얼굴에 놀라움은 없었다. 에르젠은 그녀와 얼굴을 맞대고 있었다. 그러니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는 에르젠의 것이 아니었다.
“약속을 먼저 어긴 건 너잖아. 아니야?”
헤레이스가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말하자 침묵이 돌아왔다. 그녀는 잠시 고민하다 다시 입을 열었다.
“……갑자기 왜 그랬니?”
헤레이스는 자신이 기억을 찾은 데 그것이 있다고 확신했다. 간간이 이상해졌던 머리와 기억, 의도하지 않고서는 마주할 수 없는 상황.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것은 그녀가 기억을 찾길 원했다.
“넌 내가 에르젠을 잊은 채 세상에서 가장 못난 어미로 살길 바란 거 아니야?”
그것은 헤레이스의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대신 그것은 헤레이스의 뒤에서 에르젠의 뒤로 자리를 옮겨 그녀와 얼굴을 마주했다.
그녀의 눈에 그것의 모습이 들어왔다. 이즈카엘과 닮은 앳된 얼굴. 그것은 어느새 미겔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엄마는……, 넌 한 번도 날 제대로 봐 주지 않았잖아.”
이제 목소리조차 미겔이었다. 헤레이스는 저도 모르게 실소를 흘렸다. 저 모습과 목소리를 어찌 에르젠이라 착각했을까. 하나도 닮은 구석이 없는데.
“난 네게 행복을 줬어. 그 아이 노릇도 충분히 해 줬어. 그런데 넌…….”
그것의 눈이 에르젠에게 닿았다. 그것이 분한 듯 이를 갈더니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넌 에르젠한테 했던 것처럼 나에게 맹목적이지 않았어. 난 네게 에르젠이 되어 줬는데 넌 한 번도 날 그 이름으로, 그 아이처럼 대우한 적 없었어.”
“…….”
“에르젠은 네게 유일했잖아. 내가 본 넌 이즈카엘보다 이 아이를 훨씬 아꼈는데…… 왜 내게는 그리해 주지 않아? 내가 에르젠이 되었는데 왜? 도대체 왜?”
그것의 모습은 자신에게만 향했던 어미의 사랑을 동생에게 빼앗겼다며 질투하는 아이 같았다. 헤레이스는 떼쓰는 그것을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인간이 아닌 이것은 그녀가 아는 어떤 이와 행동하는 것도, 말하는 것도 참 많이 닮아 있었다.
그것이 헤레이스를 노려보다 짓씹듯 누군가를 입에 올렸다.
“너도 같아. 너도 메데아랑…… 그녀와 똑같아.”
헤레이스가 답을 않자 그것의 얼굴이 점점 붉어졌다. 검은 비늘이 돋고 그것의 입 사이로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파충류의 눈이 두 쌍으로 변해 징그럽게 굴러다녔다. 곧이어 쇠 긁는 목소리로 그것이 분을 터뜨렸다.
“이번만큼은 내가 그보다 더 소중해질 거라고 생각했는데! 버려지는 건 그 버러지라 확신했는데!”
무언가를 떠올리며 화를 내는 그것의 눈에서 검은 것이 떨어져 내렸다. 치익 하고 얼음이 녹자 헤레이스가 에르젠을 당겨 제 품으로 끌었다. 이미 죽은 아이를 보호하는 모습에 그것의 눈이 더욱 번뜩였다.
“어차피 그 아이도, 너도…… 아니, 애초 너희 인간들은 언젠가 죽는 한낱 미물이야. 언제 죽어도 상관없잖아.”
“…….”
“메데아는 아니었어. 메데아는 나와 영원을 함께할 짝이었단 말이야!”
고함을 지르는 그것의 눈동자에 메데아와의 마지막 만남이 떠올랐다. 그것이 직접 조각한 하얀 눈마녀는 한때 강인했던 마녀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로 망가져 있었다.
‘메데아…….’
메데아가 도망쳤다가 잡혀 온 지 1년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그것은 메데아의 목숨이 얼마 남지 않음을 알고 이즈카엘의 몸에서 급히 나왔다.
‘너…… 너 언제 이즈카엘에게…….’
아이의 몸에 숨어 아주 조금 모아 뒀던 힘이 한순간에 사라졌다. 하지만 그것은 피를 토하는 메데아의 앞에 복수도, 겨우 쌓아 뒀던 힘도 잊은 채 속삭였다.
‘이즈카엘, 네 아이…… 아니, 그 자의 아이를 찔러. 배를 가르고 심장을 갈취해. 네게서 옮겨 간 마력과, 내가 숨 쉴 때마다 삼켰던 욕망이 이 심장에 조금이나마 있어.’
‘너…… 너 언제 이즈카엘에게…….’
‘이게 메데아 널 살릴 거야. 예전처럼 강대한 마력을 발휘할 수는 없어도 시간을 벌어 줄 거야.’
‘…….’
‘시간만 충분하면 내가 널 다시 조각할게. 인간들 사이에 있으면 힘은 언젠가 되찾아. 이것들은 욕망 덩어리니까.’
그것은 당시 그 자신이 했던 말과 메데아의 얼굴을 떠올리며 입을 열었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그때의 심정들이 이 가는 소리와 함께 흘러나왔다.
“이즈카엘 그놈만 찌르면…… 그 배를 갈라 심장만 먹으면 거품처럼 사라질 목숨을 되돌릴 수 있다 했어. 그렇게 숨을 부지하면 다시 원래대로 돌아가자고. 예전처럼 서로에게 유일한 존재로 영원히 함께 살아갈 수 있다 했어.”
‘좋아. 나도 이제 알아. 인간이 말하는 사랑이 얼마나 부질없는지. 저걸 욕망하는 게 아니었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인데…… 지긋지긋하더라도 네 곁이 좋겠지.’ 이미 사라진 마녀가 그것에게 답했다. 과거로 돌아간 듯 그것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알았다 해 놓고…… 결국 그녀가 마지막에 택한 건 이즈카엘 그 버러지였지.”
‘미카엘의 아이를 포기할 수는 없어. 그의 사랑이 부질없다 해도 난 그것만 쫓는걸. 이즈카엘은 내가 욕망하는 것의 결정체잖아. 그런데 아이를 어떻게 찔러. 그 심장을 어미인 내가 어찌 씹어 먹겠어.’
‘메데아!’
‘……내 아이의 몸속에서 그만 나와. 어차피 난 곧 사라질 거야. 네게 유일한 내가 사라지는 거야. 그러니 너도 날 따라가자.’
‘싫어.’
‘…….’
‘우리 둘 모두 사라지지 않아. 네가 하지 않는다면 내가…… 허억!’
그것은 제가 들어 있는 이즈카엘을 조종해 직접 배를 가르고 심장을 꺼내려 했다. 하지만 메데아는 그러잖아도 얼마 남지 않은 수명을 이용해 그것을 막았다. 그것은 또 마녀에게 배신당했다. 또다시 마녀가 내리꽂은 검에 심장을 관통당하고 아주 조금 모은 힘조차 잃은 채 얼음 동굴보다 더 좁은 아이의 몸에 갇혔다.
“고작 인간과 사이에서 난 아이일 뿐인데! 게다가 날 막으려 마지막까지…….”
그때의 고통이 되살아나는 듯했다. 그것이 제 가슴을 움켜쥔 채 날카로운 목소리로 울부짖다가 증오 가득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마지막 목숨을 태운 탓인지 메데아의 조치는 제법 견고했어. 본래라면 지금의 난 핏방울 하나의 상태로 죽은 듯이 잠들어 있었을 거야.”
“…….”
“처음 잠들 때는 이 망할 피에 숨어 몇백 년을 꼬박 기다려야 한다 생각했지. 버러지 같은 이즈카엘 이놈이 죽고, 그의 한참 아래 후손의 몸에서나 깨어날 줄 알았어.
하지만 이즈카엘 그 멍청이는 끊임없이 욕망을 부르짖으며 날 깨웠지. 헤레이스, 헤레이스, 헤레이스, 헤레이스. 네 이름을 하루에 얼마나 속살거리는지. 가만있어도 어미에게 양분을 받는 것처럼 힘이 돌아왔어. 덕분에 예상보다 훨씬 빨리 잠에서 깼지.”
“…….”
“메데아도 없으니 내가 할 일은 하나였어. 메데아가 나 대신 선택한 버러지. 메데아의 아이. 날 품은 내 형제. 이즈카엘을 고통에 밀어 넣는 게 내 목적이었지.”
“…….”
“처음에는 쉬웠어. 너와의 관계를 어그러뜨릴 때마다 그놈이 괴로워하는 게 그대로 느껴졌거든. 하지만 너 때문에 마지막이 망가졌어. 어느 순간부터 일이 틀어졌단 말이야!”
수다스러운 중얼거림의 끝은 원망을 품은 고함이었다. 그것이 헤레이스를 노려보며 거칠게 숨을 내쉬다 인간이나 할 법한 욕설을 지껄였다.
“그때 널 죽게 내버려 뒀어야 했어. 네 품 안의 그 아이가 죽고 계단에서 네가 뛰어내렸을 때…….”
“…….”
“아니, 그 전에 진작 널 죽여 없애 버렸어야 했는데……. 그 애를 배 속에 품고 있을 때 그냥 죽이고 이즈카엘에게 네가 죽었노라 속삭이는 건데…….”
무감한 얼굴로 가만히 그것의 말을 듣고 있던 헤레이스가 제 죽음에 처음으로 눈을 반짝였다. 무언가 계획을 세운 그녀가 에르젠을 안고 있던 팔을 풀고 상체를 일으켰다. 그리고 후회하는 그것의 마음에 속살거리기 시작했다.
“……지금이라도 그렇게 해. 내가 도울게.”
“뭐?”
이해 못 할 헤레이스의 말에 그것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헤레이스가 그것의 눈을 똑바로 마주 보며 비늘이 돋은 손에 보이지 않는 칼을 쥐여 줬다.
“이즈카엘에게 내가 죽었노라 속삭여.”
“…….”
“내가 사라지면…… 내 시체조차 찾지 못하게 되면 그는 괴로워할 거야. 그때의 너만큼이나.”
옳은 말이었다. 처음 계획대로 이 여자가 죽으면 어그러진 계획도 제자리를 찾을 터였다. 하지만 어쩐지 그 제안이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내키지 않았다. 그것이 헤레이스를 왜 죽이지 못하냐고 스스로에게 묻다 입매를 굳혔다. 정확한 답을…… 낼 수 없었다.
“그걸 네가 어떻게 장담해. 너 따위 인간이 뭘 알아!”
괜스레 골이 난 그것이 목소리를 높였다. 네 개의 눈동자가 갈피를 잡지 못한 채 이리저리 흔들렸다. 가만히 그 꼴을 보던 헤레이스가 그것을 향해 팔을 뻗었다. 비늘이 돋은 얼굴에 얼어붙은 손이 닿았다가 떨어졌다.
“……그 사람은 너와 비슷하니까. 너랑 많이 닮았으니까.”
지금껏 들은 말 중 가장 기분 나쁜 말이었다. 인간과, 그것도 그가 가장 싫어해 고통을 선사한 인간과 비슷하다니. 그러나 그것은 헤레이스의 답에 화를 내지도, 반박을 하지도 못했다. 헤레이스가 에르젠의 머리를 제 무릎 위에 올린 채 그것에게 정확한 요구를 했다.
“나랑 에르젠을 아우뉴 호수에 데려다줄래? 그럼 네가 원하는 대로 끝이 날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