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다, 다가오지 마십…… 커헉!”
밀로 백작이 이안의 앞을 막아선 채 팔을 뻗었다. 벌벌 떨면서도 주인을 지키려는 자세가 라그랑 후작과 마찬가지로 훌륭했다. 그러나 이즈카엘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그의 배에 검을 찔러 넣었다. 백작이 피를 토하며 뒤로 넘어갔다.
“흐이익! 치워! 이거 치, 치우란 말이야!”
훌륭한 수하들과 달리 이안의 모습은 꼴불견이었다. 백작의 시체가 제 몸에 닿자 바닥에 주저앉아 있던 그가 기겁을 하며 다리를 버둥거렸다. 뒤로 기는 모양새가 보기 흉했다.
“뭐…… 뭣들 하나! 나는 이 제국의 황태자야! 나를 구해라! 저 반역자들에게서 나를 보호해!”
이안이 발악하며 남은 수하들에게 고함을 질렀지만 밀로 백작 이후로 용기를 내는 이는 없었다. 모두 주인을 외면한 채 고개를 숙였다.
“공, 공작, 설마 날 베려고? 자네 미쳤나?”
자신을 보호해 줄 이가 아무도 없음을 깨달은 이안의 바지가 천천히 젖어 들어갔다. 두려움에 질린 그가 눈물 콧물을 쏟으며 이즈카엘에게 말했다.
설마하니 그는 이즈카엘이 이리 미쳐 날뛸지 몰랐다. 자신은 누가 뭐래도 황태자였다. 궁에서 수십이 제 손에 죽어도 그다음이면 새 사람이 채워져 있었고, 부모를 제외한 누구도 제게 그리하면 안 된다 말하지 않았다.
그러니 저 사생아도 입을 다물어야 하는 것이 맞지 않는가. 좀 뻣뻣하게 군다 한들 결국에는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고개를 숙이고 그에게 조아려야 하는 게 아닌가. 그 많은 기사들을 이즈카엘의 요구대로 본성 밖에 둔 이유가 무엇인데…….
이안은 황태자라는 제 지위가 자신을 어떤 상황에서도 보호해 주리라 자신했다.
“나를…… 날 베면, 아니 내게 검을 들이댄 순간부터 그대는 반역죄인이야. 이 사실을 내가 폐, 폐하께 알리면…….”
“네놈과 네놈을 따라온 이를 다 죽여 버리면 상관없겠지. 증인이 없으니까. 안 그런가?”
반역죄인이라는 무서운 말에도 이즈카엘은 눈 한번 깜빡이지 않았다. 금안은 이미 서늘한 광기에 물들어 있었다. 그가 이안의 허벅지를 겨냥해 피 묻은 검을 내리꽂았다.
“아아아악!”
“아니면 네놈을 늑대한테 산 채로 던져 주는 것도 괜찮지. 흔적 하나 남지 않을 테니.”
이안이 벌레처럼 꿈틀거리며 몸을 비틀었다. 이즈카엘이 고통에 허우적거리는 그 꼴을 보다가 검을 거둬들였다. 감당하지 못할 충격에 이안이 몸을 덜덜 떨었다.
이즈카엘이 다시 검을 들어 올렸다. 이안의 반대쪽 다리를 겨냥한 그의 눈에는 조금의 자비도 없었다. 하나 이즈카엘이 막 검을 내리꽂으려는 때, 에드가가 급박한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각하!”
날카로운 통증이 옆구리를 찔렀다. 몰려오는 고통에 이즈카엘은 들고 있던 검을 놓쳤다. 다리 사이로 떨어진 검에 기겁한 이안은 볼썽사나운 모습으로 혼절했다.
“흐윽…….”
이즈카엘이 자신의 몸으로 서서히 시선을 떨구었다. 긴 검의 일부가 오른쪽 옆구리에 박혀 있었다.
뚝뚝 떨어지는 피가 바닥을 적심과 동시에 옆구리에 박혀 있던 검이 스르륵 빠져나갔다. 벌어지는 상처에 이즈카엘의 목에서 억눌린 신음이 터져 나왔다.
“허억!”
“각하! 각하!”
달려온 에드가가 그를 부축했다. 이즈카엘이 에드가의 손길을 거부한 채 똑바로 서려 했다. 하지만 깊은 상처에 몸은 말을 듣지 않았다. 비스듬히 선 그가 자신을 찌른 이를 돌아봤다.
무거운 검을 겨우 들고 서 있는 여자는 그가 일평생 눈에 가장 많이 담은 이였다. 그와 시선을 마주하자 헤레이스가 양손으로 애써 쥐고 있던 검을 떨어뜨렸다. 쨍그랑하고 검이 바닥에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헤, 헤레이스…….”
숨을 헐떡이기 시작한 이즈카엘이 아내를 불렀다. 멍하니 검을 보고 있던 헤레이스가 그 부름에 고개를 들어 그를 봤다.
눈물 가득한 푸른 눈에는 온갖 부정적인 감정이 담겨 있었다. 그녀가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도 그를 매섭게 쏘아봤다. 한 톨도 없는 애정. 그 눈빛을 보는 순간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아내의 기억이 모조리 돌아왔노라고.
‘사랑해요, 이즈카엘.’
그가 간절히 바랐던 꿈은 깨졌다. 거짓에서 건져 올려진 이즈카엘에게 남은 것은 아내의 눈만큼 차가운 진실뿐이었다. 피가 빠져나간 몸이 시려 왔다. 흐려지는 시야에 이즈카엘이 에드가를 밀치고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헤레…… 헤레이스.”
언젠가, 아니 불안에 떨 때마다 생각했다. 아내가 만약 모든 기억을 찾으면 자신이 가장 먼저 할 일은 무엇인가. 그녀를 다시 거짓 속으로 돌려보내기 위해 약이라도 구해야 하나? 아니면 영영 잠이라도 재워야 하나?
‘이대로 행복할 텐데 무슨…….’
쓸데없는 고민이라 여기며 항상 답 내기를 회피했다. 하지만 막상 상황이 닥치니 정답을 도출할 수 있게 되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내에게 닿지 않는 사죄는 기만일 뿐이었다. 에드가의 말대로 용서받지 못한다 해도 그가 할 일은 이것 하나였는데…….
이즈카엘이 옆구리에서 손을 떼고 바닥을 짚었다. 고개를 푹 수그린 그가 아내의 발치까지 무릎을 꿇은 상태로 몸을 끌며 기어가기 시작했다.
마침내 아내의 발이 보였다. 이즈카엘은 아내가 놓친 검을 양손으로 들어 올려 그녀에게 바쳤다. 팔을 들어 올리자 옆구리에서 새는 피의 양이 배로 늘었다.
헤레이스가 제 발치에 있는 이즈카엘의 머리와 젖어 가는 바닥을 번갈아 보다 입술을 꾹 물었다. 가늠할 수 없는 감정이 온 마음에 휘몰아쳤다.
“미, 미안…… 흐으…… 헤레이스, 내, 내가 당신…… 윽! 당신한테…….”
죄인처럼 고개를 숙이고 있느라 이즈카엘은 아내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다만 그는 아내의 얄따란 발을 보는 것만으로도 부끄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진즉 이리 빌었어야 했는데.
“용, 용서하지 마. 그냥…… 흐으…… 내키, 내키는 대로 날…… 날 찔, 찔러도…….”
그가 뒤늦은 사죄를 전했다. 그러나 그의 사죄는 완성되지 못했다.
이즈카엘이 제대로 용서를 빌기도 전, 헤레이스의 옆으로 검은 무언가가 다가왔다. 뿌연 연기 같은 그것은 안개 같기도, 너무도 얇아 속이 다 비치는 천 같기도 했다.
헤레이스는 저를 감싸는 검은 무언가에게 관심을 주지 않은 채 이즈카엘만을 내려다봤다. 눈물 때문에 뿌연 시야가 가물거렸다. 그녀의 눈이 증오를, 슬픔을 담았다가 마지막에는 체념을 그렸다.
그녀가 눈을 꼭 감았다. 그러자 어느새 안개처럼 뿌옇게 흩어진 것이 헤레이스를 덮쳐 그대로 삼켰다. 땅만을 쳐다보고 있던 이즈카엘이 상황을 한발 늦게 인지하고 눈을 크게 떴다.
“헤, 헤레이스!”
아내의 이름을 부른 그가 이를 악물고 아내를 삼킨 검은 안개 속으로 몸을 날렸다. 옆구리에서 피와 살점이 떨어져 바닥으로 함께 흩뿌려졌다. 하나 목숨을 건 시도에도 불구하고 그는 아내의 드레스 자락 하나도 쥘 수 없었다.
“커헉!”
몸을 던진 그를 받은 것은 단단한 바닥뿐, 검은 안개는 헤레이스만을 삼킨 채 사라진 후였다.
13장. 침몰
눈을 떴을 때 헤레이스는 성의 지하에 있었다. 1년 내내 얼음이 녹지 않는, 장소의 특성상 사용인들조차 출입을 꺼리는 곳. 한기밖에 없는 장소를 헤레이스는 무미건조한 눈으로 훑었다.
그녀의 옆으로 작은 직사각형의 얼음덩어리들이 나란히 나열해 있었다. 헤레이스는 말없이 그것들을 살피다 무언가를 발견하고 그중 하나의 앞에 섰다. 비어 있는 다른 얼음덩어리와 달리 그 위에는 누군가가 똑바로 누워 있었다.
얼음덩어리에 한참 못 미치는 작은 몸. 제대로 피어나지도 못한 채 차가운 땅속으로 끌려간 어린 생명. 헤레이스의 손이 그녀의 가여운 아들에게 향했다.
“에르젠…….”
하얀 서리가 서러운 목소리와 함께 흘러나왔다. 헤레이스는 차갑다 못해 얼어붙은 에르젠을 끌어안고 아이가 살아 있을 때 그리했던 것처럼 뺨을 비볐다.
“미안해.”
얼마를 그러고 있었을까. 밖의 날씨에 맞게 입은 드레스 아래로 한기가 파고들었다. 헤레이스의 얼굴과 손 또한 점점 차가워져 에르젠과 비슷할 정도가 됐다.
“미안해, 내 아가. 에르젠. 에르젠.”
헤레이스는 식어 가는 몸에도 개의치 않고 계속해서 에르젠을 어루만졌다. 그나마 온기가 있는 그녀의 눈물이 아이의 얼굴을 적셔 위에 내려앉은 서리를 거둬들였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이었다. 차가운 공기는 어느 순간부터 헤레이스의 눈물마저 얼렸다.
아이의 얼굴이 제 눈물로 지저분해지자 헤레이스가 울음을 멈췄다. 그녀가 파리하게 얼어붙은 손가락 끝을 소매에 숨긴 채 아이의 얼굴을 정성스레 닦았다.
금세 깨끗해진 얼굴은 창백한 것을 제외하고는 헤레이스의 기억 속 모습 그대로였다. 그녀가 에르젠의 얼굴을 물끄러미 보다 아이의 머리카락과 옷 주름 등을 정돈했다. 꽁꽁 얼어 딱딱해진 그것들이 바스락 소리를 내며 헤레이스의 손가락에 고통을 줬다.
어느 정도 원하는 바를 이룬 그녀는 핏기가 사라진 입술을 아이의 이마에 가져다 댔다. 혈기가 오래전에 사라진 에르젠의 이마는 얼음과 같았다.
입맞춤을 마친 헤레이스가 감각이 사라진 제 입술을 한 번 문지르곤 신을 벗었다. 침대에 오르듯 얼음 위에 오른 그녀가 몸을 뉘고 팔을 뻗어 아들을 껴안았다. 푹신한 침구가 깔린 침대와 달리 얼음덩어리는 속까지 단단히 얼릴 듯 차갑고 딱딱했다.
헤레이스의 검은 머리카락과 드레스부터 서리가 끼기 시작했다. 하지만 눈앞이 흐려질 정도로 차가운 온도에도 헤레이스는 따스한 미소를 띤 채 아들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에르젠……. 사랑스러운 내 아가.”
어떤 이유에서든 잊어서는 안 될 아이였다. 그녀가 어미인 이상 아이의 죽음으로 인한 고통과 괴로움은 피하지 말고 감수해야 하는 몫이었다.
“미안해. 엄마가…… 미안해. 너무 미안해.”
하지만 도망쳤다. 그저 잊고 싶다는 이유로, 모든 고뇌에서 벗어나 편해지기 위해 아이의 죽음을 외면하고 거짓을 덧씌웠다.
“이제 엄마 앞에 나타나는 게 싫으니?”
그 대가는 혹독했다. 기억을 잃기 전까지만 해도 눈앞에 선명히 보이고 귓가에 분명하게 맴돌던 아들이 더는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았다.
“엄마랑 말도 하기 싫어? 널 잊은 엄마가 미운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