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화.
“으음…… 왜 이렇게 눈이 따갑지.”
“…….”
“이즈카엘, 좀 불어 줄래요? 눈에 뭐가 들어갔나 봐요.”
잠에서 깬 헤레이스의 눈은 행복에 가득 차 있었다. 이즈카엘은 제게 자연스레 장난치는 아내를 아무 말 없이 안았다.
“이즈카엘?”
“…….”
“아직 해도 안 졌어요. 이러다 누가 보기라도 하면…….”
이즈카엘의 속은 이미 불안에 완전히 파먹힌 후였다. 빈껍데기만 남은 사내는 당장 품 안에 거짓만 쫓은 채 눈을 감고 꿈으로 도망쳤다.
“……잠깐만.”
“…….”
“잠깐만 이렇게 안고 있자, 응?”
그러나 달콤한 꿈은 무엇보다 짧은 법. 꿈결 같은 시간은 눈 깜빡할 사이 흘렀다.
* * *
마침내 반갑지 않은 손님들과 약속한 시간이 끝났다. 이안을 필두로 심문을 하러 온 이들이 하나둘 다시 말에 올랐다.
“공작의 훌륭한 환대에 감사하네. 이만 돌아가지.”
“만족스러웠다니 다행입니다.”
“가기 전에 심문 결과에 대해서 귀띔해 주자면…… 우선 샤를에 관한 건 걱정 말게. 나와 여기 있는 심문관들은 조사 결과 공작이 샤를의 일에 무관하다고 판단했네.”
“…….”
“피를 나눈 동생의 일이라 기분이 좋지 않았겠어. 고생했네. 폐하께는 내가 잘 말씀드리지. 그런데…….”
“…….”
“……공작 부인은 배웅하러 나오지 않는 건가? 부탁까지 했는데 말이야.”
이안이 출발할 생각은 않고 두리번거리며 헤레이스를 찾았다. 그 모습에 이즈카엘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용서하십시오. 아내가 몸이 좋지 않습니다.”
이즈카엘은 표정을 숨길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의 단호한 태도에 이안의 뒤에 있던 라그랑 후작의 얼굴이 또 한 번 붉어졌다. 하지만 떠나는 마당이라 그런지 전처럼 무어라 고함치지는 않았다.
“그런가? 하지만 난 조금 전에 정원에서 공작 부인의 웃음소리를…… 아! 저기 오는군.”
이안이 거짓을 고하는 것이냐고 돌려 말하려다 이즈카엘의 뒤를 보고 손뼉을 쳤다. 그의 말에 놀란 이즈카엘이 재빨리 뒤를 돌아봤다.
헤레이스가 아이와 함께 그들과 조금 떨어진 곳에 서 있었다. 그녀의 발치에는 동그란 공 하나가 굴러다니고 있었다. 이즈카엘이 아이를 노려봤다. 그러자 아이가 냉큼 공을 주워 헤레이스의 뒤로 몸을 숨겼다.
“아이가 공작을 많이 닮았군. 소문에는 적자는 공작 부인을, 공작의 사생아는 공작을 빼닮았다던데…… 와전된 모양이야.”
아이를 본 이안이 중얼거렸다. 다행히 거리가 있어 헤레이스는 그 말을 듣지 못했다. 그러나 이안은 말을 하며 헤레이스와 부러 시선을 맞추었다.
“아…….”
헤레이스의 얼굴이 창백히 질렸다. 그녀가 고개를 숙인 채 머뭇거렸다. 다가갈까 말까 고민하는 모습에 이즈카엘이 재빨리 그녀에게 다가갔다.
“공이 갑자기 이리로 굴러 와서…….”
헤레이스가 급작스럽게 이즈카엘과 마주하자 말을 더듬거리며 상황을 설명했다. 하지만 보통의 공이라면 정원에서 여기까지 굴러 올 리 없었다. 이즈카엘의 매서운 눈이 헤레이스의 드레스 자락을 쥔 작은 손에 닿았다가, 겁먹은 헤레이스의 얼굴에 누그러졌다.
“헤레이스, 그만 들어가. 당신이 나오지 않아도 괜찮은 자리야.”
“하지만 전, 전하께서 가시는데…….”
“신경 쓸 필요 없어. 내가 배웅하면…….”
“공작, 그건 아니지. 난 부인에게 배웅하러 나오기로 약속을 받았단 말이야. 공작 부인, 사흘 전 약속을 잊은 건 아니겠지?”
이안이 부부에게로 다가왔다. 사흘 전이라는 말에 이즈카엘의 호박색 눈이 번뜩였다. 그가 이안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헤레이스를 몸으로 가렸다.
“조금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아내는 몸이 좋지 않습니다. 배웅이라면 제가 해 드릴 테니 이만 출발하십시오.”
이안을 내려다보는 시선이 가히 위압적이었다. 오싹한 등골에 이안이 저도 모르게 한 발 물러났다.
하나 뒷걸음을 치고 나니 자존심이 상했다. 예전이 떠올랐다. 스승들의 수군거림. 아비의 비교. 그때와 같이 자신을 무시하는 저 표정……. 이안의 잇새에서 으드득 이 가는 소리가 났다.
“공작, 감히 누구한테 명령인가?”
순식간에 공기의 흐름이 변화하자 밀로 백작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의 주인은 감정의 변화가 지나치게 빠른 데다 종잡기 힘들었다. 종일 웃으며 지내다가도 옷 한 벌, 차 한 잔에 심기가 틀어져 시중드는 이의 목을 잘랐다.
밀로 백작이 아슬아슬한 분위기를 중재하기 위해 용기를 냈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이안에게 나선 이가 있었으니…… 황실 기사에게 무언가 말을 전해 들은 라그랑 후작이었다. 그는 기사에게 말을 듣자마자 의미심장한 미소를 띠며 이안의 귀에 입을 가져가 댔다.
“전하, 도착 전…….”
어딜 끼어드냐며 눈을 치켜뜬 이안이 도착 전이라는 말에 입을 다물었다. 그가 라그랑 후작의 말을 경청하며 눈동자를 데구루루 굴렸다.
“공작의 말이 맞아. 그만 출발해야지. 한데 그전에…….”
한참 만에 고개를 돌린 이안의 목소리는 다시 경쾌하게 바뀌어 있었으나 길게 올라간 입꼬리는 어딘가 불쾌감을 자아냈다.
“……환대에 대한 보답으로 귀한 선물을 하나 줄까 해.”
그가 고개를 까닥이자 라그랑 후작이 가져오라 소리치며 손짓을 했다. 그러자 뒤에 있어 보이지 않았던 기사 둘이 앞으로 나섰다. 그들의 손에는 커다란 나무 상자 하나가 들려 있었다.
이즈카엘은 상자를 보자마자 제 뒤에 있던 헤레이스와 함께 몇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기사들이 가져온 나무 상자는 눈으로 보기에는 특별할 것이 없었다. 하지만 전장에 익숙한 이즈카엘은 나무 상자에서 옅지만 분명한 피 냄새를 맡았다.
“공작, 난 그대를 아껴. 여러 의미로 말이야.”
이안은 기대에 한껏 부풀어 있었다. 자신이 쓴 극을 처음 무대에 올리는 극작가처럼 그의 눈이 흥분으로 번들거렸다.
“그대는 과거 내 행동 때문에 내가 그대를 싫어한다 여기는 모양인데…… 그때는 내가 철이 없었어서 그런 거야. 우리 사이 오해도 풀 겸 내 아끼는 그대를 위해 선물을 하나 준비했어. 공작 부인도 마음에 들어 했으면 좋겠군.”
“……치우십시오.”
상자 모서리가 피로 젖어 들어갔다. 바닥을 적시기 시작한 붉은 액체에 이즈카엘이 낮은 목소리로 읊조렸다. 하지만 이안은 그의 말을 무시한 채 팔짱을 끼고 발로 상자를 툭툭 쳤다. 귀한 선물이라 말한 것과 달리 상자로 향한 눈은 더러운 쓰레기를 보는 듯했다.
“여기로 오는 길에 서신 하나를 받았네. 반역죄로 추방된 이가 자네 영지로 들어왔다더군.”
대강 짐작이 가는 바에 이즈카엘의 눈이 커졌다. 그러고 보니 에드가가 주마다 한 번 서신을 보내는 폴에게서 연락이 없다고 보고한 참이었다. 약속된 기간에서 하루가 지났을 뿐이라 별일 아니겠거니 생각했는데…….
“한데 그 죄인이 공작 부인의 핏줄이라지 않아? 그걸 보니 걱정이 되더군. 그러잖아도 폐하의 명으로 공작을 심문하러 가는 길인데…… 반역죄로 추방된 이가, 그것도 공작 부인의 핏줄이 북부로 오다니. 딱 오해할 만한 상황 아닌가.”
“아…….”
이즈카엘의 뒤에서 긴 탄식이 들렸다. 이즈카엘이 고개를 돌려 헤레이스를 살폈다. 아니나 다를까, 헤레이스 또한 이안의 말을 알아들은 낌새였다. 무언가 예상한 듯 그녀의 눈이 상자에 고정된 채 움직이지 않았다.
이즈카엘이 몸을 떠는 아내의 귀를 막았다. 하나 때는 이미 늦은 후였다.
“그래서, 내가 공작 그대를 대신해 처리했네. 그대가 괜한 오해를 사지 않도록 말이야.”
이안은 핏기가 가신 헤레이스의 얼굴을 구경하며 빠르게 말을 이었다. 그리고 제 옆의 기사들에게 명했다.
“열어.”
덜컹 소리와 함께 상자 안이 드러났다. 그리고 그 안에 있는 것은…….
“아…… 크리스, 오빠. 오, 오빠…… 안, 아나…… 흐으.”
……예상대로 크리스와 안나였다.
상자 안에는 죽은 이가 뿌린 것으로 보이는 피가 흥건했다. 나무 상자 안을 본 헤레이스의 신음이 짐승의 울음소리로 변했다. 이즈카엘이 몸에 힘을 풀고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으려는 그녀를 붙들었다.
“아! 거기 여자는 함께 있기에…… 반역죄인과 같은 마차를 탈 정도면 친밀한 사이일 게 아닌가. 혹 몰라 함께 처리했네. 본래 반역죄는 싹도 없애 버려야 하거든.”
“아…… 아으…….”
“물론 공작 부인에게는 좀 미안하더군. 죄인이라 해도 핏줄이잖나.”
“아으…… 오, 오빠…… 안나…….”
“하지만 공작 부인은 공과 사를 잘 구분하는 이니까 괜찮을 거라 생각했네. 왜, 전에도 반역죄에 연루된 약혼자를 버리고 공작과 결혼했잖나. 부인이라면 가족도 약혼자처럼 외면할 수 있겠……!”
헤레이스의 울음에 이안은 더욱 신이 나 주절거렸다. 하지만 그 혼자만의 즐거운 수다는 오래가지 못했다.
“허억!”
“윽!”
검을 뽑는 소리조차 없이 날카로운 예기가 이안의 귀를 스쳤다. 그리고 그가 서늘한 날을 인지하기도 전, 상자 옆에 있던 기사 둘의 목이 허공에 떴다.
그 광경에 주인과 마찬가지로 이죽이며 상황을 보고 있던 라그랑 후작이 눈을 부릅뜨고 발을 박찼다. 누군가의 목숨이 날아가는 순간에도 주인을 구하려는 모습이 충신에 가까웠다.
“전…… 으아악!”
그러나 그도 단 한 번의 휘두름에 피를 뿌렸다. 쿵 소리와 함께 라그랑 후작의 육중한 몸이 이안의 바로 옆 바닥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졌다. 생명을 잃은 육신에서 피가 콸콸 쏟아지다시피 했다.
“전, 전하를 보호해라!”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밀로 백작이 황실 기사들에게 명했다. 하지만 이즈카엘은 주춤거리는 기사든, 바로 그에게 달려드는 기사든 모조리 베어 넘겼다. 낙엽이 바람에 날리듯 사람의 목숨이 한순간에 사라졌다. 갑자기 자행된 학살에 모두의 눈이 커다래졌다.
“각하를 지켜라!”
주인의 돌발 행동에 놀라 굳어 있던 에드가가 기사들에게 명하며 이를 악물었다. 지금 자신들의 행동은 반역죄였다. 그렇다 해도 주인이 우선이었다.
이를 악문 에드가가 이즈카엘의 뒤에서 그를 공격하려는 황실 기사를 베자 세르펜스의 다른 기사들도 하나둘 검을 뽑아 들었다.
성은 한순간에 검 부딪치는 소리와 피로 가득 찼다. 하지만 애초 전력의 차이는 정해져 있었다. 곧 황태자의 일행 중에 무장한 이들은 모두 싸늘한 주검으로 바닥에 눕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