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화.
이안의 입에서 아이까지 나오자 헤레이스가 머리를 부여잡았다. 순간 두통이 일었다. 무언가 안쪽부터 머리를 부수는 것 같았다. 결국 참지 못한 헤레이스가 신음을 내며 비틀거렸다.
“몸 상태가 별로인 듯 보이는데 그만 돌아가지. 그대가 여기서 쓰러지기라도 하면 공작의 분노는 내 차지일 것 같은데.”
이안은 휘청이는 여인을 보고도 부축을 한다거나 걱정을 해 주진 않았다. 그는 오히려 헤레이스에게서 한 발 떨어져 구경하듯 그녀를 바라봤다. 웃음까지 짓는 모습이 이안은 마치 그녀의 고통을 즐기는 것 같았다.
헤레이스가 대강 고개를 숙이고 몸을 틀었다. 예의가 아니라고 해도 상관없었다. 당장 이 상황을 벗어나야 했다. 머릿속을 채우기 시작한 여러 장면과 목소리들. 이대로 계속 떠올리며 듣고 있다가는 미쳐 버릴 것 같았다.
“잠깐.”
막 도망치려는 그녀를 이안이 붙잡아 세웠다. 한 손으로 그녀의 어깨를 붙잡은 그가 잔뜩 구겨진 미간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며 속삭였다.
“……마지막으로 부탁 하나만 들어줄 수 있나?”
빨리 벗어나고픈 헤레이스가 무례한 접촉을 지적하지도 않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허락에 이안이 헤레이스의 어깨를 그러쥔 손에 힘을 줬다.
“사흘 후에 떠날 때 남편과 함께 그대도 마중을 나와 줬으면 좋겠군. 그때라도 그대 얼굴을 한 번 더 보고 싶어서 말이야. 그리고 줄 선물도 있고.”
음흉한 미소에는 악의가 가득했다. 그러나 어지러운 시야에 헤레이스는 그를 눈치채지 못했다.
그녀는 이안이 어깨를 놓자마자 재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 * *
이즈카엘은 아내의 상태가 심상치 않다는 말에 곧바로 침실로 달려갔다.
헤레이스는 그를 기다린 모양이었다. 침대에 앉아 있던 그녀는 그가 방으로 들어오자 곧장 고개를 들고 그를 봤다.
“헤레이스, 몸이 불편하다 들었는데…….”
한걸음에 아내에게 다가간 이즈카엘이 그녀의 흰 이마를 짚었다. 열이 있나 확인하는 모양새가 다정했다. 하지만 헤레이스는 이즈카엘의 손을 단호하게 쳐 냈다.
아내의 표정이 평소와 다르다는 것을 눈치챈 이즈카엘이 입을 다물었다. 헤레이스가 침대에서 천천히 일어나 그를 불렀다.
“이즈카엘.”
“…….”
“당신 나한테 숨기는 거 없어요?”
헤레이스가 남편의 금안을 들여다봤다. 이즈카엘은 아내의 눈을 피하지 않은 채 얼굴 위로 두꺼운 거짓을 썼다. 그가 진실한 목소리를 꾸며 내며 고개를 저었다.
“없어.”
“…….”
“당신한테 숨기는 거 없어, 헤레이스.”
그를 찬찬히 뜯어보던 헤레이스의 얼굴이 점차 일그러졌다. 그녀가 날카롭게 소리 질렀다.
“거짓말!”
“…….”
“누굴 바보로 알아요? 나만 모르는 일이 한두 개가 아니야!”
“…….”
“당신 내게 무슨 짓을 했어! 내 머리가! 기억이 왜 이러냐고!”
아내의 격앙된 목소리에 이즈카엘이 입술을 세게 물었다. 어찌 된 일인가. 아내는 영영 기억을 되찾지 못하는 것이 아니었나.
‘이대로 모조리 기억해 내면…….’
덜컥 겁이 났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그에게 사랑한다고 속삭이던 아내인데……. 이대로 잃을 수는 없었다. 찰나의 달콤함을 기억한 그가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머리를 굴렸다.
“헤레이스, 뭔가 오해가 있는 모양이야. 당신이 모르는 일이라니. 그런 게 어디 있어.”
“…….”
“갑자기 왜 이러는지 나한테 차근차근 설명해 봐. 혹 누구를 만났어? 누구한테 쓸데없는 말이라도 들은 거야?”
이즈카엘은 우선 헤레이스에게 누군가가 접근한 건 아닌지 의심하며 그녀를 달래듯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하지만 이즈카엘의 물음에 헤레이스는 더욱 험악하게 눈을 치켜뜰 뿐이었다. 그녀가 믿었던 연인에게 살해당하는 여인처럼 날카로운 소리를 내질렀다.
“브륀튈트가 죽었어! 내가 준 적 없는 목걸이가 아이 손에 들려 있고! 다른 사람이 말해, 당신에게 정부가 있다고! 정부에게서 아이를 봤다고! 그리고 그것 때문에 내가 도망간 건지 물어!”
괴성에 가까운 소리였지만 그 안에 담긴 내용을 알아듣지 못할 이즈카엘이 아니었다. 이즈카엘이 갑자기 튀어나온 진실에 놀라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그의 얼굴에서 무언가를 본 헤레이스가 그에게 달려들어 가슴께의 옷을 틀어쥐었다.
“아니라며! 아니라고 했잖아! 그런데 당신…… 왜 밤마다 나한테 잘못했다고 빌어? 내 기억 속에 당신이 잘못한 일은 없는데! 왜 빌어! 왜! 왜!”
손톱으로 긁어내리고 주먹으로 때리는 몸짓에는 온갖 울분이 다 담겨 있었다. 지금에라도 아니라고 답해야 하는데……. 정신을 차린 이즈카엘이 부정하기 위해 헤레이스의 양 손목을 틀어쥐었다. 하나 고개를 든 헤레이스는 그의 또 다른 죄악을 입에 올리기 시작했다.
“그뿐인 줄 알아? 이즈카엘 당신…… 샤를한테는 뭐가 미안한 거야? 전하께서 의심하는 것처럼 그 얘한테 무슨 일이라도 벌인 거야?”
“…….”
“샤를에 대해 깊게 생각하면 당신 목소리가 머릿속을 울려. 당신이 샤를과 내 사이를 오해하는 모습이 그려져. 분명 없는 기억인데 있었던 일처럼 너무 선명하게 떠오른단 말이야!”
쿵. 심장이 떨어져 내렸다. 이즈카엘이 저도 모르게 아내의 손목을 쥐고 있던 손에서 힘을 풀었다. 그에게서 벗어난 헤레이스가 이번에는 제 약지에 끼워진 반지를 빼내며 소리쳤다.
“이것도 마찬가지야! 아무 생각 없었는데…… 이걸 끼고 있는 손가락이 너무 시려. 반지를 만질 때면 뺨이 화끈거리고 여기가 아파. 아파서 너무 괴로워.”
쨍하는 소리와 함께 반지가 바닥에 부딪히더니 침실 어느 구석으로 굴러 들어갔다. 반지의 궤적을 따라 눈동자를 굴린 이즈카엘이 겁에 질려 덜덜 몸을 떨었다. 이 정도면 모조리 기억해 낸 것이 아닌가.
“당신은 아니라고 하는데…… 내 기억에도 없는 일인데…….”
“…….”
“아니지? 내가…… 내가 뭘 착각하는 거지?”
헤레이스가 마구잡이로 흔들리는 사내의 몸을 붙잡고 늘어졌다. 울음을 토해 내는 목소리가 어딘가 절박했다.
이즈카엘이 아직 아내의 입에서 나오지 않은 그의 가장 큰 죄악 하나를 상기했다. 그것만은 기억해 내면 안 된다. 그가 그리 생각함과 동시에 오열하고 있던 헤레이스가 울음을 뚝 멈췄다.
“아…….”
“…….”
“내 아가…… 에르…… 흐읍!”
아내의 입에서 반쯤 나온다 만 이름. 이즈카엘이 헤레이스의 입을 틀어막았다. 하지만 터진 둑을 사람의 손으로 막을 수는 없는 법. 헤레이스의 눈이 점차 커지더니 어느 장면이 푸른 눈에 똑똑히 떠올랐다.
“아아악!”
창자가 끊어지고 심장이 갈가리 찢긴다 한들 이런 비명을 지르진 못할 것이다. 헤레이스는 영혼이 부서지는 고통을 느끼며 목이 아닌 몸 전체로 울음을 내뱉었다.
“헤레이스!”
흰자위가 드러나고 심각해 봬는 그녀의 모습에 이즈카엘이 정신을 붙들어 맸다. 그리고 아내를 붙잡아 제 품에 욱여넣었다.
“아악! 이거 놔! 이 살인자! 당신도 카르베에 떨어져야 해!”
헤레이스가 헐떡이며 그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 쳤다. 날카로운 손톱이 사내의 팔에 박혀 죽죽 선을 그었다. 그러나 이즈카엘은 피가 비치는 손과 팔에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의 온 신경은 아내에게 향해 있었다.
“헤레이스, 진정해! 헤레이스!”
“아악! 아아악!”
그녀가 진정할 기색이 도통 보이지 않자 이즈카엘이 손을 검날처럼 세웠다. 그가 아내의 뒷목을 살짝, 그러나 정확히 쳤다.
헤레이스가 줄이 끊어진 인형처럼 허물어져 내렸다. 이즈카엘은 힘 빠진 헤레이스의 몸을 침대에 뉜 채 숨을 거칠게 내쉬었다.
‘왜…… 갑자기 왜 이렇게…….’
내려다본 아내의 얼굴은 눈물로 엉망이었다. 그는 덜덜 떨리는 손을 아내의 얼굴에 가져다 댔다. 손가락으로 그녀의 뺨을 가로지르는 눈물을 거두고 소매로 닦아 냈다.
그러나 눈물을 지웠다고 해서 고통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아내는 혼절한 상태에서도 괴로움에 얼굴을 구기고 있었다. 그뿐인가. 빨갛게 짓무른 눈가에는 새로운 눈물이 솟고 있었다.
이즈카엘이 무너지듯 침대 머리맡에 앉았다. 어찌해야 하지? 길을 잃어버린 아이처럼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
“안녕, 아버지. 좋은 아침이야.”
이즈카엘의 눈가에 내려앉은 그림자가 시시각각 짙어질 때였다. 창문에 비치는 햇살과 함께 아이가 그려지듯 나타났다. 이즈카엘은 자신과 닮은 그것을 보자마자 몸을 튕겨 그 앞으로 튀어 나갔다.
“돌려놔! 헤레이스를 당장 원래대로 되돌려놓으란 말이다!”
“되돌려?”
아이의 몸이 달랑 올라갔다. 그것이 이즈카엘에게 잡혀 공중에 대롱대롱 매달린 채 반문했다.
“어떻게?”
“…….”
“다 기억하는 아내로 되돌리란 말이야? 아니면 아무것도 모른 채 네게 사랑한다 속삭이는 아내로 되돌리란 말이야?”
숨이 턱 막히며 말이 나오지 않았다. 이즈카엘의 호박색 눈이 사정없이 흔들렸다. 그것이 제대로 초점도 맞추지 못하는 아비를 쳐다보다 아비의 손을 쳤다.
“좋아. 아들 노릇 제대로 해야겠지.”
아직은 말이야.
아이가 고양이처럼 가볍게 바닥에 착지하더니 종종걸음으로 어미에게 다가갔다. 이즈카엘은 그것이 제 손에서 벗어나 아내에게 향하는 것을 보고 고개를 떨궜다. 자신은 무기력하게 서 있는 것 외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어머니, 아프지 마세요.”
아이가 엉망인 어미의 얼굴 여기저기에 가벼운 입맞춤을 했다. 그러자 끊임없이 흐르던 눈물이 멎고 헤레이스가 평온한 얼굴을 되찾았다. 그것이 헤레이스의 가슴에 귀를 대고 규칙적인 숨소리를 듣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빙긋, 웃음을 지었다.
“……깨어나면 널 사랑하는 아내로 돌아올 거야, 아버지.”
그 말을 마지막으로 그것이 문가로 다가갔다. 부모를 위해 자리를 피해 줄 요량이었다. 문을 열기 전 그것이 뒤를 돌아봤다.
무기력하게 서 있던 아비는 그새 어미에게 다가가 무어라 속살거리고 있었다. 아비의 눈물은 보는 것만으로도 달았다.
하지만 사내의 입술이 여인의 입술을 삼키는 순간 그것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문고리에 손을 올렸던 그것이 머뭇거리며 멈춰 섰다.
잠시 얼굴을 구기던 그것이 이내 몸을 완전히 틀고 방문을 열었다. 더 큰 달콤함을 위해 조금의 양보는 할 수 있었다. 어차피 며칠 지나면 알아서 꿈에서 깰 어미가 아닌가.
복도를 거닐던 그것이 나타날 때와 마찬가지로 햇빛 사이로 자취를 감추었다. 지나가던 사용인 하나가 기이하게 사라진 아이의 형상에 눈을 깜빡이며 중얼거렸다.
“내가 꿈을 꾸고 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