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화.
어느 봄날, 그는 끔찍이 싫어하는 아비의 호위 기사와, 이복동생일지도 모르는 첫사랑 사이의 기류가 묘함을 누구보다 먼저 알아챘다.
‘왜 하필 너희 둘이…….’
그 두 사람이 서로를 보는 시선이 싫었던 그는 이즈카엘과 헤레이스 사이의 소문을 부풀리고 누구보다 앞장서 두 사람을 괴롭혔다. 점점 더 쌓이는 그들에 관한 모욕적인 소문들……. 그 소문들의 가장 앞에는 이안이 있었다.
그리고 그쯤 태자궁에서는 한미한 가문 출신의 시종과 시녀들이 죽어 나가기 시작했다. 시신이 된 시종들의 특징은 옅은 머리색이요, 시녀들의 특징은 짙은 머리색이었다.
‘아악! 다 죽어! 죽어 버리란 말이야!’
그러나 페가토 후작의 반역을 비롯한 일련의 일 이후, 이즈카엘과 헤레이스는 결혼에 성공했다. 두 사람의 결혼 소식을 듣는 순간 이안은 머리끝까지 치솟는 화를 참기가 어려웠다. 그에게 지독한 패배감을 선사한 사내가 영영 차지할 수 없는 여자를 가졌다는 사실이 그의 가장 저열한 감정을 자극했다.
태자궁에서 실려 나오는 시체는 헤레이스와 이즈카엘의 결혼 이후 티가 나게 늘어났다. 그러나 하나뿐인 아들에게 혹여나 그것이 흠이 될까 두려웠던 황후의 비호 아래, 그 사실들은 철저히 비밀에 부쳐졌다.
눈에 보이지 않으면 덜할까 싶었지만 미움은 날이 갈수록 커지기만 했다. 이안은 두 사람이 북부로 떠난 뒤에도 괴롭힘을 멈추지 않았다.
‘토벌이라면 당연히 세르펜스 공작이 직접 나서야지요.’
북부에 정치적인 압박을 가하는 것도, 아비의 이름을 빌려 이즈카엘에게 토벌을 자주 명하는 것도 모두 그였다. 물론 이즈카엘은 매번 능력껏 그의 괴롭힘에서 벗어났다.
‘……샤를의 행방불명에 세르펜스 공작이 의심된다?’
‘네. 샤를 님의 행적을 조사한 결과, 샤를 님은 세르펜스 성 근처에서 갑자기 사라졌습니다.’
‘그것만 가지고 공작을 어떻게 의심해.’
‘공작은 사생아가 아닙니까. 그러잖아도 그가 공작이 될 때 핏줄 때문에 반대도 많았고 그…… 여자 문제도 있고. 신분을 잃었다 한들 동생이 눈엣가시처럼 느껴졌을지 모릅니다.’
‘흠…… 그럴듯하군.’
‘폐하께서 샤를 님의 행방을 어떻게든 찾으라 난리십니다. 죽은 거라면 시체라도 찾으라고……. 죄인이 죽어 마음이 많이 약해진 모양이십니다.’
‘그거 다 연기야. 고모님도 죽고 샤를도 죽은 거 같으니 이제 와 가족을 사랑하는 따뜻한 황제를 연기 하는 거지. 살아 있을 때 신경도 안 썼던 거 보면 몰라?’
약이 오른 이안에게 이번 심문은 하늘이 내린 기회였다. 그는 심문단을 꾸리며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만을 목적으로 삼았다.
행복하게 살고 있을 두 사람을 마음 가는 대로 괴롭히는 것.
‘평민으로 떨어진 반역자의 자식. 알 바도 아니고 관심도 없어. 하지만 공작이 정말 동생을 죽인 거라면 재미있겠군. 좋아. 아버지께 간다. 준비해. 지금 아버지 상태면 심문도 허락하겠지.’
율리스마저 죽은 지금, 더는 귀족도 아닌 외사촌의 생사는 애초부터 이안의 관심 밖이었다. 그는 샤를의 문제로 이즈카엘과 헤레이스 부부를 괴롭히고 싶을 뿐이었다. 두 사람은 외사촌에게 각자 죄책감을 느끼고 있을 테니까.
‘……어떤 인장도, 서명도 없군요. 믿을 수 없는 서신입니다.’
다만 이안은 샤를의 일 외 다른 기회까지 자신에게 찾아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가 사흘 뒤 있을 즐거움을 상상하며 손에 있던 서신을 접어 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 아직 끝내지 못한 산책을 위해 걸음을 옮겼다.
그가 몸을 돌리기 무섭게 때마침 만나고 싶었던 이가 그의 시야에 들어왔다. 자신에게 연달아 찾아오는 행운에 이안은 하늘을 향해 입맞춤한 손바닥을 내밀며 중얼거렸다.
“요새 행운의 여신을 날 아끼는 모양이야.”
헤레이스는 눈앞의 사내를 두려운 눈빛으로 올려다봤다. 현재 그가 얼굴 가득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결혼 전 수도에서 지낼 때 그가 어땠는지 기억한 탓이었다. 게다가 그는 황제의 아들이 아닌가. 반역의 문제에서 벗어날 수 없는 헤레이스는 그를 보는 것만으로 두려움에 휩싸였다.
“대단한 우연이군. 공작의 눈을 피해 부인을 만나게 되고 말이야. 공작은 그대가 눈 밖에서 벗어나면 미쳐 날뛸 것처럼 굴던데.”
겁먹은 헤레이스를 눈치챈 모양인지 이안이 짧게 콧노래를 부르며 손을 뻗었다. 두려움에 질린 헤레이스는 움직이지도 못한 채 그걸 보고만 있었다.
“일주일 전에 제대로 못 나눈 인사나 할까? 잘 있었나, 헤레이스?”
이안은 헤레이스의 머리카락 쥐고 그녀의 파리한 얼굴을 구경하더니 손을 내려 헤레이스의 손을 붙잡았다. 헤레이스는 장난스럽게 제 손등에 입을 맞추는 그를 보다 퍼뜩 정신을 차리고 손을 뺀 채 한 발 물러나 인사를 올렸다.
“……아나이스의 작은 태양을 뵙습니다.”
떠는 와중에도 그를 쳐다보는 헤레이스의 눈에는 목적이 있었다. 이안이 조소를 흘리며 빈정거렸다.
“시중드는 이 하나 없이 나온 걸 보면 딱 봐도 몰래 날 찾아왔군. 그래, 화초 같은 그대가 무슨 일이지?”
화초라는 단어에 유독 힘이 실린 것은 착각이 아닐 터였다. 하지만 이안의 예상대로 헤레이스는 그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었다. 그녀가 이안의 비웃음을 무시한 채 입을 열었다.
“샤를…….”
“응? 잘 안 들리는데.”
“샤를에 대해 아시는 바를 알려 주세요.”
“…….”
“그때 행, 행방불명되었다고…….”
샤를을 걱정하는 헤레이스의 말에 이안이 경멸을 숨기지 않았다. 그가 팔짱을 낀 채 헤레이스를 우습다는 표정으로 내려다봤다.
“약혼자의 형과 결혼해 잘 살고 있는 그대가 전 약혼자를 걱정하다니. 조금 우습게 느껴지는군. 그대에게는 전 약혼자가 이대로 사라지는 게 더 좋지 않나? 아니면 설마 양손에 사내 둘을 쥐고 싶은 거야? 하긴 수도에 있을 때도 그대는 그 얼굴로 사내들을 꼬여 냈지.”
“…….”
“농담이야. 한데 그걸 왜 그대가 불편해하는 내게 묻지? 그것도 이리 몰래 찾아와서 말이야. 남편인 공작에게 물으면 될 일 아닌가. 그가 아는 대로 말해 줄 텐데.”
이안의 말에 헤레이스가 침을 삼켰다. 이즈카엘에게는 물을 수 없었다. 이유는 모르지만 이 성내 모든 사람이 제게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고 헤레이스는 확신했다.
‘브륀튈트는…… 그 말은…… 몇 년 전에 죽었습니다.’
몰랐던 죽음.
‘엄마가 줬어. 기억 안 나?’
기억에 없는 일.
‘미안해, 샤를.’
그리고 이해 못 할 남편의 사과.
의심을 가지고 주변을 살펴보자 그녀를 감싸고 있는 모든 것들이 이상했다. 때문에 그녀는 샤를에 대해서도 남편에게 묻지 않았다.
‘……둘 사이에 뭐가 있군.’
헤레이스를 보는 이안의 눈이 가느스름해졌다. 불안정하게 떨리는 푸른 눈동자 안에는 분명 의심이 자리하고 있었다. 어찌하면 둘 사이가 더 틀어질까. 잠시 고민하던 이안은 사실대로 말해 주는 것이 최선이라 판단했다.
“숨길 일도 아니고, 아는 대로 말해 주지. 샤를이 행방불명됐어. 그리고 난 샤를의 행방불명이 공작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해. 행적이 이 근처에서 끊긴 것도 그렇고, 샤를이 사라지면 가장 득을 보는 이가 공작이니까. 그래서 그를 심문하러 온 거야.”
“……제 남편은 샤를을 아껴요.”
“정말 그렇게 생각해? 그렇다면 그대는 멍청한 거야.”
“…….”
“내 외사촌은 죄인의 자식이라고는 하나 폐하와도 같은 피를 공유하는 조카야. 평민이 되었다 해도 살아만 있다면 언젠가는 사생아인 그대 남편보다 지지를 더 많이 받을 수도 있지. 게다가 샤를과 공작 사이에는 그대가 있잖나. 공작이 그대를 보는 눈을 보면, 질투 때문에 동생을 죽였다 해도 이상할 게 없던데.”
“이즈카엘은 그럴 사람이 아니에요!”
남편을 아예 범인으로 특정하는 말에 헤레이스가 참지 못하고 소리를 높였다. 이안은 그녀의 매서운 눈초리를 보다 웃음을 터뜨렸다. 남편이 의심되어 그에게 직접 묻지 못하고 제게 묻는 주제에 편을 들다니. 그가 헤레이스를 비꼬며 되물었다.
“조금 전에도 했던 질문인데…… 남편을 믿는데 왜 내게 와 샤를에 관해 묻지? 앞뒤가 맞지 않잖나.”
“…….”
“답하기 곤란하면 됐네. 뭐, 그대 나름대로 이유가 있겠지. 그보다 공작 부인, 나도 그대에게 질문을 하나 해도 되나? 전부터 궁금했던 건데.”
마음 같아서는 거절하고 싶었지만 그도 헤레이스의 물음에 답해 주지 않았던가. 거절할 명분이 없었다. 헤레이스가 떨떠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자 이안이 곧바로 물었다.
“그대, 남편과 아직도 꽤 사이가 좋아 보이던데…… 도망은 왜 갔나?”
헤레이스의 몸이 그대로 굳었다. 또 기억에 없는 일이었다. 도망? 그게 무슨 말인가. 푸른 눈이 잘게 떨리기 시작했다.
“모르는 척 마. 공작이 하도 숨겨 대부분 모르는 사실이지만 그래도 완전한 비밀은 없지. 아는 이들은 알아. 그대가 동부로 도망쳤다는 거. 왜 도망쳤나? 아…… 혹시 공작의 정부와 그 자식 때문인가? 하기야 여린 그대에게는 충격이었겠지. 그래도 공작이 그대를 위해 정부와 그 사생아는 쫒아낸 모양이야. 성 어디에도 보이질 않더군.”
이안의 말을 들을수록 괴리감만 커졌다. 정부는 또 뭐고, 정부에게 태어난 자식이라니. 그런 말이 수도에 돌았다면 아주 질 나쁜 소문이었다. 그러나 헤레이스는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쏘아붙일 수 없었다. 얼마 전 남편과의 일이 떠오른 탓이었다.
‘나 몰래 바람이라도 피웠어요? 나 말고 다른 여자 숨겨 놓고 거기서 아이라도 본 거예요? 왜 죄지은 사람처럼 굴어요.’
‘…….’
‘농담이에요, 농담. 당신이 워낙 심각한 얼굴이니까 분위기 좀 바꿔 보려고 그런 건데……. 이즈카엘, 설마 정말로…….’
‘아니야!’
농담에 과민하게 반응하던 남편. 그때 남편의 금안은 사정없이 요동치고 있었다. 눈동자에 이어 헤레이스의 손이 달달 떨리기 시작했다.
“이것도 답하기 곤란한 모양이지?”
상대가 끝내 답을 않자 이안이 짜증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됐다는 듯 고개를 젓다 문뜩 이상했는지 갸웃거렸다.
“……그러고 보니 그대의 아이도 본 적이 없군. 소리는 간간이 들렸던 것 같은데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