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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목을 꺾는 악마여-98화 (98/108)

98화.

“후작님이 죽고 어미는 후작님을 따라 죽기 전 한 가지 목적을 이루고 싶어 했어요. 후작님의 자식으로 세상에 저만 남기는 것. 어미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걸 간절히 바랐죠.”

“…….”

“당시 어미는 도련님은 당연히 죽을 거라 생각했어요. 반역죄인의 아들을 살려 둘 리 없으니까요. 하지만 아가씨는 아니었죠. 아가씨는 아름다운 데다 젊으니 목숨만은 부지해 어느 집 노예로 갈 가능성이 크다 판단했어요.”

“…….”

“어미는 그게 끔찍이 싫었대요. 노예로 간다고 한들 아가씨가 후작님의 여식이라는 것을 모를 사람은 없으니까요. 그래서 어미는 후작님의 명예를 핑계로 아가씨께 자살을 강요했어요. 간수들에게 전 재산을 주고 아가씨께 직접 독약을 전했죠.”

들으면 들을수록 가관이었다. 화를 참지 못한 크리스가 옆에 비스듬히 세워 뒀던 지팡이의 손잡이를 세게 잡았다. 힘이 잔뜩 들어가 하얗게 변한 주먹에 안나는 잠시 말을 멈췄다. 하지만 계속해 보라는 크리스의 눈빛에 그녀는 숨을 가다듬고 말을 이었다.

“다행히 어미가 아가씨께 준 독약은 쓰이지 못했어요. 아가씨는 결혼했고…… 도련님도 죽지 않았어요. 죽은 건 제 어미뿐……. 아가씨는 끝내 제 어미가 어떤 사람인지도 몰랐어요. 어미는 후작님을 따라 자결했고, 아가씨는 공작 각하께 부탁해 노예가 될 뻔한 저를 구하셨어요. 그렇게 저는 비밀을 간직한 채 아가씨 곁에 남았어요.”

“…….”

“……결국 어머니의 소원은 이뤄지지 않았지만 전 제 어미가 너무…… 너무 징그러웠어요. 이미 죽은 후작 부인을 그렇게 미워하고 후작님의 자식으로 저만 남길 생각을 한다는 그 자체를 이해할 수 없었어요.

게다가 후작 부인께서는 제 어미의 은인이었어요. 남편을 일찍 잃고 떠돌던 어미를 후작 부인께서 거둬 주시고 저를 키워 주신 아버지와 짝까지 지어 주셨으니까.”

“…….”

“제 어미의 죄에 목숨까지……. 제가 아가씨께 충성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어요. 전 아가씨를 모시며 한 번도 저와 피를 나눴다든가 언니라든가 하는 생각은 하지 않았어요. 정말이에요!”

긴 이야기가 끝났을 때 안나는 소매로 눈물을 아무렇게나 닦으며 엉엉 소리 내 울었다. 지금까지 혼자만 알고 있었던 어미의 죄. 그로 인해 얼마나 힘들었던가.

안나는 헤레이스를 볼 때마다 죄책감에 괴로웠다. 하지만 안나가 비밀을 털어놓은 대상은 그녀의 괴로움에 일말의 공감도 하지 못한 얼굴이었다. 어느새 침착함을 되찾은 크리스는 울고 있는 안나를 보다 입을 열었다.

“……꽤 그럴듯한 이유야. 그래. 이유가 어찌 됐건 앞으로도 그렇게 숨기도록 해.”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냉랭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크리스는 안나가 동생으로 보이기는커녕 고약한 여인으로 보였다. 아니라고 하지만 마주 앉아 있는 여인의 눈에는 분명한 기대감이 있었다. 핏줄로 봐 달라. 날 네 동생으로 보아 달라.

다시 생각해 보면 디본가에서도 이 여인은 종종 자신을 향해 저런 눈을 했더랬다. 연심은 아닌, 그러나 집요한 저 눈. 하지만 크리스는 당시에도, 지금도 안나에게 관심이 없었다. 이야기를 모두 들은 후에도 머릿속에 드는 생각은 하나였다.

“조금 전에도 말했지만 나한테 여동생은 헤레이스뿐이야. 그리고 난 힘들게 산 그 아이에게 더는 골치 아픈 일이 생기지 않았으면 해.”

크리스는 동생인 헤레이스가 이 사실을 몰랐으면 했다. 가여운 그의 동생은 지금도 썩 행복하지 못한 것 같은데 이런 일까지 알게 되면 더 괴로워할 터였다.

“그러니까 내 동생을 보더라도 지금처럼 네 속내를 숨겨. 내가 반이나마 같은 피를 공유한 네게 하는 마지막 부탁이야.”

지금까지 했던 것처럼 선을 지키라 말하는 이복 오라비의 말에 안나의 눈에 숨길 수 없는 실망이 떠올랐다. 크리스는 그 눈에 속으로 코웃음을 치며 눈을 감았다. 그리고 곧 다시 재회하게 될 동생을 떠올리며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그렸다.

‘헤레이스, 내 하나뿐인 동생. 곧 다시 만나겠구나.’

하나 그와 오늘 새로이 알게 된 이복동생의 앞날에…….

히이이잉.

더 이상 헤레이스는 없었다.

* * *

‘제길…….’

폴은 마차 안에서 들리는 안나의 울음소리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마부가 계속해서 몸을 움직이는 그를 불안하게 바라보며 고민 끝에 말을 걸었다.

“기사 나리, 잠시 쉬어 가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렇게 하지.”

폴이 잠시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부가 저 앞에 공터가 보인다며 그곳에서 휴식을 취하자고 전한 뒤 마차의 속도를 조금 늦췄다.

곧 마차는 공터에 다다랐다. 하지만 마차가 멈추고 폴이 마차에서 뛰어내리는 순간…… 바람을 날카롭게 가르며 화살 하나가 말의 목에 박혔다.

히이이잉.

말이 마지막으로 내지르는 단말마가 끔찍했다. 그리고 말이 고꾸라지는 것을 보고 놀란 폴이 고개를 돌렸을 때는 이미 화살 수십 대가 마차를 향해 날아오는 중이었다.

* * *

관목들이 규칙적으로 배열된 별채 정원은 제법 잘 꾸며져 있었다. 이안은 쌀쌀한 공기에도 가벼운 걸음으로 아침 산책을 하고 있었다.

‘지시하신 일을 끝마쳤습니다. 세르펜스 성을 떠나시기 전까지 말씀하신 것을 전달토록 하겠습니다.’

어느 나무 아래서 서신을 읽은 이안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적힌 대로라면 황궁으로 돌아갈 때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앞으로 사흘……. 가기 전에 선물을 전하고 가야 할 텐데.’

그가 세르펜스 성에서 머문 지 벌써 한 주가 지났다. 하지만 이즈카엘의 감시가 어찌나 철저한지, 이안은 짧지 않은 기간 동안 만나고픈 이의 얼굴을 첫날을 제외하고 본 적이 없었다.

아내에게 미쳐 있던 사내의 얼굴이 떠오르자 우습기만 했다. 여자 하나에 쩔쩔매는 인간이 과거에는 왜 그리 대단하게 보였는지. 과거의 자신이 한심했다.

‘이즈카엘을 봐라. 너보다 두 살이나 어리다. 하지만 배움이 너보다 20년을 앞서가는구나.’

이안은 예전부터 이즈카엘이 싫었다. 황제인 그의 아비는 어느 날부터 자신의 곁에 둔 이즈카엘과 그를 시시각각 비교했다.

누구랑 비교를 당한들 기분 나쁘지 않을까만은 이즈카엘은 당시 성조차 제대로 없는 사생아였다. 이안은 황태자인 자신이 천한 사생아와 같은 선에 놓이는 것 자체가 끔찍했다.

‘매 맞는 아이가 더 뛰어나서야 원…….’

그러나 그를 더 괴롭게 하는 것은 열등감이었다. 아비의 말대로 이즈카엘은 모든 면에서 그를 앞섰다. 스승들은 아비나 어미 앞에서 저만을 칭찬했지만 그들이 진정으로 감탄하는 대상은 따로 있었다.

‘소문에는 그 아이가 세르펜스 공작의 사생아라고…….’

‘그 아이가 누구든 뛰어난 건 사실이지요. 솔직히 황태자 전하보다야 그 아이가 훨씬 배움이 빠르지 않습니까.’

그들은 이안의 매를 대신 맞기 위해 수업에 들어온 이즈카엘을 두고 뒤에서 웅성거렸다. 그들 입장에서야 티가 나지 않는다고 생각했겠지만 이안은 스승들의 수군거림을 처음부터 눈치채고 있었다. 소년에서 청년이 되고 있던 시기. 그 예민한 시기에 스승들의 말은 그의 자존심을 갈기갈기 찢었다.

‘검술을 가르치는 에단 경께서 벌써 그 아이를 황실 기사로 점찍어 놓으셨다더군요. 다른 것도 훌륭하지만 검을 다루는 능력에서는 따를 자가 없다 하더이다.’

수업을 들을 때마다 열등감에 미쳐 버릴 것 같았던 이안은 이즈카엘이 황실 기사로 임명된 날 기쁘기까지 했다. 저 더러운 사생아 자식과 더는 비교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그에게 해방감을 줬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아비의 곁에 호위로 선 이즈카엘은 다른 모습으로 그의 열등감을 자극했다. 아비는 이즈카엘이 보는 앞에서 매번 그를 질책했다.

분을 이기지 못해 씩씩거리는 아비보다 그 뒤에 서서 무표정한 얼굴로 앞만 바라보는 이즈카엘이 더 싫었다. 차라리 자신을 안타깝다거나 경멸스러운 눈으로 봤다면 그 더러운 기분이 덜 했을 텐데……. 이즈카엘은 사생아 주제에 황태자인 이안보다 더 고고한 모습을 한 채 그쪽으로는 얼굴 한번 돌리지 않았다.

황제의 잘못된 훈육법에 이안은 나날이 삐뚤어졌다. 날 때부터 예민했던 성미는 바늘처럼 뾰족해져 그를 시중드는 이들은 다치는 일이 잦아졌다. 그러나 그때까지만 해도 그는 지금처럼 완전히 비틀리지는 않았다. 더는 견디기 힘들었을 때 사랑이 찾아왔으니까.

‘아…… 디본 영애를 보셨군요. 정말 아름답지요?’

사랑은 날이 선 그를 누그러뜨렸다. 하지만 황태자라는 신분에도 불구하고 처음 찾아온 사랑은 쉽지 않았다. 이안의 마음을 한 번에 가져간 여인은 이미 약혼자가 있었다.

‘하하. 전하, 포기하십시오. 디본의 요정은 전하의 외사촌과 일찍이 약혼한 사이입니다.’

‘샤를과?’

‘예. 공작 부인은 두 사람을 오래전부터 짝지어 주었다 하더군요. 타계한 디본 후작 부인과 공작 부인이 많이 친밀하셨거든요.’

그의 첫사랑은 난감하게도 그의 외사촌을 약혼자로 두고 있었다. 샤를 세르펜스……. 누구에게나 친절한 성격에 까다로운 이안과도 곧잘 지내는, 봄바람 같은 사내.

이안은 외사촌을 위해 마음을 티 내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는 처음 찾아온 사랑을 포기하지도 않았다. 약혼이 깨지는 일은 심심찮게 있었으니까. 그는 혹여나 생길지도 모르는 기회를 목을 빼고 기다렸다.

‘아비와 똑같아서는!’

‘어, 어머니?’

그 기다림마저 앗아 간 이는 그의 어미, 황후 이젤라였다. 자신의 아들이 헤레이스에게 관심을 두고 있음을 눈치챈 황후는 이안을 방에 불러 놓고 날뛰기 시작했다.

‘그 얼굴을 보면 모르겠어? 아비가 곁에 끼고 다니는 계집들의 얼굴이 어디서 비롯됐는지?’

‘그게 무슨…….’

‘다른 것도 아니고 왜 하필 그것의 딸이야! 왜! 너마저 왜!’

아비의 첫사랑이 제 첫사랑의 어미였음을 알게 된 이안은 어미의 패악을 잠자코 들어 줬다. 아비의 첫사랑으로 어미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죄송해요, 어머니. 하지만…….’

하지만 그는 속으로 어미에게 사죄하면서도 헤레이스에 대한 마음을 저버리지는 않았다. 한참 동안 물건을 던지고 고함을 지르던 황후는 제 배로 낳은 아들의 마음을 꿰뚫어 보고 잔인한 진실을 알려 줬다.

‘한데 아들아, 그거 아니? 네가 짝사랑하는 디본의 요정 말이다.’

‘…….’

‘……네 아비의 수많은 사생아 중 하나일지도 모른단다.’

짝사랑하던 여자가 이복동생일지 모른다는 사실은 그러잖아도 세상을 비틀어 보는 이안의 시야를 더욱 어그러뜨렸다.

그날 이후 이안은 측근마저 좀처럼 이해 못 할 상전이 됐다. 황제도, 황후도 괴팍해진 이안을 제압할 수 없었다. 그는 부모의 말도 곧잘 어기며 기행을 이어 나갔다.

거기까지였다면. 이안은 그렇게 살고 헤레이스는 정해진 대로 샤를과 결혼했다면, 아나이스는 미래에 괴팍한 황제를 가지게 된 것 외 큰 문제는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비틀릴 대로 비틀린 황태자의 심기를 거스르는 일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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