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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목을 꺾는 악마여-97화 (97/108)

97화.

“브륀튈트는…… 그 말은…… 몇 년 전에 죽었습니다.”

머뭇거리던 마구간지기가 사실을 고했다. 브륀튈트가 죽었다는 말에 헤레이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뭐? 그런데 왜 아무도 내게 말해 주지 않았지?”

“찾지 않으셔서…….”

“아…….”

헤레이스는 그제야 제가 브륀튈트를 몇 년째 찾지 않았음을 상기했다. 왜 한 번도 찾지 않았을까. 보고 있기 힘든 추억을 담은 말이라고는 하지만 그렇게 아꼈는데.

자신의 무감함에 치가 떨렸다. 헤레이스가 눈물을 꾹 참은 채 마구간지기에게 물었다.

“괴롭게 가지는 않았지?”

“물, 물론입니다.”

마구간지기의 눈이 다시 헤레이스의 뒤로 향했다. 헤레이스가 그의 시선을 따라 헬렌을 돌아봤다. 하지만 헬렌은 평소보다 조금 창백해 보이는 것 외 이상한 점은 없었다.

“부인, 그럼 전 이만 할 일이 많아서…….”

마구간지기가 도망치듯 사라졌다. 헤레이스는 그가 시야에서 사라진 후에야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았다. 헬렌이 그녀에게 다가와 방으로 돌아가자고 말했다. 헤레이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돌렸다.

“엄마, 여기서 뭐 해?”

“도련님?”

두 사람이 뒤돌기 무섭게 아이가 튀어나왔다. 이 아이가 언제 여기까지 왔는가. 헬렌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살폈다. 아이 혼자 오기에 마구간은 지나치게 멀었다.

헬렌과 달리 헤레이스는 아이가 혼자 마구간에 온 사실에 주목하지 않았다. 대신 그녀의 시선은 아이의 목에 닿아 있었다. 세르펜스 공작가의 늑대 문양에 다이아몬드로 치장된, 척 봐도 값을 매기기 힘든 목걸이. 그것의 가치를 아는 헤레이스가 깜짝 놀라 아들을 붙잡았다.

“이거 어디서 났어?”

“이거?”

아이가 순진무구한 얼굴로 목걸이를 들어 보이자 헤레이스가 엄한 얼굴을 하려다 한숨을 쉬고 표정을 풀었다. 아이의 키에 맞춰 몸을 숙인 그녀가 목걸이를 만지작거리며 아들을 타이르기 시작했다.

“엄마 물건에 함부로 손대는 거 아냐. 이건 잃어버리기라도 하면 큰일인데…….”

헤레이스는 아들이 그녀의 보석함에 멋대로 손을 댔다고 애써 생각했다. 하지만 목걸이를 보관하는 장소는 아이가 쉽사리 다가갈 수 없는 곳이라는 것이 계속 머릿속에 맴돌았다. 목걸이는 가치가 높은 만큼 은밀한 곳에, 자물쇠까지 채워진 채 보관된 물건이었다.

“엄마가 줬잖아.”

불편한 헤레이스의 마음을 눈치챈 것일까.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아이가 불쑥 입을 열었다. 아이의 말에 헤레이스가 목걸이를 쥐고 있던 손에 힘을 줬다.

“응? 방금 뭐라고…….”

“엄마가 줬어. 기억 안 나?”

기억에 없는 이야기를 하는 아이. 아이의 얼굴에 거짓은 없었다.

하지만 헤레이스의 표정은 굳어 갔고, 얼굴엔 그림자가 졌다. 아니라고 건망증이 생긴 거라 스스로를 속여 왔지만 이제는 힘들었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자신의 기억은 어딘가 이상함이 확실했다.

“엄마, 왜 그래? 어디 아파?”

헤레이스가 아무 말 없이 몸을 일으키자 아이가 발랄한 목소리로 물었다. 헤레이스의 뒤에 있던 헬렌이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헤레이스와 달리 저 목걸이가 아이에게 언제 어떻게 전해졌는지 똑똑히 기억하는 그녀로서는 아이의 행동에 확신할 수 있었다.

“엄마, 혹시 머리가 아프지는 않아?”

아이가 헬렌을 곁눈질하며 웃었다. 날카로운 이빨이 헬렌의 눈에 들어왔다. 그녀가 파리한 얼굴을 한 채 속으로 말했다.

‘저건…… 사람이 아니야.’

* * *

길을 달리는 마차는 그리 크지도, 화려하지도 않았다. 누군가 보면 마차가 지나가는구나 하고 금세 잊고 말, 정말 눈에 띄지 않는 평범한 마차였다.

하지만 마부 옆에 앉은 사내는 평범한 마차와 거리가 멀었다. 건장한 체격에 잘생긴 얼굴. 평범한 옷을 걸쳤다지만 사내에게는 지속해서 훈련을 받은 기사 특유의 분위기가 있었다.

“기사님께서도 그냥 들어가시지.”

“아니다. 난 여기가 편해.”

사내, 폴은 마부의 말에 고개를 저으며 앞을 봤다. 이제 완연한 가을 풍경이 외딴 길 위로 아름답게 펼쳐졌다. 그러나 떨어지는 낙엽을 보는 시선과 달리 폴의 신경은 모두 등 뒤 마차로 가 있었다.

마차 안에는 주인의 명으로 데려온 사람 둘이 타고 있었다. 공작 부인의 오라비와 안나. 안나를 떠올린 폴이 저도 모르게 미간을 좁혔다.

‘그, 그게 안나가…… 안나가 필요하다고 해서.’

그는 몇 년 전 안나 때문에 주인의 검에 목숨을 잃을 뻔했다. 제게 사근사근하게 말하는 안나에게 제 손으로 건네준 보초 시간표. 그것이 화근이었다.

안나는 제게서 받아 간 시간표를 이용해 공작 부인과 성에서 도망을 쳤다. 당시 에드가의 비호가 아니었다면 그는 지금쯤 살아 있지도 못했으리라.

폴은 그때 안나에 대한 마음을 접었다. 안나를 짝사랑한 세월이 길었다고는 하나 목숨만큼 소중한 것은 아니라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안나가 주인의 명으로 매질당한 채 쫓겨날 때도 눈을 감고 외면했다.

‘폴?’

‘공작 각하께서 그대를 데려오라 말씀하셨네.’

‘정말 폴이야?’

하지만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폴은 계속해서 안나와 마주쳤다. 그리고 그녀와 엮이면 엮일수록 폴은 예전의 감정이 완전히 사그라지지 않았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지금도 보라지. 공작 부인의 오라비와 안나가 단둘이 저 좁은 마차에 있다는 것 하나로 속이 타지 않는가. 공작 부인의 오라비는 아름답기로 유명한 부인의 핏줄다웠다. 다리를 저는 것조차 눈에 들어오지 않았으니까.

크리스의 외관을 떠올리던 폴이 돌아가는 고개를 애써 바로 했다.

‘……신경 쓰지 말자. 나는 명을 수행하고 있을 뿐이야.’

폴이 지나치게 신경을 쓰는 것과 달리 마차 안 남녀 사이에는 어색한 분위기만 흐를 뿐이었다. 크리스는 안나에게 무감한 눈을, 안나는 어쩔 줄 몰라 하며 크리스와 눈조차 마주하지 못했다.

“……놀라지 않으셨어요?”

“…….”

“아니면 혹시 알고 계셨나요?”

“몰랐어.”

깊게 고개 숙인 안나의 물음에 크리스가 머리를 가로저었다. 안나는 제 말을 듣고도 태연한 크리스의 얼굴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혹 믿지 않는 걸까? 그럴 수 있었다. 그녀가 한 말은…….

‘전 도련님과 아가씨의 동생이에요. 정확히는 어미가 다른 이복동생이요.’

상대에게 허무맹랑한 것으로 들릴 수 있으니까. 안나는 크리스가 제 말을 믿지 않았다고 여기며 고개를 들었다.

“믿기 어려우시겠지만…….”

“믿어.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 생각해. 다만 어머니가 살아 계실 때 아버지가 네 어미를 취했다는 사실은 조금 놀랍군.”

“…….”

“네 어미가 내 아비를 좋아한다는 티를 많이 냈지.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로는 너무 노골적이어서 보기 힘들 정도였으니까. 너도 알 텐데. 네 어미가 한때나마 후작 부인 행세를 하며 저택을 활보했던 거 말이야.”

사실이었다. 어미는 후작 부인의 사후, 크리스와 헤레이스의 유모로 후작 부인의 빈자리를 채운다는 핑계를 대며 디본가 내에서 안주인 행세를 했다.

율리스를 따라 세르펜스 성으로 떠난 헤레이스는 어미의 그런 무도한 행동을 보지 못했지만 눈앞의 크리스…… 이복 오라비는 그 꼴을 보며 자랐다. 어미의 부끄러운 행동이 떠오르자 안나의 고개가 다시 아래로 내려갔다.

크리스는 그런 안나를 보다 한숨을 내쉬었다. 밖에 있는 폴이라는 기사의 말에 따르자면 자신과 이 여자는 얼마 뒤 헤레이스를 만날 터였다. 그런데 이제 와 자신에게 이런 불편한 이야기를 왜 하는 걸까. 헤레이스와 같은 색의 눈이 안나를 가늠하듯 보며 차갑게 빛났다.

“……내가 궁금한 건 하나야.”

“…….”

“이런 이야기를 이제 와서 왜 나한테 하는 거지?”

안나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그를 힐끔 쳐다봤다. 크리스는 잠깐 마주친 안나의 눈에 그녀의 의중을 대강 파악했다. 그가 속으로 욕지거리를 하며 서늘한 얼굴을 했다.

“미안하지만 난 네가 아버지 자식이라 해도 동생으로 여기고픈 마음은 없어. 내게 동생은 헤레이스, 그 가여운 아이 하나뿐이야.”

안나는 속내를 들킨 듯 몸을 움찔거렸다. 그러나 그녀는 곧 매서운 눈초리로 크리스를 똑바로 바라봤다. 그녀가 억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죽을 고비를 넘기고 나니까 누군가한테 한 번은 말하고 싶었을 뿐이에요. 이대로 죽으면 아무도 내 아버지가 누군지 모르니까요.”

“아버지는 죽었고 디본의 사생아라 해도 네게 떨어질 건 없어. 오히려 목숨을 잃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알 텐데. 디본과 연관된 이들이 어찌 되었는지.”

말을 섞을수록 궁지에 몰리는 기분이었다. 안나는 고개를 세차게 저으며 목소리를 높였다. 자신은 디본 후작의 딸로 인정받고 싶은 게 아니었다.

“상관없어요. 전 그냥…… 그냥 말하고 싶었을 뿐이에요.”

크리스가 거칠게 숨을 내쉬는 안나를 팔짱을 낀 채 잠시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안나는 그의 냉담한 눈길에 긴장한 듯 침을 꿀꺽 삼켰다.

“네가 헤레이스에게 전부터 충성을 다한 것은 알아. 설마 헤레이스를 네 언니라 여겨 그런 건가?”

안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아니라고 했는데! 이복 오라비는 이제 자신의 충성심조차 불결한 의도로 해석하고 있었다. 안나가 구구절절한 자기 변론을 시작했다.

“아니요. 아가씨를 감히 언니라 생각해 본 적은 없었어요. 다만 전 제게 친절한 아가씨가 좋았고, 또…… 제 어미가 저지른 죄가 있으니까요. 전 어미의 죄에 대해 속죄하고 싶었어요.”

“죄?”

죄라는 말에 크리스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안나는 아차 싶었지만 이미 말을 꺼낸 뒤였다. 그녀가 길지 않은 고민을 끝낸 뒤 손을 말아 쥐며 간신히 말을 뱉었다.

“어머니는 언니……, 아니 아가씨를 죽이려 했어요.”

“……뭐?”

같은 마차에 탄 이래 크리스가 처음으로 선명히 감정을 드러냈다. 벌떡 일어선 그는 고문의 후유증으로 절게 된 다리 때문에 비틀거리다 다시 앉았다.

안나는 처음 보는 이복 오라비의 격앙된 반응에 이유 모를 희열을 느끼며 손바닥에 찬 땀을 드레스에 닦았다. 그리고 차분해진 어조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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