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이안의 눈이 반짝 빛났다. 그가 품 안에서 서신 하나를 꺼냈다. 서신의 밖에는 르페즈 공작의 인장이 선명히 찍혀 있었다.
“자네에게 협박당해 어쩔 수 없이 서신을 썼다 하더군. 나더러 그대를 고발할 수 있게 도와 달라 했어. 명색이 공작의 부탁인데 거절하기가 참…….”
이즈카엘이 검버섯이 핀 르페즈 공작의 얼굴을 떠올리며 이를 갈았다. 그의 앞에서는 괜찮다며 웃는 낯짝을 해 놓고 뒤로는 황실에, 그것도 그와 사이가 좋지 않은 황태자에게 고발을 청하다니. 생긴 것만큼이나 쥐새끼 같은 놈이었다.
이안이 이즈카엘의 심기를 눈치채고 음흉한 웃음을 보였다. 그가 난감하다는 표정으로 르페즈 공작의 서신을 보란 듯이 내밀었다.
“동부가 지난 반역으로 자네에게 바짝 얼어 있는 걸 알 거야. 그런데 그 와중에 일을 치면 어떡하나. 황실 입장에서도 난처하단 말이네. 황실은 제국의 공작들이 서로 친밀히 지내며 다 함께 충성하기를 바라.”
새빨간 거짓이었다. 황실은 주기적으로 공작들의 사이를 이간질할 정도로 대귀족 간의 교류에 신경을 썼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아나이스의 역사상 대귀족을 필두로 한 귀족 세력과 황실 사이에는 몇 번이고 큰 충돌이 있었으니.
물론 지금은 각 지역의 공작들 사이의 유대가 깊지 않아 귀족 세력이 흩어진 상황이었다. 하지만 페가토 후작의 반역 이후, 그와 같은 일을 방지한다는 이유로 황제가 귀족들의 사병을 대거 억압하면서 유대의 움직임은 서서히 나타나고 있었다. 아직은 무게의 추가 황실 쪽에 있다지만 아주 미세한 기울기인지라, 황실은 대귀족들의 유대를 끊어 놓는 데 많은 공을 들였다.
“열흘만 머물게 해 주면 그대와 르페즈 공작 사이를 내가 중재하지. 어떤가?”
이안이 말 없는 이즈카엘에게 넌지시 제안했다. 여유로운 얼굴로 실실 쪼개는 행태가 언뜻 약 올리는 것 같기도 했다.
“각하, 여기서 무마하시는 게 좋습니다. 르페즈 공작이 황태자 전하를 등에 업고 고발이라도 한다면 일이 얼마나 커질지 모릅니다. 재판에서 지기라도 하면 영지 일부를 내줘야 할 수도 있습니다.”
심각한 얼굴로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제임스가 이즈카엘에게 귓속말했다. 그는 주인이 혹여나 황태자의 제안을 거절할까 걱정이었다.
“……열흘만 머무르십시오. 하지만 내 드리는 숙소에서 벗어나지는 마십시오.”
결국 이즈카엘이 이안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가 제임스에게 별채를 정돈하고 손님방을 열 것을 일렀다.
“허락해 줘서 고맙네, 공작. 하지만 하나 더 부탁해야겠어.”
하지만 이안의 요구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가 이번에는 황제의 인장이 찍힌 서류 하나를 내밀었다. 제임스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다. 그 서류에는 샤를에 관해 이즈카엘을 심문해도 좋다는 내용이 쓰여 있었다.
‘그분의 행방에 대해 각하를 심문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야. 한데 이게 만일 함정이라면…….’
이즈카엘과 샤를 사이의 일을 까맣게 모르는 제임스는 주인의 무고함을 무엇으로 증명할까 고심했다. 그러나 그가 무고하다 확신하는 이즈카엘의 눈은 바로 앞에 있는 이안조차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미세하게 흔들렸다가 제자리를 찾았다.
“난 정말 자네를 심문하고 싶지 않아. 하지만 알다시피 폐하의 명이라…… 샤를의 행방불명에 대해 자네를 심문해야 해.”
“……마음대로 하십시오.”
이안의 입에서 샤를의 이름이 나오자 이즈카엘의 얼굴은 무서울 정도로 무표정해졌다. 그는 르페즈 공작 때와 달리 조금도 불편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표정이 너무도 완벽해서일까. 그래서 더 의심스러웠다.
이안은 샤를의 마지막 행선지를 떠올리며 뒤로 손짓했다.
“허락해 줘서 고맙네. 그럼 바로 시작하지. 밀로 백작, 시작하게.”
이안의 명에 밀로 백작이 앞으로 나와 자리에 앉았다. 안경을 고쳐 쓴 그가 이즈카엘에게 딱딱한 목소리로 실례하겠다고 말한 뒤 첫 질문을 했다.
“세르펜스 공작 각하께 여쭤보겠습니다. 평민…… 샤를의 현재 행방을 아십니까.”
이즈카엘이 평민이라는 단어에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샤를은 율리스와 함께 치죄당할 때 귀족 신분을 박탈당했으니 틀린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동생을 향한 죄책감 때문일까. 듣기가 거북했다.
“모른다.”
이즈카엘이 동생을 향한 죄책감을 가면 뒤로 숨긴 채 감정이 완벽히 차단된 목소리로 답했다. 밀로 백작이 그런 이즈카엘의 얼굴을 위아래로 훑어보다 질문을 이어 나갔다.
“그럼 그를 언제 마지막으로 보셨습니까.”
“그 일이 해결된 직후 수도에서 마지막으로 봤다. 그 이후로는 본 적 없어.”
“이상하군. 내 외사촌의 행방은 북부에서 끊겼거든. 그것도 이 성 근처에서 말이야. 공작, 정말 동생을 본 적 없나?”
이즈카엘이 심문당하는 것을 가만 보고 있던 이안이 급작스럽게 끼어들었다. 이즈카엘을 뚫어져라 보는 시선이 끈질겼다. 하나 신문을 당하는 이에게서는 조금의 동요도 찾을 수 없었다. 집요함과 무감함. 두 사람의 상반된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혔다.
“없습니다.”
고저 없는 목소리에 이안이 먼저 눈길을 거두었다. 그가 자리에서 기지개를 켜며 말했다.
“좋아. 오늘은 여기까지 하지.”
“예? 전하, 하지만 아직 질문할 것이…….”
주인의 난데없는 결정에 밀로 백작은 당황하여 주춤거리며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뿐 아니라 이안을 따라온 다른 이들도 당혹감을 숨기지 못했다.
“백작, 난 지금 당장 이게 필요하다고.”
수하들을 당혹케 만든 당사자가 태연한 얼굴로 주머니를 뒤졌다. 곧 이안의 손가락에 시가 한 가치가 들렸다.
“전하…….”
“우리에게는 열흘이라는 시간이 생겼지 않나. 충분히 쉬면서 하자고, 응?”
이안은 밀로 백작의 어깨를 툭툭 두드린 후 이즈카엘을 쳐다봤다. 그가 손가락 사이에 끼운 시가를 흔들며 물었다.
“여기서 피워도 괜찮겠나? 재떨이는 준비돼 있으니 응접실을 어지르지는 않을 거야.”
“마음대로 하십시오.”
“고맙네. 내가 이것에 제법 중독이 돼 있어 말이야.”
이안이 팔을 뻗자 익숙한 듯 황실 기사 중 하나가 부싯돌을 쳤다. 곧 매캐한 연기가 피어올랐다. 이안은 참기 힘들었다는 듯 깊게 연기를 들이켜며 이즈카엘 쪽을 바라봤다. 그의 눈은 조금 전과 달리 살짝 풀려 있었다.
“……같이하겠나?”
“정중히 거절하겠습니다.”
“귀하게 얻은 것인데 싫다니 뭐……. 오늘은 이만 인사하지. 환대해 줘서 고맙네, 공작.”
담백한 거절에 이안이 어깨를 살짝 으쓱이며 시가를 앞으로 내밀었다. 그러자 부싯돌을 쳤던 기사가 손바닥을 펼쳐 재를 받아 냈다. 익숙한 듯 자연스러운 동작에서는 일말의 수치심도 보이지 않았다.
이즈카엘이 이안의 손에서 타들어 가는 시가와 기사의 손에 쌓이는 재를 보다 심드렁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황태자가 데려온 기사에게 무슨 짓을 하든 그가 상관할 일이 아니었다. 그가 당장 신경 써야 할 상대는 상태가 좋지 않았던 그의 아내뿐.
“먼저 일어나 보겠습니다.”
“열흘이라 했지만 심문에 너무 신경 쓰지 말게. 자네도 알다시피 폐하께서는 샤를에게 죄책감이 크셔. 여동생을 벌하느라 그 아이가 가질 모든 것을…… 특히 여자까지 앗아 공작 자네에게 줬다는 사실이 영 신경 쓰이시는 거겠지.”
이안이 자리에서 벗어나는 이즈카엘의 등 뒤로 연기를 뿜으며 말했다. 넋두리처럼 하는 그 말에는 안타까움이 꾸며져 있었다. 그러나 이즈카엘은 알면서도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어미가 죽었는데 유일한 자식이 임관을 지키지 못하다니. 이 얼마나 마음 아픈 일인가. 빨리 찾아야 할 텐데. 하아…….”
이안의 긴 한숨과 함께 그 찰나에 이즈카엘의 가면이 깨졌다.
“……쉬십시오.”
그가 주먹을 쥐었다가 곧 다시 걸음을 옮겼다.
아내가 보고 싶었다. 모든 것을 견디게 해 줄…… 이 죄책감마저 지워 줄 아내의 존재가 지금 당장 너무도 필요했다.
* * *
잠을 설친 상전의 눈가가 거뭇했다. 헬렌은 상태가 썩 좋아 보이지 않는 상전의 뒤를 졸졸 따르며 성으로 들어가자고 여러 번 말했다. 하지만 헤레이스는 고개를 저으며 내키는 대로 걸을 뿐이었다.
“부인, 몸도 안 좋으신데 쉬지 않으시고요.”
“……괜찮아. 저리 가 보자.”
헤레이스의 머릿속에는 지난 밤 남편의 모습이 끊임없이 재생되고 있었다.
‘미안해, 헤레이스. 미안해.’
느지막이 침실로 돌아온 그는 헤레이스가 자고 있다고 착각한 모양인지 별말 없이 침대로 들어와 그녀를 꼭 안았다. 그리고 계속해서 미안하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도대체 뭐가 그리 미안한 걸까. 헤레이스는 남편에게 물으려다가 그의 입에서 나오는 다른 이름에 입을 닫았다.
‘샤를…… 미안해.’
남편은 그녀뿐만 아니라 샤를에게도 사죄하고 있었다. 헤레이스는 순간 황태자가 방문한 목적을 기억해 내고 몸을 굳혔다. 하지만 어젯밤 그녀는 끝내 잠든 척을 하며 밤을 지새웠다.
“부인, 조심하세요.”
“아…….”
“너무 멀리 오셨어요. 이만 돌아가요.”
이해 못 할 남편의 행동을 떠올리며 정처 없이 걷던 헤레이스가 발걸음을 멈췄다. 그녀의 발길이 닿은 곳은 마구간이었다. 본성에서 제법 떨어진 곳에 있는 마구간은 기사가 많은 세르펜스 공작가답게 제법 컸다.
‘……오랜만에 브륀튈트나 보고 갈까.’
헤레이스가 예전에 자주 타던 암말을 떠올렸다. 반역 이후 부러 멀리한 승마였지만 오늘은 피하고 싶지 않았다.
바람을 맞으면 이 답답함이 조금이나마 풀리겠지. 헤레이스가 마구간 가까이 다가가자 뒤에 있던 헬렌의 얼굴이 새파랗게 변했다. 그녀가 헤레이스의 옆으로 바짝 다가가 태연함을 가장한 목소리로 물었다.
“부인? 말을 타시게요?”
“응.”
“몸도 좋지 않으신데…… 그냥 돌아가요. 네?”
걱정이 지나친 느낌인 건 착각일까. 헤레이스는 헬렌이 좀 과민하게 반응하는 것 같다고 생각하며 걸음을 더 빨리했다. 마구간지기가 그녀를 발견하고 화들짝 놀라 허리를 숙였다.
“부, 부인, 여기까지 어떻게…….”
“브륀튈트를 꺼내 줄래? 연한 회색 털을 가진 나이 많은 암말이야. 아주 영리한 아이라 쉽게 찾을 텐데.”
마구간지기가 헤레이스의 뒤에 있는 헬렌을 힐끔 보더니 입을 닫았다. 그의 행동에서 기이함을 느낀 헤레이스가 입 안쪽 살을 물다가 딱딱하게 명령했다.
“브륀튈트를 데려오렴, 당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