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샤를이…… 행방불명? 예상치 못한 내용에 헤레이스가 눈을 크게 떴다. 하나 충격이 채 지나가기도 전, 머릿속에 여러 말들이 산발적으로 떠올랐다.
‘……다른 사내와 밤을 보내지 않았을까, 그 새끼와 눈을 마주하고 입을 맞추지는 않았을까 하고 말이야.’
‘……의 아비가 누구지?’
‘헤레이스, 내 어여쁜 아내. 당신은 내가 아직도 아무것도 모르는 머저리라 생각하는 모양인데 나 알고 있어. 당신 아들의 아비가 누구인지.’
냉랭하고, 또 경멸이 가득한 목소리. 간통을 의심하는 모욕적인 언사. 단 한 번도 들은 적 없는 말이었건만 어찌 이리 선명한지. 게다가 목소리의 주인은 분명…….
헤레이스가 고개를 천천히 들었다. 그리고 그녀가 남편을 올려다보는 순간, 이안이 추궁하듯 이즈카엘에게 물었다.
“공작은 그가 어디 있는지 알고 있나?”
* * *
이즈카엘은 헤레이스를 옮기며 방을 떠나지 말라 몇 번이고 당부했다. 헤레이스는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지도, 답을 하지도 않았다.
그녀는 남편이 이상하리만치 두렵게 느껴졌다. 자신에게 더없이 다정한 사람인데 왜……. 입술이 파르르 떨리고 온몸에 피가 식는 기분이었다.
‘……머리가 아파.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아.’
스스로 주체할 수 없는 감정도 문제였지만 더 큰 문제는 따로 있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분명 어떤 목소리를 들었었다. 하지만 남편에게 안겨 움직인 순간, 그녀의 머릿속은 하얗게 변해 버렸다. 덕분에 헤레이스는 샤를의 행방불명에 대해서도 제대로 생각할 수 없었다.
‘기억해 내야 해. 이건 이상해. 분명히 뭔가가 떠올랐는데…….’
그녀가 무엇을 잊었는지 뇌리에 있는 것을 한창 긁어낼 때였다. 어느새 방에 도착한 이즈카엘이 침대에 그녀를 눕혔다. 이유 모를 두려움에 차마 남편의 얼굴을 볼 수 없었던 헤레이스는 눈동자를 굴리다 침대에 등이 닿자마자 눈을 감았다. 그리고 부러 힘없는 목소리를 꾸며 냈다.
“……자고 싶어요.”
그가 눈 감은 자신을 내려다보는 것이 느껴졌다. 헤레이스는 지금이라도 눈을 떠 자신이 이상한 것 같다고 남편에게 소리칠까 하다가 입술을 꾹 물고 견뎠다.
“내 명이…… 못 나가게…….”
이즈카엘이 그런 그녀를 두고 헬렌에게 무어라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곧이어 헬렌이 답했고, 이즈카엘은 한숨을 쉬며 조금 뒤 다시 오겠다는 말과 함께 헤레이스의 이마에 다정히 입맞춤했다. 하지만 항상 좋았던 남편의 입맞춤마저 헤레이스는 순간 징그러워 저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곧 이즈카엘의 발걸음 소리가 나더니 문이 닫혔다. 헬렌이 그녀의 곁에 다가온 듯했다. 누구와도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진 헤레이스는 눈을 감고 잠든 척 연기를 했다.
“아…… 나 할 일이 있었지.”
고개를 몇 번 갸웃거리던 헬렌이 갑자기 할 일이 있다며 문 쪽으로 향했다. 무표정한 얼굴과 어딘지 어색한 걸음이 꼭 누군가에게 조종당하는 인형 같았다. 하지만 눈을 감고 있는 헤레이스는 그런 헬렌의 모습을 보지 못했다.
‘갔나?’
사방이 조용해지자 혼란은 더욱 심화됐다. 헤레이스는 답답함에 시트 안으로 더 파고들었다. 생각해 내려 하면 할수록 머리가 아팠다. 결국 그녀가 쪼개질 듯 아픈 머리를 쥐어뜯다가 제 기억을 상기하는 것을 포기했다.
‘샤를…….’
그러자 당연한 순서로 샤를이 떠올랐다. 샤를이 행방불명됐다는 말은 뭘까. 그는 분명 여행을 간다고 했었는데…….
‘그런 얼굴 마. 여행은 내 꿈 중 하나였잖아. 난 북부나 수도 말고는 어디 가 본 적도 없고……. 어디를 가든 돌아올 때 기념품을 잔뜩 사다 줄게. 어때? 기대되지?’
외국으로 떠난 그가 그 누구에게도 목적지를 말하지 않은 것일까? 헤레이스는 소꿉친구의 안위를 걱정하며 손톱을 뜯다가 문뜩 황태자의 말투를 기억해 냈다. 이즈카엘에게 샤를의 행방을 묻는 목소리에는 의심이 깔려 있었다.
‘왜 이즈카엘을…….’
헤레이스는 황태자가 왜 이즈카엘을 의심하는 건지 의문을 가지다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황태자 이안은 이즈카엘이 황제의 호위 기사로 있을 때부터 그를 싫어해 자주 시비를 걸던 이였다. 헤레이스와 이즈카엘에 대한 추문도 그가 내지 않았던가.
‘……샤를은 그냥 여행을 간 것뿐이야. 황태자는 별일 아닌 거로 이즈카엘을 괴롭히는 거고.’
헤레이스가 애써 샤를의 행방불명에 대해 최대한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곧이어 율리스의 소식이 머릿속을 잠식했다. 제게 항상 다정했던 샤를의 어미……. 헤레이스는 그녀의 죽음에 잠시 숨을 멈췄다가 베개에 얼굴을 파묻었다. 율리스에게는 항상 죄스러운 마음밖에 들지 않았다.
‘난 당신을 용서할 수 없어요.’
처음 세르펜스 성에 왔을 때 헤레이스가 이즈카엘을 용서할 수 없었던 이유도 율리스가 큰 지분을 차지했다. 율리스는 어떤 무도한 죄를 지었건 헤레이스에게는 은인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렇기에 헤레이스는 이즈카엘에게 마음을 연 뒤에도 남몰래 율리스를 떠올리며 괴로워했다. 이즈카엘과 함께하는 것 자체가 율리스에게는 죄를 짓는 것이었으니.
“죄송해요. 정말…… 흐윽. 죄송해요.”
헤레이스는 행복에 겨워 율리스에 대한 죄책감을 부러 외면했던 자신을 욕했다. 황제가 여동생인 율리스를 죽이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했던 순간이 떠오르자 스스로가 경멸스러운 마음마저 느껴졌다.
“……엄마, 왜 울어? 어디 아파?”
헤레이스가 율리스에 대한 죄스러움에 한참 눈물을 쏟을 때였다. 침대 옆에서 갑작스레 아이 목소리가 들렸다. 헤레이스는 문 열리는 소리가 났던가 곰곰이 생각하며 얼굴을 들었다. 그녀의 사랑스러운 아이가 남편과 같은 색의 눈동자를 빛내며…….
‘아?’
헤레이스가 눈을 깜빡였다. 그러자 호박색 눈이 사라지고 그녀와 같은 푸른 눈이 들어왔다. 헤레이스는 반복되는 기시감에 울음을 멈추고 표정을 딱딱하게 굳혔다.
“엄마, 괜찮은 거야?”
느릿하게 울리는 목소리를 듣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조금 후에 또 잊을지도 모르나 당장은 알 수 있었다. 눈앞에 있는 아이는 자신의 아이가 아니었다.
헤레이스가 눈조차 깜빡이지 못한 채 아이를 바라봤다. 그러자 아이의 눈이 순간 한 쌍에서 두 쌍으로 변하며 그것이 나타났다.
“너어…… 흡!”
무언가 생각난 듯 헤레이스가 손가락으로 그것을 가리키며 소리치려 했다. 하지만 목이 꽉 막혀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엄마는 눈치가 빨라 귀찮아. 누구는 속살거리는 것만으로도 단박에 넘어오던데. 엄마는 항상 손이 많이 간다니까.”
그것이 헤레이스에게 다가가 그녀의 눈을 가렸다. 아이의 손은 어느새 어른의 손만큼 커졌다. 그리고 그것의 모습도 점점 커져, 어느새 이즈카엘의 형태에 가까워져 있었다.
“조금만 더 자도록 해. 어차피 곧 깨어날 거야. 그리고 잠에서 깨면…….”
“아…….”
“……재미없는 아들 노릇도 끝이겠지.”
헤레이스의 눈이 어둠 속에서 감겼다. 그녀가 잠들자 그것이 다 큰 사내를 흉내 내며 하얀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조금 전 이즈카엘이 입맞춤한 자리 그대로였다.
“너무 원망 마. 어차피 내가 쥐여 준 행복이잖아. 그리고 원래 난 변덕이 심한걸. 그러니까 내 멋대로 굴 거야.”
잠든 헤레이스의 옆에서 그것이 변명하듯 중얼거렸다. 하나 듣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 * *
“당장 떠나십시오. 배웅은 하지 않겠습니다.”
이즈카엘의 도를 넘는 불충한 발언으로 인해 라그랑 후작은 더는 참을 수 없었다. 그가 응접실 탁자를 내리쳤다.
쾅!
“참는 것도 한계가 있지! 감히 뉘 앞이라고 그따위 망발인가! 공작께서 착각하시는 모양인데 전하께서는 폐하의 명으로 그대를 심문하러 왔소이다!”
노기를 담은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으나 이즈카엘은 눈 한번 깜빡이지 않았다. 그가 라그랑 후작 쪽으로는 눈길도 주지 않은 채 이안을 바라봤다. 그러자 황태자가 과장되게 한숨을 쉬더니 입을 열었다.
“……열흘만 있도록 하지.”
“전하!”
후작이 뒤를 돌아봤지만 이안은 손을 들어 그를 막았다. 그러고는 이즈카엘의 눈앞에 열 손가락을 장난스레 펼쳤다가 거둬들였다.
“열흘만 더 있겠다는데 그걸 거절하지는 않겠지. 거절하면 귀찮은 일이 생길 텐데.”
그 말을 하며 손짓하자 밀로 백작이 다가와 서류 몇 장을 내놨다. 이안이 서류를 한 장 한 장 탁자에 던졌다. 제멋대로 탁자 위에 널브러진 서류는 서로 겹치고 방향이 돌아가 살펴보기가 힘들었다.
“포드 백작의 막내아들을 죽였다고?”
이즈카엘의 시선이 이안의 손가락 끝을 향했다. 그가 내민 서류에는 헤레이스의 일로 윌리엄을 죽인 일이 제법 자세하게 기술돼 있었다. 귀족이 같은 귀족을 살해하는 일은 중죄에 속했으므로 대귀족이라 하여도 처벌을 쉬이 피해 갈 수 없었다.
그러나 이 일에 대해서는 이미 오래전에 대비가 끝났다. 이즈카엘이 쭈르륵 나열된 서류를 눈으로 훑다 제임스 쪽으로 손을 내밀었다. 제임스가 즉시 준비한 서류를 넘겼다. 깔끔이 줄을 맞춰 서류를 펼친 이즈카엘이 이안 쪽으로 서류를 내밀며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놈은 즉결 처분 대상이었습니다. 부녀자 납치에 강간을 수없이 저질렀고 개중에는 귀족 여인도 있었습니다. 저와 마주쳤을 때도 비슷한 일을 저지르려다 들키자 감히 제게 검을 들이밀었습니다. 죽어도 할 말이 없는 놈입니다.”
사실 포드 백작의 막내아들 윌리엄은 이즈카엘에게 검을 들이민 적이 없었다. 그러나 제임스가 내민 서류에는 그간 윌리엄이 행한 죄목뿐 아니라 그가 이즈카엘에게 검을 휘두른 사실까지 조작된 채 기록돼 있었다. 증인들의 말이 첨부된 서류까지 있는 한 윌리엄을 살해한 일로 재판이 열린다 한들 이즈카엘은 무죄로 당일에 풀려나리라.
“그렇군. 포드 백작의 아들은 죽어 마땅해.”
서류를 본 이안도 결말이 예상되는 모양인지 고개를 끄덕였다. 순순히 물러나는 모습에 이즈카엘의 얼굴에 귀찮음이 언뜻 비쳤다. 여유를 부리는 모양새가 준비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닌 듯해 보였다. 아니나 다를까, 이안이 밀로 백작에게 서류를 치우라 명하더니 이번에는 서류 없이 말을 먼저 꺼냈다.
“그 건은 그렇다 쳐도, 르페즈 공작의 허락 없이 영지에 들어간 건 어떻게 설명할 건가?”
르페즈 공작이라는 말에 이즈카엘이 눈살을 찌푸렸다. 동부의 영지에 기사들을 끌고 들어간 일은 당사자와 일찍이 해결을 본 일이었다.
“그 일에 대해 르페즈 공작은 제게 괜찮다 전해 왔습니다. 르페즈 공작에게 받은 서신을 보여 드릴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