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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목을 꺾는 악마여-94화 (94/108)

94화.

응접실 탁자 위에는 이미 차가 준비돼 있었다. 이안이 적당한 온도의 차를 들어 올리며 이즈카엘을 바라봤다.

“내가 여기까지 왜 왔는지 아나?”

황태자의 방문이 좋지 않은 목적임은 알았으나 정확한 것은 끝내 알아내지 못했다. 이즈카엘은 저를 보는 이안의 눈을 똑바로 마주 보며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모릅니다. 방문하신 목적을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공작은 여전히 직설적이군. 하긴 폐하의 곁에 머물 때도 그랬지.”

이안이 웃음을 터뜨리며 찻잔을 내려놨다. 보통 황태자가 심문관을 데리고 방문하면 아무리 콧대 높은 귀족이라 한들 겁을 먹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눈앞에 사내는 아비의 곁에 머물 때와 마찬가지로 감정의 요동이 일말도 보이지 않았다.

“자네한테 은밀히 알려 줄 소식도 있고 해서 말이야.”

“소식이라면 서신이나 사람을 보내는 것으로 충분하셨을 텐데요. 전하께서 직접 움직이실 이유가 있습니까.”

이안의 오른편에 앉은 라그랑 후작의 얼굴이 붉게 변했다. 왼편에 앉은 밀로 백작도 이즈카엘의 무례한 어투에 안경을 추켜올리며 눈썹을 꿈틀댔다.

“전할 소식만 있다면 그렇겠지. 하지만 소식보다는 심문이 주된 목적이라 말이야.”

말을 들은 당사자만 여전히 별생각 없는 얼굴이었다.

황태자는 유쾌한 목소리로 심문을 말했다. 이즈카엘의 뒤에 서 있던 에드가와 제임스가 긴장한 표정을 했다. 황태자가 직접 말한 이상 심문은 기정사실이었다. 그러면 도대체 무얼 심문한단 말인가. 응접실에 모인 모든 사람들의 눈이 황태자를 향했다.

“이런…… 긴장하지는 말게. 심문이라는 거창한 이름을 붙이긴 했으나 별거 아니야. 내가 황태자라고는 하나 황제 폐하께서 아끼는 공작인 그대를 함부로 심문할 수는 없지.”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자 이안이 손사래를 쳤다. 가벼운 태도가 별거 아니라는 말을 뒷받침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저리 가벼운 수에 누가 속겠는가. 곧바로 이즈카엘이 가벼운 말로 받아쳤다.

“폐하께서 절 아낀다 한들 그분의 아드님이신 전하와 일개 신하인 절 어찌 비교하십니까. 폐하께서 가장 아끼시는 분은 황태자 전하시지요. 전하의 호위를 위해 세르펜스 성을 방문한 황실 기사단의 수만 봐도 폐하께서 전하께 가진 마음을 쉬이 짐작할 수 있습니다.”

얼핏 들으면 자신을 낮추고 황태자를 추켜세우는 겸손한 말이었다. 그러나 그 속에 담긴 의미를 알아채지 못할 사람은 없었다. 네 말대로 별거 아니라면 왜 이렇게 기사를 많이 데려온 거냐고 떠보는 이즈카엘의 말에 이안이 소리 내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내가 겁이 좀 많아서 말이야. 북부에 늑대 떼가 많다 해 호위를 맡길 기사단을 제법 꾸렸지.”

“…….”

“하지만 많이 데려왔다 해도 겨우 이 정도로 자네 목을 벨 수는 없잖나. 내 목이 땅에 떨어지면 모를까.”

농담으로도 할 말이 아니었다. 일국 황태자의 목을 벤다니. 입 밖으로 내기만 해도 당장 반역죄로 잡혀가리라. 라그랑 백작이 참지 못하고 끼어들었다.

“전하, 그런 말씀은……. 그리고 공작! 아까부터 전하께 너무 무례한 거 아니요!”

“후작, 방해하지 말게. 공작과 말을 나누고 있지 않나.”

유들유들했던 분위기가 대번에 변했다. 얼굴을 굳힌 이안은 감히 허락도 없이 개입한 라그랑 후작을 노려봤다. 후작이 주인의 질책에 대번에 꼬리를 내렸다.

“후작의 무례를 용서하게. 명색이 이번 심문단의 부단장인데 말이야…… 성격이 좀 급해.”

“괜찮습니다. 전하를 보필하는 라그랑 후작의 명예로운 별칭에 대해서는 이미 알고 있어서요.”

고개를 숙인 라그랑 후작이 이즈카엘의 언사에 주먹을 꾹 쥐었다. 그는 사람들이 뒤에서 자신을 무어라 부르는지 알고 있었다. 황실의 멍청한 개. 이즈카엘의 말과 달리 명예롭지 않은 별칭이었다.

이안은 수하가 당한 모욕에도 입꼬리만 당겼다. 웃는 낯의 그가 이즈카엘을 바라보다가 탁자 위로 양손을 올려 마주 잡았다. 자세를 조금 바꾼 것뿐이었건만 진중해진 분위기가 주변을 무겁게 했다.

“그럼 우선 전할 소식부터 말해 볼…… 이런. 이게 누구야.”

그러나 본론으로 들어가기 직전 응접실에 들어온 이로 인해 흐름이 깨졌다. 이안이 인영을 보고 반가운 낯을 했고, 이즈카엘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응접실에 들어온 이의 이름을 불렀다.

“헤레이스!”

이안 일행을 안내한 응접실은 성내에서 가장 넓은 응접실인 만큼 방의 형태를 띠고 있지 않았다. 사방이 뚫려 있는 응접실은 홀에 가까웠다. 덕분에 헤레이스는 쉬이 그들에게 접근했다.

이안의 얼굴을 알아본 헤레이스가 창백히 질렸다. 그녀는 감히 그에게 인사도 하지 못한 채 제자리에 굳었다. 이즈카엘이 망설임 없이 그녀에게 다가갔다.

가까이 마주 붙은 공작 부부를 보며 이안이 입매를 길게 올렸다. 그가 헤레이스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입을 열어 전하려 했던 소식을 털어놨다.

“전할 소식은 하나야. 고모님…… 아니, 탑의 죄인이 죽었네.”

“헤레이스, 들어가 있어. 여기는 당신이 나올 자리가 아니야.”

“아아…….”

“헤레이스!”

이즈카엘이 헤레이스를 붙잡은 채 흔들었다. 하지만 이안의 말을 들은 헤레이스는 이미 정신이 나가 있었다.

‘전할 소식은 하나야. 고모님…… 아니, 탑의 죄인이 죽었네.’

탑의 죄인. 그를 가리키는 대상은 하나였다. 한때 고귀했던 황녀요, 헤레이스의 전임자이자 이제는 반역죄인으로 떨어진 율리스. 그녀의 죽음을 듣는 순간, 헤레이스는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헤레이스, 샤를을 부탁한다.’

그래도 살아 계시니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마음 한편 숨겨 놨던 죄책감과 함께 머리가 지끈거리고 생각을 하는 것이 힘들었다.

헤레이스가 신음 소리만 내자 이즈카엘이 그녀를 아예 안아 올리려 했다. 그러나 헤레이스는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그의 손길을 거부한 채 고개를 저으며 뒷걸음질 쳤다.

“공작 부인, 오랜만이야. 몇 년 만이지?”

“아…….”

“여전히 아름답군 그래.”

부부의 대치를 구경하던 이안이 자리에서 일어나 두 사람에게 다가갔다. 헤레이스의 손을 멋대로 움켜쥔 채 입맞춤하는 모습에 이즈카엘의 눈에서 불꽃이 일었다.

“……그 손 떼십시오.”

당장에라도 검을 빼 들 듯 살기 어린 이즈카엘의 표정이 심상찮았다. 이안 일행이 얼굴을 굳힌 채 허리춤을 더듬으며 주인을 둘러쌌다. 그러자 에드가를 비롯해 공작가의 기사들도 검 손잡이에 손을 올렸다.

“알겠네, 알았어. 이거 참…… 인사 한번 제대로 하기 어렵군.”

심각한 공기에 여전히 평온한 것은 이안뿐이었다. 그는 헤레이스에게서 손을 떼고 한 발자국 물러났다. 그의 입가에 핀 불쾌한 미소는 어느새 훨씬 짙어졌다.

“공작, 자네가 동부 출신이던가? 왜, 그쪽 사내들 유명하잖나. 신의 가르침이라면서 집 안에 아내 가둬 놓는 거. 그러고 보니 공작의 사랑이 한때 유명했지. 멸문한 디본의 여식에게 반해 면죄부와 그녀를 바꾸기까지 했다고 말이야.”

어느 누구도 감히 언급하지 않는 디본의 이름이 튀어나왔다. 헤레이스의 얼굴은 이제 하얗다 못해 잿빛으로 변해 있었다. 이즈카엘이 헤레이스를 껴안다시피 한 채 이안을 노려봤다. 그만 입을 다물라는 압박이 누구에게나 느껴질 정도였다.

“장난이야. 그러니 그런 무서운 얼굴은 말게. 하지만 사실이기도 하잖나. 없던 일을 말한 것도 아니고…… 공작이나 공작 부인이나 과민한 반응이군, 그래.”

이즈카엘의 살의 넘치는 표정과 헤레이스의 심각한 상태에도 이안은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는 농담이라며 웃으면서도 집요하게 헤레이스를 쳐다봤다.

선명히 보이는 악의에 이즈카엘이 애써 버티는 헤레이스를 힘으로 제압한 채 안아 들었다. 헤레이스의 상태는 어찌나 심각한지, 드레스 밑으로 잠시 드러났다가 사라진 발목조차 파리해 핏기가 없는 상태였다.

“……헤레이스, 들어가자. 여기서 쓸데없는 말 듣고 있을 필요 없어.”

잠시 바르작거리던 헤레이스가 결국 그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숨만 거칠게 내쉬었다. 이안이 힘없이 축 늘어진 헤레이스에게 조소를 보내다 잔뜩 비꼬며 말했다.

“부인을 왜 계속 보내려 하나. 부인도 알아야 할 소식 아닌가. 전 약혼자의 어미요, 한때 키워 주다시피 한 이가 죽었는데. 안 그렇소, 세르펜스 공작 부인?”

“그 입 다물어.”

이안이 빈정거리는 목소리로 헤레이스를 세르펜스 공작 부인이라 칭하자, 이즈카엘이 한 꺼풀 겨우 쓰고 있던 예의를 던져 버리고 그를 향해 반말을 지껄였다.

너무도 뚜렷한 살기에 황실 기사들이 이안을 뒤로 보내고 검을 뽑아 들었다. 이안은 잠깐 얼굴을 굳혔으나 기사들 뒤에 숨자마자 낄낄거리기 시작했다. 희열에 가득 찬 표정이 벌레의 팔다리를 뜯으며 노는 잔인한 어린아이와 같았다.

챙, 하는 소리를 시작으로 소속에 관계없이 여기저기서 기사들이 검을 뽑았다. 팽팽한 대치가 시작됐다. 밀로 백작은 당장 날뛸 것처럼 얼굴을 붉히는 라그랑 후작을 밀어내고 이안의 옆에 서 이즈카엘에게 말했다.

“공작 각하, 조금 전 각하께서 전하께 내뱉은 언사는 용서받기 힘든 것입니다. 당장 전하께 사죄를 드리고 자비를 구하십시오.”

이즈카엘이 그 말을 들을 리 없었다. 당장 누구 하나 벨 듯 날카로운 눈초리가 이안에게서 밀로 백작으로 옮겨 갔다.

밀로 백작이 움찔거리며 입술을 내리 물었다. 황실 기사들이 벽을 치고 있기는 하나, 거의 책상에만 앉아 있는 그가 감당하기에 이즈카엘이 내뿜는 기세는 너무도 흉흉했다.

이즈카엘이 겁먹은 밀로 백작에게서 다시 이안에게로 시선을 옮기더니 몸을 홱 돌렸다. 저 즐거워 죽겠다는 얼굴을 보니 그가 무슨 말을 더 지껄일지 불안했다. 그에게 안겨 있는 헤레이스의 드레스가 팔랑거리며 원을 그렸다.

“본래라면 죄인의 죽음을 한 사람한테 더 전해야 하는데 말이야, 이상하게 그 사람의 행방을 찾을 수가 없어. 덕분에 폐하께서도 걱정이 이만저만이시고.”

자리를 벗어나려는 이즈카엘을 향해 이안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응접실에 있는 이들이 모두 들을 수 있을 정도로 큰 목소리였다. 이즈카엘에게 안긴 헤레이스의 귀에도 그의 음성이 뚜렷하게 들렸다.

“오늘 심문도 그의 행방불명 때문이지. 내 착한 외사촌…… 그래, 공작의 동생이자 부인의 전 약혼자인 샤를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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