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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목을 꺾는 악마여-93화 (93/108)

93화.

아무것도 모르는 아내는 그의 부름에 눈을 예쁘게 뜰 뿐이었다. 이즈카엘이 헤레이스를 꼭 안고 그녀의 귀에 죄책감 가득한 숨을 내쉬었다.

“……내가 평생 잘할게. 당신 앞에 무릎을 꿇고 조아리며 평생을 살 거야. 그러니 당신은 말만 해. 당신이 원하는 건 내가 뭐든 이뤄 줄 테니.”

닿지 못할 사죄가 전해졌다. 난데없이 튀어나오는 굴종에 헤레이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녀가 이즈카엘의 얼굴을 보기 위해 고개를 들려 했다. 하지만 제 추악함을 들키기 싫었던 이즈카엘은 재빠르게 손을 들어 그녀의 눈을 가렸다.

“날 막 대해도 좋아. 당신이 원하는 대로 나를 쥐고 흔들어. 대신…… 하나만 약속해 주겠어?”

이즈카엘의 손에 시야를 잃은 헤레이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아내의 모습을 바라보던 이즈카엘이 눈을 감았다. 자신의 죄악을 외면한 그의 입에서 감히 해서는 안 되는 부탁이 흘러나왔다.

“날 떠나지 마, 헤레이스. 당신이 떠나면 난…….”

“왜 그런 쓸데없는 걱정을 해요?”

헤레이스가 이즈카엘의 말을 잘랐다. 그녀가 손을 들어 제 눈을 가린 이즈카엘의 손을 잡고 끌어 내렸다. 그녀가 영문 모를 소리를 하는 남편을 찬찬히 살피며 뾰로통한 얼굴을 했다.

“이즈카엘 당신…… 요즘 좀 이상해요.”

“…….”

“나 몰래 바람이라도 피웠어요? 나 말고 다른 여자 숨겨 놓고 거기서 아이라도 본 거예요? 왜 죄지은 사람처럼 굴어요.”

헤레이스의 말에 이즈카엘은 연기조차 잊은 채 얼굴을 굳혔다. 분명 아무것도 모르는 아내건만 어찌 저리……. 심장이 불안으로 쉴 새 없이 뛰었다.

“농담이에요, 농담. 당신이 워낙 심각한 얼굴이니까 분위기 좀 바꿔 보려고 그런 건데…….”

심각한 이즈카엘의 얼굴에 헤레이스가 재빨리 손사래를 쳤다. 그러나 지은 죄가 있는 이즈카엘은 아내의 말을 웃어넘기지 못한 채 여전히 뻣뻣한 몸을 했다. 그런 그에게서 이상을 감지한 헤레이스가 눈을 두어 번 깜빡이다가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이즈카엘, 설마 정말로…….”

“아니야!”

하얗게 변한 헤레이스의 얼굴에는 핏기가 없었다. 아내의 의심에 이즈카엘이 정신을 차리고 고함을 질렀다. 갑작스레 터져 나온 소리에 헤레이스가 깜짝 놀라 숨을 멈췄다.

“미안해. 놀랐어?”

“……놀랐어요.”

아내가 딸꾹질을 시작하자 아차 싶어진 이즈카엘이 구겨진 인상을 풀었다.

“미안해. 놀라게 하려던 게 아니야. 미안해, 헤레이스. 그러니까…….”

“이즈카엘.”

불안히 흔들리는 호박색 눈동자에 헤레이스가 이즈카엘의 입술 위로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놀란 건 자신이건만 떨림은 왜 남편의 몫인지. 그녀는 제 장난이 좀 지나쳤나 되돌아보며 남편을 달래기 시작했다.

“당신이 왜 이렇게 불안해하는지 모르겠지만…… 걱정 말아요. 내가 당신을 떠날 일은 없어요.”

“……정말?”

그녀의 말에 이즈카엘이 여러 감정이 뒤섞인 묘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가장 위에 자리한 감정은 기쁨이었으므로 헤레이스는 일말의 의심도 없이 남편의 품을 파고들었다.

“나 못 믿어요?”

“헤레이스…….”

“당신이 날 먼저 떠나면 모를까. 당신이 날 이렇게 사랑해 주는데 내가 왜 떠나겠어요?”

“……”

“전에 말했잖아요. 당신 품은 너무 따뜻하다고……. 너무 따뜻해서 감히 벗어날 생각조차 들지 않아요.”

* * *

무엇을 가지거나 누리고자 탐하는 마음. 그 탐심이 생명체를 향하면 꼭 뒤따르는 것이 있었다.

질투.

시기의 다른 이름인 그것은 저열한 것. 그러나 누군가에게 깊은 마음을 품은 이라면 그 어두운 감정에서 벗어날 재간은 없었다. 단지 크기의 차이가 있을 뿐.

‘……거짓말쟁이.’

아이는 그림자 속에 숨어 꼭 안고 있는 부모를 바라보다 입술을 비틀었다. 속이 뒤집히고 머리가 차게 식었다. 손바닥 뒤집듯 아이가 그것으로 모습을 변화했다.

자비는 그것과 가장 거리가 먼 것 중 하나였으며, 제멋대로 저주와 벌을 내리는 것은 그 먼 옛날 악신에 가까웠던 그것에게 가장 기꺼운 일이었다.

그것이 그림자 속으로 기어들어 가더니 아이가 성의 꼭대기에 서서 작은 손을 뻗었다. 밤하늘과 분간되지 않는 검은 연기가 날렸다.

[경애하는 아나이스의 작은 태양에게…….]

곧 바람 한 점 없는 하늘에 서신이 떴다.

* * *

일행은 거대한 무리였다.

족히 백은 넘는 말들과 수십 대의 짐마차. 길을 따라 움직이는 이들의 수에 지나가던 행인이 전쟁이라도 났나 싶어 눈을 크게 떴다가 휘날리는 붉은 기에 납작 엎드렸다.

태양과 용이 그려진 화려한 깃발과 마차 위 왕관. 그것은 이 무리의 우두머리가 황족임을 나타냈다.

무리와 마주치는 대부분 사람들의 눈에는 경애와 두려움이 공존했다. 하지만 그 감정들의 원인이라 할 수 있는 이는 푹신한 마차 시트에 몸을 뉜 채 근엄함과는 먼 표정을 짓고 있을 뿐이었다.

“……재미있네.”

혀 차는 소리와 함께 비웃음이 마차 안을 채웠다. 서류를 보고 있던 밀로 백작은 집중을 깨는 소리에 안경을 들어 올리며 반대편을 봤다.

물결치는 황금빛 머리카락과 루비처럼 붉은 눈동자, 그리고 약간은 예민해 봬는 화려한 인상이 단번에 들어왔다. 백작이 잠시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무엇을 그리 보십니까?”

“내가 그대 물음에 답해야 할 이유가 있나?”

사내가 백작을 보지도 않은 채 오만하게 답했다. 그러나 자칫 기분이 나쁠 수 있는 말에도 백작은 불편한 내색 하나 없었다.

오만은 감히 사내의 흠이 될 수 없었다. 왜냐. 그는 이 제국, 아나이스의 미래 주인이었으니까.

“아닙니다. 전하께서 한낱 신하인 제게 답을 할 의무는 없지요. 제가 결례를 범했습니다. 벌을 주십시오.”

“쯧! 재미없기는…….”

딱딱하고 완벽한 밀로 백작의 말에 황태자 이안이 짧게 혀를 찼다. 그가 백작에게 들고 있던 서신을 던지다시피 넘겼다.

“읽어 봐. 그럼 백작 그대의 재미없는 얼굴이 볼만해지겠지.”

밀로 백작이 제 가슴을 치고 떨어진 서신을 주워 빠르게 읽었다. 눈동자가 옆으로 넘어갈 때마다 무표정했던 그의 얼굴에 점차 경악이 서렸다. 그가 서신을 다 읽은 뒤 앞뒤로 꼼꼼히 살펴봤다.

“……어떤 인장도, 서명도 없군요. 믿을 수 없는 서신입니다.”

“하지만 마냥 무시할 수만은 없는 내용이지. 특히 지금은…….”

“…….”

“만일이라는 게 있지 않나. 이 서신대로면 공작은 뭐가 되지?”

“서신대로라면 세르펜스 공작은 반역죄인입니다. 추방당한 반역죄인을 멋대로 제국 내로 들여오다니…… 용서받지 못할 죄입니다.”

그자가 반역이라……. 이 사실을 알면 아버지 얼굴이 어떻게 될지 궁금하군. 백작의 답에 이안이 반역이라는 단어를 여러 번 중얼거리며 낄낄거렸다. 그러나 한참 웃던 그는 어느 순간 웃음을 뚝 그치고 냉랭한 목소리로 명했다.

“조사해.”

“……일정이 지체될지도 모릅니다.”

“좀 늦어지면 어때. 어차피 공작을 심문하러 가는 거잖아. 심문할 내용이 많으면 많을수록 재미있겠지. 그리고 서신대로면…….”

말을 하다 만 이안이 누군가를 떠올렸다. 호수처럼 푸른 눈. 마냥 찢어발기고픈 그 얼굴.

반역이라는 단어를 입에 담았을 때보다 더 잔인한 미소가 그의 입가에 피어올랐다.

“……들켰을 때 절절매면서 울먹일 이가 하나 있거든.”

“…….”

“그게 어쩔 줄 몰라 하며 발발 떠는 꼴을 보고 싶어. 그러니 철저히 조사해.”

이안의 명에 밀로 백작이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그는 명을 하는 이가 아니라 명을 받잡는 이. 백작은 고개를 숙여 복종할 뜻을 보였다.

“명 받들겠습니다.”

12장. 파몽

바람이 제법 차갑게 불기 시작했다. 짧은 여름은 언제 왔다 갔는지 세르펜스 성안 가득했던 녹음은 어느새 사라져 있었다. 대신 자리를 차지한 것은 우수수 떨어지는 낙엽과 겨울 준비로 바빠진 사용인들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한창 바쁜 이때 반갑지 않은 손님이 세르펜스 성을 방문했다. 황태자 이안. 성주인 이즈카엘은 붉은 기를 앞세워 성에 들어온 그를 맞이했다.

“오, 공작. 반갑네. 아주 오랜만이지.”

“……3일 전 갑작스러운 서신에 놀랐습니다. 더 일찍 방문을 알려 주셨다면 준비를 좀 더 했을 텐데요.”

황태자를 맞아들이는 이즈카엘의 말은 깍듯했으나 풍기는 분위기는 그렇지 못했다. 이즈카엘은 이안의 방문을 성가셔하는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황가의 충실한 개로 불리는 라그랑 후작이 그런 이즈카엘의 태도에 눈썹을 세웠다. 하지만 정작 목줄을 잡고 있는 주인은 태연했으므로 구태여 앞으로 나서지는 않았다.

“3일이라…… 글쎄. 석 달 전에 알지는 않았고?”

“신전의 교황이나 예언자가 아닌 이상 앞날을 볼 수는 없습니다.”

“공작이 예언자는 아니지. 하지만 하늘에 떠 있는 새들의 눈 정도는 다스릴 수 있지 않나.”

“날짐승 조련에는 문외한에 가깝습니다. 그보다 그만 안으로 들어가시는 게 어떻습니까. 북부는 수도와 달리 금방 해가 져 고귀한 몸이 상할까 저어됩니다.”

이즈카엘의 말에 이안이 말에서 내리자 그를 따라 십여 명 남짓한 일행들이 말에서 내렸다.

황태자를 보필하는 이들의 수는 확연히 줄어 있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안을 따라왔던 기사들 중 호위를 위한 일부를 제외하고는 본성 내로의 진입을 허락받지 못했다.

‘그 무도한 자가! 감히 전하의 일행을 허락하니 마니 하다니!’

라그랑 후작은 세르펜스 성에 도착하기 전 이를 알려 온 이즈카엘의 태도에 분을 터뜨렸다. 하지만 이안은 이 또한 별말 없이 받아들이며 그에게 조용히 하라 명할 뿐이었다.

“그럼 안내하겠습니다.”

“좋아. 신세 좀 지겠네, 공작.”

이안과 몇몇 귀족, 그리고 황실 기사들이 성으로 들어서는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이안은 이즈카엘의 안내를 받으며 주변을 둘러보다가 계단마다 정렬해 있는 세르펜스 성 기사들을 보며 물었다.

“또 야만인 토벌을 하러 가나? 기사들의 기세가 심상찮은데.”

“내년 봄까지 토벌은 없습니다. 이 정도는 평소와 같은 모습입니다.”

잘 닦인 무구와 날이 서 있는 모습. 공작가 기사들의 태세는 잘 벼려진 검과 같았다. 덕분에 몇 안 되는 황실 기사들은 잔뜩 긴장한 채 주인인 황태자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계단을 다 오르자 사용인들이 그들이 맞이했다. 노집사가 그들을 성내 가장 큰 응접실로 안내했다.

“내 생각보다 훨씬 괜찮은데.”

이안과 일행은 넓고 화려한 응접실에 들어서며 놀란 얼굴을 했다. 촌스럽고 초라하다고 수도에 알려진 것과 다르게 성은 외관도, 내부도 훌륭했다. 특히 비싼 광물들로 장식된 벽과 천장은 다른 지역에서 볼 수 없는 특징적인 아름다움을 띠었다.

“아! 오해는 말게. 자네도 알잖나. 북부가 수도에 어떻게 알려져 있는지. 나 또한 수도 사람이란 말이야. 고정 관념에서 깨어나기가 어렵군.”

내부를 둘러본 이안이 안내된 자리에 앉으며 이즈카엘에게 말했다. 이즈카엘은 그들의 반응에 별달리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무감한 얼굴을 했다.

“그렇습니까. 본성이 전하를 충족시켜 다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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