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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목을 꺾는 악마여-92화 (92/108)

92화.

이즈카엘이 그런 아내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카우치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 찰나의 동작에도 그의 눈은 헤레이스에게서 고정된 채 조금도 비켜 나가지 않았다.

“헤레이스.”

마침내 헤레이스의 앞에 당도한 그가 한쪽 무릎을 꿇었다. 여신을 추앙하는 광신도처럼 그녀를 올려다보는 눈에는 당장의 환희와, 후회로 인한 비탄이 공존했다. 그가 아내의 무릎에 손가락을 대더니 입술을 가져다 댔다.

“듣자 하니 아직도 아이를 자주 안고 다닌다지.”

헤레이스는 갑작스러운 남편의 행동에 당황하다 행동만큼 엉뚱한 말에 인상을 찌푸렸다.

“당신…….”

그녀가 입을 열어 무어라 말하려 했으나 어느새 고개를 든 이즈카엘이 먼저였다.

“그러지 마, 헤레이스. 아이는 내년이면 여섯 살이야. 안고 다니기에는 너무 컸지.”

“…….”

“아이는 크면서 달라지기 마련이야. 혼자만의 시간도 필요하겠지. 아이가 떼를 쓰고 당신 보기를 꺼린다면 잠시 거리를 두도록 해.”

그것과 아내를 더 떨어뜨리기 위한 말에 불과했다. 하지만 이즈카엘은 그것이 아닌 에르젠을 양육했더라도 자신은 이 비슷한 말을 아내에게 했으리라 확신했다.

아이를 사랑하는 것과 별개로 그는 아이를 종종 질투했을 것이다. 아내의 품을 빌려 간 주제에 제게 빨리 돌려주지 않는다며 속으로 남몰래 투정했겠지.

“커 가는 아이인데 언제까지 당신 품 안에 둘 수만은 없잖아. 안 그래?”

말을 하면 할수록 지금 상황이 연기가 아닌 실제 같았다. 아내가 말하는 아이는 그것이 아닌 에르젠이고…… 아내와 저는 간혹 이런 대화를 했겠지. 서로 감정이 격해지다 보면 말다툼을 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말다툼은 항상 침대 위에서의 화해로 끝날 것이다.

어쩐지 눈가가 뜨거워졌다. 이즈카엘은 헤레이스에게 들키지 않게 최대한 감정을 억눌렀다. 다행히도 헤레이스는 그의 말을 생각하느라 바빠 보였다. 이즈카엘은 그녀가 고개를 작게 주억거릴 때까지 온 힘을 다해 눈물을 참으며 기다렸다.

“당신 말이 맞아요, 이즈카엘.”

헤레이스는 한참 만에 그의 눈을 들여다봤다. 그녀의 얼굴에는 남편을 향한 꺾이지 않을 신뢰가 있었다.

“이제 화가 좀 풀렸어?”

이즈카엘의 물음에 헤레이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꿇어앉아 있는 남편의 목을 꼭 껴안았다.

“……화내서 미안해요.”

일말의 주저함도 없는 아내의 몸짓에 이즈카엘의 기분이 곤두박질쳤다. 이런 미래를 내가…… 이 손으로……. 수없이 뇌까리던 절망이 또다시 그의 머릿속을 채웠다. 하지만 그는 이내 잔웃음으로 제 감정을 가린 채 다정한 목소리를 꾸며 냈다.

“화가 풀려 다행이야.”

그가 눈을 감으며 헤레이스의 무릎에 머리를 뉘었다. 헤레이스가 남편의 부드러운 은발을 쓸다 걱정스러운 얼굴을 했다.

“그만 일어나요. 잘못한 것도 없는데 다리 아프게 무릎은 왜 꿇고 있는 거예요.”

“그냥…… 당신이랑 이렇게 있는 게 좋아서.”

감미로운 목소리에 헤레이스가 얼굴을 붉혔다. 그녀의 남편은 아나이스의 뭇 사내들과 달리 애정을 표현하는 데 거침이 없었다. 그녀가 작게 헛기침을 하다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럼 이리 올라와서 편히 누워요. 질리도록 쓰다듬어 줄게요.”

헤레이스의 말에 이즈카엘이 냉큼 몸을 일으켰다. 헤레이스는 남편이 제 무릎을 베고 누울 수 있도록 카우치의 끝으로 자리를 옮겼다.

곧 기다란 카우치가 이즈카엘의 몸으로 가득 찼다. 헤레이스는 고요히 눈을 감은 이즈카엘의 머리카락을 일정하게 쓸었다. 이즈카엘은 제 머리카락 사이로 지나가는 아내의 온기를 음미하며 핑 도는 눈물을 숨기기 위해 시큰거리는 눈가를 간신히 눌렀다.

“헤레이스.”

한참 아내의 손길을 즐기던 이즈카엘이 눈을 뜨고 아내를 불렀다. 푸른 눈이 그의 부름에 무언으로 답했다.

“……나 당신한테 상의하고 싶은 일이 하나 있어.”

잠시간의 머뭇거림 후에 나온 목소리가 꽤 진지했다. 헤레이스가 말해 보라는 듯 고갯짓을 하며 남편의 까슬까슬한 턱을 쓸었다. 이즈카엘이 저를 만지는 헤레이스의 손을 붙잡은 채 며칠 동안 고민하던 말을 쏟아 냈다.

“당신 오라비랑…… 안나던가? 그 시녀 말이야. 성으로 데려올까 하는데 어떻게 생각해?”

이즈카엘의 말에 헤레이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반역…… 추방…… 오라비의 이름과 함께 무서운 단어들이 지나가고 곧이어 혼란이 그녀를 뒤흔들었다.

‘안나? 그러고 보니 안나가 왜 성에 없고…… 아?’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느낌과 함께 헤레이스의 머릿속이 퍼즐처럼 쪼개져 흩어져 내렸다. 갑작스러운 고통과 이해할 수 없는 무질서에 헤레이스가 시간을 잊었다.

이즈카엘이 그런 아내를 유심히 살폈다. 그의 얼굴에는 숨길 수 없는 불안과 초조함이 엿보였다.

“당신도 보고 싶을 테고 그들도……. 헤레이스?”

참지 못한 그가 말을 이어 가는 척하다 아내를 불렀다. 헤레이스는 듣지 못했다. 그러나 아주 찰나의 시간이 지나고 그녀의 머릿속은 질서를 찾아 가기 시작했다. 흩어진 퍼즐 조각들이 다시 한데 모였다. 그리고 그것들이 그려 낸 완성품은 본래의 모습과 완전히 달랐다.

‘……맞아. 안나는 결혼해서 떠났지.’

헤레이스는 세르펜스 성에서 열렸던 안나의 결혼식을 기억해 냈다. 안나를 졸졸 따라다니던 젊은 기사. 안나는 소년일 때부터 그녀를 좋아했던 사내와 결혼을 했다. 그리고 작년 봄에 남편을 따라 성을 떠났더랬다.

‘……건망증이 생겼나? 왜 이런 기억들이 바로 떠오르지 않는 거지.’

기억을 상기했다 한들 모든 의문이 사라진 건 아니었다. 헤레이스는 제 기억이 어딘가 이상함을 알아챘다. 그녀가 심각한 얼굴로 제 기억을 좀 더 파고들려 했다. 순간 이즈카엘이 그녀를 툭 쳤다.

“헤레이스, 당신…… 괜찮아?”

남편의 손길에 헤레이스가 정신을 차렸다. 그녀가 염려 섞인 이즈카엘의 표정에 고개를 저었다. 피어올랐던 의심이 한순간에 식어 잿더미가 됐다. 그러나 푹 가라앉음과 동시에 사방으로 흩어진 재 가루는 머릿속을 계속해서 간지럽혔다. 헤레이스가 이유 모를 찝찝함을 누른 채 말했다.

“아, 아니에요. 머리가 조금 어지러워서…….”

“……그래? 정말 괜찮아?”

이즈카엘이 눈을 가느스름하게 뜬 채 아내를 샅샅이 관찰했다. 말간 얼굴에는 어떤 징조도 보이지 않았다. 그가 침을 꿀꺽 삼키고 침착함을 가장한 채 다시 물었다.

“그럼 어떻게 생각해? 난 두 사람을 데려오면 좋을 거 같은데.”

“…….”

헤레이스는 이즈카엘의 물음에 바로 답하지 않았다. 그녀의 멀건 낯에는 이제 공포와 걱정이 가득했다. 그녀가 수심 어린 표정을 하다 이즈카엘에게 조심스레 말을 붙였다.

“이즈카엘, 크리스를 아나이스 안으로 들여도 괜찮은 거예요? 오빠는 폐, 폐하의 명으로…….”

헤레이스는 말을 끝까지 잇지 못했다. 오라비의 이름을 입 밖으로 내는 순간, 그날의 기억이 떠오른 탓이다. 제 눈앞에서 끌려간 오라비. 네 오라비는 고문당하다 죽을 거라며 킬킬거리던 간수들…….

“흐으…….”

헤레이스의 숨이 거칠어지더니 그녀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이즈카엘이 몸을 일으켜 그녀를 품 안으로 끌어 들였다. 남편의 품에 몸을 기댄 채 거의 안기다시피 한 그녀가 헐떡였다.

“괜찮아, 헤레이스. 숨 쉬어.”

“하으…… 흡…….”

“그래. 그렇게. 천천히 들이쉬고…… 그래, 내쉬고.”

이즈카엘이 품속의 아내를 한동안 달랬다. 그의 부드러운 손길과 목소리에 헤레이스는 느리지만 서서히 숨을 되찾았다.

“이제 좀 괜찮아?”

고른 숨소리와 함께 헤레이스가 얼굴을 들어 올렸다.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에 눈물이 맺혀 있었다. 이즈카엘이 아내의 얼굴색을 살피다 그녀의 뺨을 가로지르는 눈물을 닦아 줬다.

“미안해. 당신이 이렇게까지 힘들어할 줄 몰랐어. 난 그저 당신이 원하면…….”

“……보고 싶어요.”

“…….”

“오, 오빠를 보고…… 흐읍…… 싶어요.”

“…….”

“하지만 그것 때문에 당신이 위험해지는 건 싫어요. 혹시 모르잖아요. 폐하께 알려지기라도 하면…….”

대롱대롱하던 눈물이 다시 떨어졌다. 이즈카엘은 제 손등을 적시는 아내의 얼굴에 괴로운 낯을 했다. 사랑스러운 그의 아내는 눈물을 펑펑 쏟으면서도 그를 걱정했다.

“……괜찮아, 헤레이스. 그건 당신이 걱정할 일이 아니야. 내가 감당할 일이지.”

참지 못한 이즈카엘이 아내의 눈가에 잘게 입을 맞췄다. 눈물과 함께 그녀의 슬픔을 모조리 마셔 버리고 싶었다. 갑작스러운 이즈카엘의 입맞춤에 헤레이스가 그의 품에서 바르작거렸다. 이즈카엘이 아내를 안고 있는 손에 더욱 힘을 주며 말을 이었다.

“당신이 할 일은 의사를 표명하는 것뿐이야. 그리고 당신은 이미 그걸 해냈지. 잘했어.”

“…….”

“내가 당신 오라비를 불러올게. 또한 당신이 원하면 당신 시녀도 데려올 거야.”

계속되는 입맞춤에 헤레이스가 숨을 내쉬며 힘을 풀었다. 이즈카엘은 그 후로도 제가 하고픈 대로 아내의 눈두덩에 마음껏 입맞춤했다.

축축했던 눈가가 어느새 제 모습을 찾았다. 헤레이스는 제 눈물을 가져간 이즈카엘의 입술을 손가락으로 가만히 쓸다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안나는 그 아이 남편과 함께 성으로 초대하는 게 어때요?”

“…….”

아내의 이해 못 할 말에 이즈카엘은 물음 대신 침묵을 택했다. 찰나였지만 그는 보았다. 아내의 눈에 그려진 거짓을. 아내는 안나가 이곳에서 매질을 당한 후 쫓겨난 일을 다른 기억으로 탈바꿈한 듯싶었다. 이즈카엘은 침묵을 유지하며 제 예상이 맞는지 신중히 확인하기 시작했다.

“당신 기사…… 그래, 폴 경! 쉬운 이름인데 매번 잊어버리네요.”

“…….”

“종자일 때부터 안나를 따라다니더니 결국은 마음을 얻었죠. 하긴 안나도 말로만 어린애라 했지, 폴 경을 싫어하는 낌새는 아니었어요.”

“…….”

“신혼이라 떨어지고 싶지도 않을 텐데. 부를 거면 두 사람을 같이 초대해요. 응?”

“……당신 뜻대로 할게.”

아내의 말에서 기억의 조각이 어떻게 잘못 끼워져 있는지를 대강 짐작한 이즈카엘이 간사한 제 머리를 굴렸다. 폴…… 이제는 어엿한 기사로 자라난 에드가의 종자.

마침 폴은 크리스와 안나를 찾으러 간 참이었다. 그와 아내의 오라비, 그리고 아내의 시녀가 돌아오기 전에 아내의 기억대로 이야기를 완벽히 꾸며 놔야지. 이즈카엘이 입매를 굳히며 머릿속으로 빠르게 계획을 세웠다.

‘조금의 실수도 없어야 해.’

그 계획이 완벽에 가까워질수록 눌러 왔던 죄책감이 머리를 들었다. 이즈카엘은 아내를 기만하는 자신에게 모멸감을 느끼며 지독히 쓴 입 안을 아내의 이름으로 털어 냈다.

“헤레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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