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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목을 꺾는 악마여-91화 (91/108)

91화.

얼굴을 잔뜩 굳힌 그것은 달려오기라도 한 모양인지 거칠게 숨을 내쉬고 있었다. 그것이 이즈카엘의 손을 노려보며 물었다.

“……그거 어디서 났어?”

그것의 무시무시한 표정을 보는 순간 이즈카엘은 확신했다. 제 손안에 들린 물건이 진짜라고. 그가 자신의 손을 살짝 펴 그것에게 하얀 보석을 보였다.

“날 없애려고? 할 수 있겠어?”

그것이 보석을 보자마자 한 발 뒤로 물러났다. 잔뜩 경계하는 모습에서는 평소와 같은 여유가 없었다.

이즈카엘이 몸을 일으켜 그것의 앞에 섰다. 그리고 당장에라도 보석을 앞으로 내던질 듯 팔에 힘을 줬다.

“할 수만 있다면.”

“……어제 그녀가 네게 사랑한다고 속삭인 게 누구 덕인지 잊지 마. 날 없애면 그녀의 속삭임도, 온기도 네 곁에서 사라질 거야.”

“표정을 숨기지도 않는 걸 보니 어지간히 두려운 모양이군. 네놈이 이리 나오니 더 마음이 기울어.”

이즈카엘은 처음으로 그것의 앞에서 조소를 흘렸다. 물건 따위로 승기를 잡았다는 사실이 마음에 들지는 않았으나 질 낮은 승리감에 잠깐 도취하기에는 충분했다.

분한 얼굴로 입술을 씰룩거리던 그것이 한 걸음 더 물러서려다 이즈카엘의 말에 멈췄다. 창백한 얼굴에 내려앉은 그림자가 어딘가 스산했다.

“그래. 어디 네 마음대로 해 봐.”

두려움을 이겨 냈다는 행동거지와 달리 그것은 계속해서 이즈카엘의 손에 들린 보석을 힐끔거리고 있었다. 하얀 보석은 그것의 눈이 닿을 때마다 작게나마 번쩍이며 투명하게 변했다. 그것은 보석이 투명해질 때마다 몸을 움찔거리다가 가까스로 말을 이었다.

“나는 너를 누구보다 잘 알아, 이즈카엘. 어쩌면 너 자신보다 더 잘 알겠지. 내가 전에 말했지. 네 속이 훤히 들여다보인다고.”

“…….”

“넌 결코 날 없앨 수 없어. 이미 결정했잖아. 지금에서 벗어나지 않기로.”

말을 마친 그것은 호흡이 틀어막아진 듯 가쁜 숨을 내쉬었다. 이즈카엘은 바짝 마른 그것의 입술을 보다 한참 만에 답했다. 그늘이 잔뜩 져 음울한 그의 얼굴에는 체념과 스스로에 대한 경멸, 그리고 약간의 갈등 등 온갖 감정이 뒤섞여 있었다.

“……그래. 네놈 말이 맞아. 난 지금 상황을 바꿀 생각이 없어.”

이즈카엘은 지난밤을 헤레이스와 보내며 이미 속으로 결정을 내린 상태였다. 아내와 자신은 지금처럼 살아가기로.

‘미안해, 헤레이스.’

아내를 기만하고 있다는 죄책감과 함께, 언제고 그녀가 거짓 속에서 벗어날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그를 벼랑으로 내몰았다. 그녀가 모든 것을 알게 된다면…… 자신을 용서치 못했던 이인데 또 기만을 당했다 깨달으면…….

그럼에도 이즈카엘은 헤레이스의 그 애정 어린 표정과 말, 그리고 그녀가 제게 선사하는 당장의 환희를 포기할 수 없었다. 아내가 제게 주는 달콤함, 그것에 취한 그는 아내의 고통을 핑계로 그녀의 거짓된 세상에 동조하기로 했다.

“헤레이스, 내 아내는 지금 이대로 행복하게 지낼 거야.”

이즈카엘의 말에 그것이 그럼 그렇지 하는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이즈카엘은 조소하는 그것의 얼굴에 입술을 물었으나 구태여 말로써 그것에게 반박하지는 않았다. 스스로 생각해도 그는 경멸받아 마땅한 인간이었으니.

하지만 그는 이미 결정을 했고 돌이킬 생각은 없었다.

‘지옥에나 떨어져 버리라지.’

자신을 욕한 이즈카엘이 날카로운 시선을 아래로 내려 그것을 똑바로 주시했다. 서늘한 얼굴과 함께 그의 목에서 나온 고압적인 목소리가 방 안 분위기를 흉흉하게 만들었다.

“네놈이 말하는 가족 놀이에 동참하지.”

“……”

“하지만 이것도 알아 둬. 네가 허튼수작을 부리는 순간, 내가 어찌 행동할지는 장담 못 해. 그러니 징그러운 괴물아.”

“…….”

“내 아내를 괴롭힐 생각은 마. 너 따위 인간도 아닌 것 때문에 어제처럼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나면 이것을 당장에라도 던져 버릴 테니까.”

“으윽!”

이즈카엘이 말을 뱉으며 그것의 가까이에 보석을 쥔 손을 가져다 댔다. 그것이 거의 경기를 일으키듯 몸을 물리더니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이즈카엘을 노려봤다. 이즈카엘의 손이 살짝 닿은 어깨 부근은 그새 타들어 간 듯 검게 그을려 있었다.

그것의 어깨를 타고 검은 무언가가 피처럼 뚝뚝 떨어졌다. 그것이 스스로의 어깨를 꽉 쥐고서는 고통에 허덕이며 긴 혀를 숨기지 않은 채 내밀었다. 호박색 눈동자는 그새 두 개에서 네 개로 수를 늘린 후였다.

“……이즈카엘. 이기적인 내 아버지. 내 형제야. 네 선택을 존중한다. 하지만 넌 영영 구원받을 수 없을 것이다.”

뱀의 숨소리가 새어 나온다 싶더니 스산한 목소리가 공간을 울렸다. 보통 이들이라면 기겁을 하고 도망칠 모습이었지만 그것에게 익숙해진 이즈카엘은 제자리에서 여전히 싸늘한 얼굴을 할 뿐이었다. 그것이 비늘마저 세운 채 검고 날카로운 손톱으로 이즈카엘을 가리켰다.

“천 번 만 번 거짓된 용서를 빌어 보렴. 무릎이 닳도록 그녀의 앞에 꿇고 눈물을 쏟아 봐. 그래 봤자 거짓을 택한 넌…….”

신화 속 악신이 제게 덤빈 인간에게 피할 수 없는 저주를 내리는 모양새였다.

화창했던 하늘이 급격한 속도로 어두워졌다. 성 밖 사용인들이 무어라 고함치며 분주히 움직이는 소리가 났다. 멀리서 먹구름 사이로 번쩍이는 번개가 보이고, 바람에 의해 날아온 것으로 보이는 빨랫감들이 집무실 밖 잿빛 하늘 위로 치솟았다.

“……그녀에게 결코 용서받지 못할 거야.”

창밖이 밤처럼 흐려지며 방 안에 섬뜩한 분위기가 가득 찼다. 말을 마친 그것이 두 쌍의 호박색 눈을 징그럽게 뒤룩거렸다. 가만히 그 꼴을 보던 이즈카엘이 콰르릉 가까워진 천둥에도 눈 하나 깜빡이지 않은 채 허리를 굽혔다. 그것보다 더한 괴물의 얼굴이 어둠 속에서 빛났다.

“……이미 알아. 그러니 입 다물어.”

이즈카엘의 목소리가 그것의 귀에 닿음과 동시에 번개가 성에 내리 꽂혔다. 커다란 진동에 지축이 울며 성 전체가 흔들렸다. 그리고 곧이어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소나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 * *

북부의 짧은 여름이 끝을 내달리고 있었다. 이즈카엘은 카우치에 앉아 수를 놓고 있는 헤레이스의 뒤로 천천히 다가갔다.

그의 아내는 가장자리에 자잘한 레이스가 잔뜩 달린 연노란색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자칫 촌스러울 수 있는 조합이었지만 아름다운 자신의 아내가 입고 있으니, 누구보다 화사하게 보였다. 이즈카엘은 눈이 부시다 생각하며 허리를 숙여 아내의 목덜미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

“힘이 없어 보여. 무슨 일 있어?”

틀어 올린 머리카락 덕에 드러난 목덜미는 새하얗다 못해 투명했다. 헤레이스는 예민한 피부에 뜨거운 감촉이 갑자기 닿았음에도 크게 놀라지 않았다. 제 뒤에 선 이가 이즈카엘임을 짐작한 듯 그녀는 가만히 고개만 저었다.

“……아니에요. 아무 일도 없어요.”

“헤레이스.”

이즈카엘이 부정하는 아내를 나지막한 목소리로 불렀다. 그의 손이 조금 전 입을 맞춤 헤레이스의 목에 닿는가 싶더니, 어느새 작은 얼굴을 쥐었다. 사내의 손길에 따라 머리를 천천히 뒤로 젖힌 헤레이스가 집요한 호박색 눈에 한숨을 쉬며 말했다.

“우리 아들이 나한테 화가 난 거 같아요.”

펑펑 울며 이즈카엘에게 속마음을 털어놓은 날 이후 헤레이스는 활기를 되찾았다. 죄책감을 지우고 마음의 평온을 되찾은 그녀는 아들의 눈을 똑바로 마주 보며 사랑한다 말했다.

‘사랑해, 우리 아들. 엄마한테 뽀뽀해 줄래?’

‘싫어.’

‘응? 우리 아들이 왜 이럴까. 엄마한테 화난 거 있어?’

‘엄마는 내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 내가 엄마한테 유일한 존재야?’

‘그럼. 엄마는 우리 아들이 제일 좋지.’

‘그럼 아버지랑 나랑 비교하면 어때? 아버지랑 비교해도 내가 제일 소중해?’

하지만 아이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전보다 더 골을 내며 유치한 물음을 계속했다. 어미에 대한 아이의 독점욕이라고 웃어넘기며 고개를 끄덕일 수도 있었지만 헤레이스는 아이의 질문에 저도 모르게 멈칫거렸다. 그리고 그럴 때면 아이는 나이에 맞지 않게 스산한 얼굴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엄마가 잠시 다른 생각을 했어. 미안해. 당연히 우리 아들이 제일 소중하지. 그러니까 토라지지 말고 엄마랑…….’

‘……엄마 보기 싫어.’

‘…….’

‘나가. 혼자 있을 거야.’

아이들이 흔히 보이는 귀여운 토라짐과는 사뭇 다른 반응. 간신히 지웠던 죄책감이 다시 고개를 들기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갑자기 심술이 늘었어요. 말도 하지 않고 밥도 잘 먹지 않아요. 나랑 보는 것도 피하는 것 같고요.”

작게 응어리진 목소리에는 염려가 가득했다. 이즈카엘은 당장에라도 눈물을 매달 것같이 촉촉한 아내의 푸른 눈을 응시하다 그녀의 입술에 위로하듯 부드러운 입맞춤을 했다. 그 손길이 익숙한 듯 헤레이스가 자연스레 입맞춤을 받고는 말을 이었다.

“으음…… 내가 얼마 전 투정을 부린 게 아이한테도 영향을 준 거 같아요. 사실 여러 번 물었거든요. 자기를 사랑하냐고.”

“…….”

“아직 어린데 그런 질문을 하다니…… 내가 부족했나 봐요.”

이즈카엘은 속으로 그것에게 욕지거리했다. 경고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아내를 힘들게 하고 있었다. 게다가 아내에게 자신을 사랑하느냐고 물었다니. 감히라는 생각과 함께 그의 기민한 육감이 불길함을 감지했다.

“아니야, 헤레이스. 당신은 잘못한 게 없어. 지금도 그…… 아이한테 충분히 과한 관심을 주고 있는걸.”

“하지만…….”

“너무 신경 쓰지 마. 아이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난 당신 몸이 걱정인데.”

이즈카엘이 불편한 속내를 감춘 채 화제를 돌렸다. 헤레이스가 불만 가득한 얼굴로 그를 쳐다봤다. 이즈카엘은 모른 척 아내의 도드라진 빗장뼈를 쓰다듬을 뿐이었다.

“헤레이스 당신은 너무 가늘어. 이러다 바람에 당신이 날아가 버리면 어떡하지? 내가 닿을 수 없는 곳으로 가 버리면?”

“이즈카엘, 지금 무슨…… 난 심각한 이야기 중이라고요.”

“…….”

“우리 아이에 대한 거잖아요. 좀 진지하게 받아들일 수 없어요?”

헤레이스가 제 몸을 건드리는 이즈카엘의 손을 쳐 냈다. 날카로운 목소리가 제법 냉랭했다. 하지만…….

‘당신은 자격이 없어요, 이즈카엘.’

……공허했던 그때와 달리 푸른 눈에는 따뜻한 감정이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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