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목을 꺾는 악마여-90화 (90/108)

90화.

“왜…….”

헤레이스의 눈가에 커다란 손이 닿는가 싶더니 남은 눈물을 모조리 닦아 냈다. 그가 울먹이는 헤레이스보다 더 섧은 목소리로 물었다.

“……왜 울고 있어.”

“이즈카엘, 나는 어미가 될 자격도 없어요. 난…?….”

“…….”

“우리 아들이…… 이상하게 우리 아들을 보기가 힘이…… 흐윽. 힘이 들어요. 나는……그 아이를 사랑하지 않는 거 같아요.”

이즈카엘은 엉엉 우는 아내를 제 품에 꼭 껴안은 채 입술을 물었다. 내색하지 않으려 했지만 파르르 떨리는 입술을 참아 내기가 어려웠다.

“분, 분명 사랑스러운 아이인데…… 내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당, 당신과 나 사이에서 태어난…… 흑.”

“…….”

“축복, 축복받은 아이인데…….”

아내는 쓸데없는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었다. 아내가 아들로 보는 그것이 무엇인지 아는 이즈카엘은 소리치고 싶었다. 그것은 우리 아들이 아니라고. 그러니 당신의 반응은 당연한 거라고.

하지만 할 수 없지 않나. 아내에게 모든 진실을 일러 주면…… 그의 죄악과 그로 인한 결과를 알게 되면 아내는 지금보다 더 괴로워할 터였다. 그리하여 이즈카엘은 아내를 꼭 껴안은 채 침묵했다.

“나는 여신께 벌을 받을 거예요. 이렇게 화목하고 따뜻한 가정을 제게 주셨는데…… 내가 가진 게 얼마나 큰지 모르고…….”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 채 그에게 화목한 가정을 말하는 아내. 이즈카엘은 헤레이스의 말에 자신의 손으로 망친 그들의 미래를 또다시 떠올렸다.

“헤레이스.”

진짜 에르젠을 품에 안아 든 아내는 이따위 쓸데없는 죄책감을 가지지 않았을 터였다. 에르젠은 그녀의 진짜 아이니까. 그녀가 에르젠을 사랑하지 않는 일은 없었을 테니까.

“……당신은 잘못한 게 하나도 없어.”

그가 준 감당하지 못할 고통 때문에 거짓으로 도망친 아내였다. 그러나 이즈카엘의 죄는 기억을 버린 아내마저 쫓아가 그녀를 괴롭게 하고 있었다.

“모든 건 나, 내가…… 내가 잘못한 거야.”

이즈카엘은 이 상황에 괴로움을 느끼는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었다. 내가 뭔데 괴로워하나. 모든 일을 저지른 주제에…….

죄악과 그에서 파생된 죄책감이 거대한 성이 돼 그를 깔아뭉갰지만, 괴롭다 한들 이 상황을 없애고 싶지는 않았다. 울면서도 제 눈을 또렷이 마주하는 아내. 그의 손길을, 입술을 피하지 않는 아내. 그에게 자연스럽게 안기고 너무도 편히 그를 만지는 아내. 이를 어찌 포기할 수 있을까.

“미안해. 내가 미안해. 헤레이스, 내가…….”

그리하여 이즈카엘은 아내에게 머리를 조아리고 사죄만 했다. 아내의 온기를 오롯이 느끼며 그녀를 또 한 번 기만했다. 진실을 알림으로써 아내가 가진 죄책감을 지워 줄 수 있음에도 그리하지 않았다.

계속되는 그의 사죄에 아무것도 모르는 헤레이스의 눈동자에는 당혹감이 서렸다가 이내 사라졌다. 그의 사죄를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그녀는 살포시 눈웃음을 지었다. 접힌 눈에 그렁그렁 맺혀 있던 눈물이 툭 떨어졌다.

“……당신은 참 따뜻해요, 이즈카엘.”

헤레이스가 이즈카엘의 품을 더 파고들었다. 고개를 들어 그의 목에 잘게 입맞춤하는 모양새가 발칙했지만 헤레이스는 낯부끄러운 행동을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는 침대에 앉아 있던 남편의 몸을 밀며 함께 넘어가기까지 했다.

“당신 품에 있으면 언제나 보호받는 기분이야.”

헤레이스는 양손으로 이즈카엘의 얼굴을 붙잡았다. 이즈카엘은 아내의 손길에 어떤 말도, 행동도 하지 못한 채 가만히 있었다. 그를 바라보는 푸른 눈에는 애정과 신뢰가 넘실거리다 못해 흘러넘쳤다.

“나는 당신이 이런 나한테 실망할 거라 생각했는데…… 쓸데없는 걱정이었어요.”

헤레이스가 이즈카엘의 뺨을 여러 번 쓰다듬다 그의 턱에 이마를 대고 눈을 감았다. 울며 말을 할 때와 달리 느릿해진 목소리가 안도감에 가득 차 있었다.

그녀의 오른손이 천천히 아래로 내려가더니 이즈카엘의 셔츠 밑을 파고들었다. 왼편 아래 피부에 따뜻한 손이 닿자 심장이 여러 의미로 거세게 흔들렸다.

“나도…… 나도 당신한테 그렇게 할게요. 이즈카엘 당신이 내게 오롯한 사랑을 주는 것처럼 나도 그렇게 당신을 사랑할게요.”

아내의 목소리에 이즈카엘은 다시 한번 깨달았다. 자신이 망쳐 버린 것이 무엇인지. 사내의 목울대가 거칠게 요동쳤다.

“……고마워요. 그리고 사랑해요, 이즈카엘.”

거짓 속을 헤매는 아내는 앞으로도 이즈카엘의 눈앞에 그가 망가뜨린 미래를 그려 낼 터였다. 그에게 사랑을 속삭이고 지금처럼 손을 내밀겠지.

그리고 그런 아내를 보며 그는 매 순간 제가 짓뭉갠 지난 과거와 앞으로의 미래를 깨우칠 것이다. 진정으로 이루어 낼 수 있는 것이었는데 제 손으로 어그러뜨렸다고 자책하면서.

일종의 벌이었다. 신화 속 닿지 않는 사과와 물에 계속해서 손을 뻗는 죄인처럼 이즈카엘은 자신이 저지른 죄에 대한 징벌을 받는 중이었다.

“……나도.”

하지만 벌이라 해도 괜찮았다. 지금의 아내가 망각에 눈이 가려져 거짓을 속삭인다 한들 어떠리. 그녀가 제게 사랑을 속삭이는 순간이 이렇게 달콤한데. 이즈카엘은 찰나를 위해 영원을 희생할 각오가 있었다.

“나도 사랑해, 헤레이스.”

사랑을 속삭이자 헤레이스가 그를 꽉 안았다. 이즈카엘은 가는 아내의 허리를 마주 안으며 눈을 감았다.

그래. 어떤 모습이든 아내가 제 곁에 있다면 영원히 자책 속에서 헤맨다 해도 그는 견딜 수 있었다.

* * *

‘일어났어요? 좋은 아침이에요.’

아침을 함께 맞이한 헤레이스는 전날보다 훨씬 생기가 있었다. 이즈카엘은 제게 짧은 입맞춤을 하고는 아이를 깨우러 간다며 침실을 나선 아내를 떠올렸다.

‘헤레이스, 아이 보기가 힘들면 당분간 유모에게…….’

‘아뇨. 이제 괜찮아요.’

‘…….’

‘당신을 보니 알겠어요. 내가 한 말은 투정일 뿐이었어요.’

‘…….’

‘이렇게 따뜻한 당신과 나 사이에서 난 아이잖아요. 내가 당신의 반을 타고난 우리 아들을 사랑하지 않을 리 없어요.’

간밤을 그와 보낸 헤레이스는 자신이 아이를 사랑한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아이의 정체를 아는 이즈카엘로서는 내심 그녀가 계속 그것을 저어하고 멀리해 주길 바랐다. 하지만 그에게는 그녀를 만류할 마땅한 방법이 없었다.

이즈카엘은 아내를 보내고 무거운 걸음을 옮겨 집무실에 도착할 때까지 무력한 자신에게 수없이 욕설을 지껄였다. 하나 스스로에 대한 책망은 이른 아침부터 그를 찾아온 제임스로 인해 끝이 났다. 이즈카엘은 제게 주어진 새로운 선택지에 해가 서쪽으로 기울어진 현재까지 갈등을 하고 있었다.

‘이것이라면 그 징그러운 것을 없애 버릴 수 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헤레이스가 기억을 찾고 전으로 돌아온다면…….’

감았던 눈을 뜬 이즈카엘은 집무실 책상 정중앙에 올려진 하얀 보석을 빤히 바라봤다. 반으로 깨진 눈 결정과 똑같지만 크기 때문인지 더욱 차가운 느낌. 무슨 수를 써서라도 가져오라 말했지만 이리 빨리 구해 올 줄은 몰랐다.

‘어렵다고 말하더니 벌써 구해 왔다라…… 가짜를 가지고 왔다고 믿어야 하나?’

‘아니, 저도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아는 대로 설명해.’

‘그게…… 교황께서 마침 북부와 가까운 신전에 머물고 계셔 그리로 사람을 보냈는데…….’

‘…….’

‘……수하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교황께서 먼저 말을 거시며 이것과 편지를 각하께 전해 달라 말씀하셨답니다.’

이즈카엘은 작금 교황의 얼굴조차 본 적이 없었다. 황제의 곁에 있을 때는 전대 교황이 살아 있을 때였고, 지금의 교황이 몇 년 전 즉위했을 때는 막 신혼을 즐기던 터라 교황에게 관심조차 두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새로이 교황이 된 이가 마녀를 물리치고 이것을 얻은 14대 교황과 마찬가지로 장님에다 그에 못지않은 신성을 타고난 이라지.’

그런데 저와 마주 본 적도 없는 이가 내민 호의라니. 구하던 것을 편히 얻었다는 기쁨보다는 의심이 먼저 드는 것이 당연했다. 하지만 급했기에 그는 곧바로 자신의 피를 떨어뜨려 보았다. 피가 닿자마자 피어오르는 연기…… 눈앞의 보석은 그가 찾는 것이 맞았다.

이즈카엘은 보석을 손에 쥐고 만지작거리다 조심스레 내려놨다. 그러고는 교황의 인장이 찍힌 서신을 뜯었다. 본래라면 물건을 받았을 때 서신을 바로 확인하는 것이 옳았다. 그러나 보석의 진위 여부가 우선인 데다 어딘가 탐탁지 않은 기분에 그는 교황의 서신을 반나절 이상 내버려 뒀다.

‘쓸데없이…….’

교황이 직접 적은 서신이라 그런지 고급스러운 종이 위에는 신성력이 잔뜩 묻어나 있었다. 이즈카엘은 은은하게 빛나는 편지에 후대에는 이조차 성물이 되겠다며 조소했다.

[유품은 고인을 해한 신전의 사내보다는 존속이 가지는 게 옳지요. 신께서도 허락하셨으니 돌려주지 않으셔도 됩니다. 다만…….]

편지를 몇 줄 읽어 내려간 이즈카엘은 신전의 사내와 존속이라는 단어에 잠깐 멈칫했다. 신전의 사내라……. 신전은 여신께 봉사하는 인간에게 성별의 구분은 의미가 없다 하여 여인이나 사내라는 말은 잘 쓰지 않았다. 게다가 존속이라니, 이 무슨 수수께끼 같은 말인가.

[……이걸 어떻게 쓸지는 그대에게 달렸습니다. 어디에 사용하든 부디 옳은 선택을 하기를. 눈의 아이여, 그대와 반려 두 사람에게 여신의 축복을 빕니다.]

교황의 필체는 각이 져 있지 않아 전체적으로 부드러운 인상을 줬다. 유려한 교황의 필체에도 불구하고 이즈카엘은 모든 일을 안다는 듯이 적혀 있는 서신의 내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은발과 같은 색의 눈썹이 한 차례 꿈틀거리다 제자리를 찾았다.

‘……감히 뭘 안다고 이따위 태도인가.’

이즈카엘이 종이 맨 아래에 교황의 서명을 보고는 서신을 소리 나게 내려놨다. 구겨진 서신의 아랫부분이 그의 심기가 불편함을 보여 줬다.

서신을 책상에 아무렇게나 던진 이즈카엘이 보석을 다시 손에 쥐었다. 그러자 더운 날씨에도 얼음을 쥔 것처럼 시린 감각이 팔을 타고 온몸으로 퍼졌다.

이즈카엘은 몸을 파고드는 삭기를 견디며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 그의 시야가 아주 찰나 차단됐다가 다시 돌아왔을 때, 이즈카엘의 눈앞에는 원치 않는 손님이 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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