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아흑…….”
견디지 못한 헤레이스가 하녀를 부르기 위해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그녀가 침대 밖으로 한 발짝 내딛으려던 찰나 아이가 그녀의 손목을 꽉 잡았다. 다섯 살밖에 되지 않는 아이의 손인데, 도무지 떼어 낼 수 없었다.
“엄마, 어디 아파?”
“아, 아냐. 엄마 괜찮아.”
어미의 신음에도 아이는 동요하지 않았다. 그러나 어지러운 시야 때문에 아들이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모르는 헤레이스는 제 팔목을 잡은 아들을 향해 손을 뻗었다. 걱정시키지 말아야지. 눈물이 많은 아이니까.
“정말 괜찮…….”
“엄마.”
헤레이스가 가까스로 아들을 품에 안았을 때였다. 그녀의 품에 박히듯 안긴 아이가 기다란 혀를 날름거렸다.
붉은 혀는 바닥을 기는 뱀보다도 길었다. 헤레이스의 팔을 타고 오른 그것이 쉭쉭 뱀 같은 소리를 내더니 그녀의 귓바퀴를 감았다. 그리고 소름 끼치는 감각에 눈조차 깜빡이지 못하는 헤레이스에게 물었다.
“……왜 날 이름으로 부르지 않아?”
“아…….”
아들의 물음을 인지한 순간 무언가 헤레이스의 머리를 내리쳤다. 그녀가 제대로 된 신음조차 내지르지 못한 채 몸을 옆으로 꼬꾸라뜨렸다. 무너지는 어미의 품에서 그것이 대가리를 꼿꼿하게 들며 분기 어린 음성으로 재차 추궁했다.
“내 이름이 뭐야?”
하지만 이미 까무룩 정신을 잃은 어미가 대답할 수 있을 리 없었다.
* * *
제 분을 이기지 못해 씩씩거리던 그것이 한참 만에 몸을 숙여 헤레이스의 눈과 귀에 뱀의 타액을 발랐다. 그녀의 시야를 차단하고 있던 욕망이 빠져나간다면 아들 노릇도 끝이었다.
더러운 뱀의 타액은 살아 있는 것처럼 움직이더니 검은 실로 변해 헤레이스의 눈과 귀로 향했다. 그것은 검은 실들이 뭉텅이져 잘 자리를 잡았는지 확인하고 헤레이스를 쏘아봤다.
‘……기분 나빠.’
제가 벌인 일을 수습하면서도 그것은 기분이 상해 어찌할 바를 몰랐다. 화가 나고 울분이 찼다. 그리하여 그것은 제 옆에 쓰러진 헤레이스를 작은 아이의 손으로 꼬집고 할퀴었다.
‘불쾌해.’
왜 이리 분노가 치미는지 알 수 없었다. 아니, 제 감정인데 모를 리가. 사실 그것은 제 불쾌감이 어디서 오는지 똑똑히 인지하고 있었다.
‘짜증 나.’
그는 죽어 버린 아이, 그래 한때 동생이기도 했던 에르젠을 연기하고 있는 상황 자체가 몹시 탐탁지 않았다. 그리하자며 그녀에게 먼저 속살거린 것이 자신임에도 불구하고.
‘……그깟 이름이 뭐라고.’
게다가 기껏 아들 노릇을 해 주고 있는데 여자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자신과 계약을 한 뒤 제 아들의 이름을 단 한 번도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분명 에르젠으로 보고는 있을 터인데……. 어떤 선이라도 지키듯 이름을 뱉지 않는 헤레이스의 모습에 그것의 가느다란 인내심은 어느새 바닥났다.
‘인간 주제에.’
하기 싫은 일을 하는데 방향마저 제 뜻대로 안 되는 꼴이니 당연히 화가 날 수밖에. 결국 참지 못한 그것의 호박색 눈동자가 한 쌍에서 두 쌍으로 순식간에 늘어났다.
‘피라도 마셔야겠어.’
손톱마저 세운 그것이 헤레이스의 피부를 당장에라도 찢어발길 듯 손을 뻗었다가 멈칫했다. 막상 살을 파내려 하니 아이의 손으로 꼬집고 할퀴었던 자국이 눈에 들어왔다. 흰 피부는 어찌나 약한지 아이의 손에도 쉽사리 상처가 나 이미 붉게 변해 있었다.
‘……알 게 뭐야.’
그것이 작게 욕지거리를 하며 팔을 높게 들어 올렸다. 하지만 올라간 팔은 허공에 멈췄다가 이내 내려왔다. 맹금류의 발톱 같았던 손톱이 어느새 자취를 감추고 그것은 한낱 인간 아이로 돌아와 어미를 뚫어져라 봤다.
끓었던 분은 그새 사라져 있었다. 아이가 헤레이스의 피부에 난 상처를 가만히 쓸었다. 그러자 검은 무언가가 헤레이스의 피부를 엷게 덮는다 싶더니 신기하게도 상처가 모조리 사라졌다.
어딘가 지쳐 보이는 아이가 어미와 마찬가지로 모로 누웠다. 얼굴을 거꾸로 마주 보는 모자의 형상은 위에서 보면 둥근 것이 제법 그럴 듯해 보였다. 감긴 헤레이스의 눈꺼풀에 손을 뻗은 아이가 어미를 따라 스르르 눈을 감으며 중얼거렸다.
“……난 엄마 아들이야.”
* * *
깊은 낮잠은 아주 달콤했다. 헤레이스는 아무것도 기억 못 하는 낮잠에서 깨어나 눈을 깜빡였다.
아들이 그녀의 품에 안겨 쌕쌕 숨소리를 내고 있었다. 헤레이스가 사랑스러운 아이의 머리카락 사이로 손을 넣었다. 손가락 사이로 남편과 같이 밝게 빛나는 은발이…….
‘어?’
헤레이스가 놀라 눈을 깜빡였다. 그러자 환한 빛의 머리카락이 그녀와 같은 검은색으로 돌아와 있었다.
‘……커튼을 치지 않아 빛이 들어오는 모양이지.’
헤레이스는 제 착각이 빛의 장난에서 기인했다 생각하며 고개를 창가로 돌렸다. 하지만 그녀가 깊은 낮잠에 헤매는 사이 해는 이미 떨어져 몸을 숨긴 뒤였다.
헤레이스가 컴컴한 밖을 보며 입술을 부르르 떨었다. 그리고 그새 눈을 뜬 아이가 그런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다.
* * *
“……차가 너무 진해. 역해서 도저히 마실 수가 없어.”
“죄송합니다.”
“벌써 몇 번째…… 아니야. 됐으니 나가 보렴. 쉬고 싶구나.”
달콤한 낮잠 이후 헤레이스는 점차 예민해졌다. 그녀는 전과 달리 사소한 일에도 짜증을 부렸으며 하녀들에게 답지 않게 소리를 높이기도 했다. 안 그러던 상전이 갑작스레 까탈스러워지자 사용인들은 긴장한 채 발걸음 소리조차 줄였다.
“엄마!”
“우리 아들, 왔어?”
“……엄마, 어디 아파?”
“아니야.”
신경이 곤두선 와중에도 헤레이스는 아들에게만은 다정한 어미였다. 그녀는 지끈거리는 머리와 불안히 뛰는 심장에 괴로워하면서도 아이를 대하는 태도만은 여전히 부드러움을 고수했다.
“엄마.”
“응?”
“엄마는 날 사랑해?”
어미의 다정함이 흘러넘침에도 아이는 언젠가부터 헤레이스에게 자신을 사랑하냐는 질문을 자주 하기 시작했다. 헤레이스는 그럴 때마다 한껏 미소를 지으며 일말의 망설임 없이 그렇다고 대답했다.
“물론. 엄마는 우리 아들을 사랑해.”
“정말?”
하지만 아이는 날이 갈수록 만족스럽지 않은 낯으로 반문했으며 헤레이스 또한 아이의 물음이 어느 순간부터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내가 왜 이러지?’
심장 어귀에 쌓인 감정은 며칠 새 벌레가 돼 그녀의 정신을 좀먹어 가고 있었다. 헤레이스는 아이에게 웃으며 답해 줄 때마다 거짓을 말하는 듯한 기분에 휩싸였다.
그리고 달콤한 낮잠에서 깨어난 지 엿새 되던 날, 헤레이스는 욕탕에 홀로 앉아 있다가 자신에게 무심코 묻고 말았다.
‘……나는 내 아이를 사랑하지 않는 게 아닐까?’
스스로 질문을 던진 주제에 그녀는 욕탕 물이 식을 때까지 오열했다. 어미로서 아이에 대해 그런 의문을 갖는 자신이 너무 한심하고 역겨웠다. 커다란 죄책감이 그녀를 아래로 뭉개 버릴 듯 짓눌렸다.
그녀의 울음소리에 놀란 헬렌이 다른 하녀들과 함께 그녀를 욕탕에서 꺼내 침실로 인도했다. 누군가 그녀에게 옷을 입히고 미지근한 차를 내줬다. 하지만 헤레이스는 침대에 누울 때까지 눈물을 멈추지 않았다.
왜 아이가 전처럼 사랑스럽지 않은가. 분명 기억 속 아이는 그렇게나 사랑스러운데. 헤레이스는 아들과의 추억을 하나하나 되새겨 봤다.
몇 번을 곱씹어도 아이와의 추억은 분명 하나같이 행복한 것이었다. 젖을 물리고, 재우고, 처음으로 엄마라는 말을 듣고…….
‘우리 아들…… 지금은 우리 품에 있지만 언젠가는 떠나겠지요?’
‘한참 후의 일이야. 지금은 우리 두 사람 사이에 콕 끼어 있는데, 뭘.’
‘……아이들은 금방 자란다잖아요. 아직은 작지만 우리 아들도 금세 커서 이 방을 떠날 거예요.’
‘난 그날이 빨리 왔으면 좋겠는데. 그래야 전처럼 헤레이스 당신하고 꼭 붙어 있지.’
‘내가 이렇게 진지하게 말하는데! 이즈카엘 당신은!’
특히 남편과 단 둘이서만 썼던 침대에 아이를 눕히고 처음으로 셋이 잠든 날, 그날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온몸에 따스함이 차올랐다.
하지만 추억에 잠겨 잠시 허우적대고 나면 기이한 허탈감과 함께 짙은 쓴맛이 입 안에 돌았다. 맑은 물로도 도통 헹궈 낼 수 없는 지독한 맛이었다. 꼭 바랐던 일을 꿈으로 꾸고 일어났더니 반대의 현실이 눈앞에 펼쳐진 듯했다.
게다가 기억 속 아이의 얼굴은 이상하리만치 희미했다. 떠오르는 장면은 분명 선명한데 아이의 모습은 무언가에 가려진 듯 흐릿했다. 그리고 안개처럼 희뿌연 아이는 헤레이스에게 이유 모를 거부감으로 다가왔다. 헤레이스는 제 머릿속에서 또렷하지 않은 아이가 이제는 두렵기까지 했다.
“부인.”
헤레이스가 이해 못 할 자신에게 속으로 화를 내고 욕을 할 때였다. 어느새 다가온 헬렌이 축 처진 그녀의 뒤에서 부러 밝은 목소리를 꾸며 냈다.
“주인님께서 함께 산책을 하러 가자 청하십니다.”
“…….”
“늦은 시간이지만 달이 밝아요. 제가 숄을 꺼내 드릴게요. 주인님과 산책하시면 기분도 꽤 좋아지실 거예요.”
“……오늘은 쉬겠다고 전해 줄래?”
남편의 제안에 순간 혹했으나 헤레이스는 곧 어깨를 늘어뜨렸다. 아들의 얼굴을 보기 힘든 만큼 남편의 얼굴 또한 마찬가지였다. 헤레이스는 제게 말하는 헬렌의 쪽으로 몸조차 돌리지 않은 채 침대에 누워 고개를 저었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걸 알면 실망할 거야. 자식을 꺼리는 어미라니.’
곧 헬렌이 문을 닫고 나가는 소리가 났다. 헤레이스는 그녀가 나가자 다시 훌쩍이기 시작했다. 남편이 저를 걱정하고 있음을 알았다. 그는 계속해서 그녀에게 괜찮은 거냐고 물었으니까.
당장에라도 다정한 그에게 안겨 괜찮지 않다고 울며 고개를 젓고 싶었다. 하지만 동시에 두려웠다. 그녀의 남편 이즈카엘은 그녀에게 한없이 너그럽고 따뜻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더 실망을 안겨 주기 싫었다. 시트에 얼굴을 묻은 그녀의 등이 점차 거세게 들썩였다.
“이즈카엘…….”
그렇게 남편의 이름을 부르며 얼마를 울고 있었을까. 누군가 헤레이스의 등에 손을 댔다. 깃털로 간지럽히듯 아주 조심스러운 손길이었다.
그 미약한 접촉에 헤레이스는 화들짝 놀랐다. 그녀가 눈물로 엉망이 된 얼굴을 들어 상대를 확인했다.
돌아본 곳에는 그녀의 남편이 있었다. 그의 얼굴이 너무도 형편없이 구겨져 있어 헤레이스는 제 꼴이 어떤지 잊고 놀란 목소리로 남편을 불렀다.
“……이즈카엘?”
자신을 향해 뻗어진 남편의 손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당황한 헤레이스가 몸을 완전히 돌리고 상체를 세운 채 이즈카엘을 올려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