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이즈카엘이 조사단의 명단을 내려놓고 이번에는 기사단 규모를 봤다. 제임스 말대로 일개 사찰이라기에는 기사들의 수가 많았다. 나라 간 전쟁은 못 하더라도 영지 하나쯤은……. 물론 세르펜스 성을 함락시키는 데는 턱없이 부족한 규모였지만 조심해서 나쁠 건 없었다.
“……최근 몇 년 동안 진행한 일 중 혹여나 위법을 저지른 일이나 문제 될 부분이 있었는지 살펴 올려. 그리고 황태자 일행이 북부로 들어서는 순간 사람을 붙인다. 그리고 에드가.”
“예.”
“기사들에게 준비 태세를 명해.”
“알겠습니다.”
제임스는 제가 보고할 것이 끝나자 빠르게 자리를 떴다. 온갖 일의 총괄에 새로운 일까지 맡은 그는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에드가는 제임스가 자리를 뜨자 이즈카엘의 앞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 가져온 지도를 펼치며 말했다.
“찾으라 명하셨던 인물들을 찾았습니다만…… 상황이 좋지 않은 것 같습니다.”
“…….”
“전에도 말씀드렸다시피 레이디 셜벗과 다르게 부인의 핏줄께서는 황제 폐하의 명으로 추방된 몸입니다. 황태자께서 불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방문하시는 이때 괜히 꼬투리라도 잡힌다면 문제가 커질 수 있습니다.”
“확실히. 게다가 지금 출발한다면 황태자와 비슷한 시일에 도착하겠군.”
이즈카엘은 지도 위 붉은 점이 크리스와 안나의 위치임을 알아채고 인상을 찌푸렸다.
“차라리 황태자께서 돌아가신 다음에 부르시면…….”
“아니. 그건 안 돼, 에드가.”
“…….”
“일단 최대한 빨리 데려와. 북부는 넓으니 어디든 숨겨 두면 되겠지.”
“각하.”
에드가가 한 번 더 이즈카엘을 만류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하지만 이즈카엘이 먼저였다. 저를 부르는 수하의 목소리에 그가 손을 들어 올렸다.
“에드가.”
“…….”
“지금 헤레이스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해. 하지만 그녀가 언제 기억을 찾을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 아닌가.”
“…….”
“기억을 찾으면…… 헤레이스는 홀로 견디지 못할 거야. 알잖나. 그녀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어떠했는지.”
에드가는 그제야 이즈카엘이 손을 떨고 있음을 눈치챘다. 도살자라고까지 불렸던 굳건한 사내는 뭐가 그리 두렵고 초조한지 초점조차 제대로 맞추지 못한 채 파리한 입술을 꾹 물고 있었다.
“……아내에게는 아내가 아끼는 누군가가 필요해. 나 말고 가까이서 그녀를 돌보고 위로해 줄 사람이 있어야 한다고.”
“…….”
“그러니까 아내의 오라비와 시녀를 빠른 시일 내 데려와. 나머지 일은 내가 해결하겠어.”
* * *
“도대체 부인께서는 왜 저러시는 거야? 매일같이 미겔 도련님을 껴안고…… 사생아잖아. 게다가 에르젠 도련님을 죽인 여자의 아들인데. 왜 저렇게…….”
“에르젠 도련님 일 이후에 완전히 미쳐 버리신 거지.”
성내에는 헤레이스를 두고 말이 많았다. 그럴 만한 것이 에르젠을 잃고 자해 시도까지 한 그녀가 원수의 아들이라 할 수 있는 미겔을 끌어안고 제 아들처럼 여기고 있었으니 어느 누가 기이한 눈으로 보지 않을 수 있을까. 사용인들은 둘 이상 모였다 하면 헤레이스에 대해 수군거렸다.
“설마!”
“아냐. 정신이 나가신 게 맞아. 어제는 나한테 도련님의 까만 머리카락에 어떤 색 옷이 좋겠냐 물어봤다니까.”
“뭐? 미겔 도련님 머리카락은 주인님과 같은 은색…….”
“그러니까. 정신을 놓으신 거지. 내가 보기에 부인께서는 미겔 도련님을 에르젠 도련님으로 착각하시는 거 같아.”
“그러고 보니 기억도 좀…… 지금 부인은 꼭 예전 같으시잖아. 실없이 잘 웃고 주인님하고도 잘 지내고……. 모조리 기억하시면 그럴 수 없지. 정부가 아들을 죽였는데. 나 같으면 주인님도 보기 싫을 거야.”
대부분의 사용인들은 헤레이스가 정신을 놓았다고 생각하며 동정 어린 시선을 보냈다. 그리고 헤레이스의 웃음이 자주 들릴수록, 그녀가 미소를 자주 띨수록 그런 눈빛들은 짙어져만 갔다.
“어찌 됐건 가엾게 되셨어. 참 기구한 삶이야. 본인 집안은 멸문에, 몇 년 새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만 봐도…….”
“입을 함부로 놀리는 자는 분명 매질을 해 쫒아내겠다 말했을 텐데!”
“집, 집사님!”
덕분에 힘들어진 것은 성내 사용인들을 관리하는 노집사, 그리고 헤레이스의 가장 가까이서 그녀를 시중드는 헬렌이었다.
“하아…… 입들 단속하기가 이리 어려워서야.”
“한두 명이 이야기하는 게 아니니까요. 발보다 빠른 말을 어찌 다 막을까요.”
두 사람은 혹여나 사용인들의 수다가 헤레이스의 귀에 들어갈까 노심초사하며 하루하루 보내고 있었다.
“네 말이 옳아. 사람들 입은 너무 많고 가벼워. 부인의 시중조차 제대로 둘 수가 없으니 원…….”
“…….”
“당장은 믿을 만한 사람이 너뿐이구나, 헬렌. 고생스럽더라도…… 부탁하마.”
“예, 걱정 마세요.”
노집사가 헬렌의 어깨를 두드리며 부탁 조로 말했다. 헬렌은 노집사의 염려 어린 얼굴에 간식이 차려진 쟁반을 든 채 괜찮다는 듯 웃어 보였다. 하지만 노집사가 복도를 따라 사라지고 헤레이스와 아이가 있는 방문 앞에 홀로 서자 등 뒤로 쭈뼛 소름이 돋는 건 막을 수 없었다.
‘……불편한 아이야.’
헬렌은 헤레이스 옆에 붙어 있는 미겔을 보는 것이 껄끄러웠다.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으나 영리한 아이는 헤레이스가 제 친모가 아님을 알고 있을 터였다. 하나 미겔은 헤레이스에게 맞춰 연기라도 하듯 친자처럼 굴고 있었다.
똑똑.
“부인, 헬렌입니다.”
“들어오렴.”
물론 어미를 잃은 아이니 자신을 아들로 보는 헤레이스에게 정을 붙여 그런 것일 수도 있었다. 다섯 살이면 천지 분간 못 하는 어린 나이인 데다 어미의 품에 안겨 있을 나이이니. 그러나 아이의 호박색 눈, 헤레이스에게 안겨 저를 보는 저 눈…….
“엄마, 오늘 간식은 뭐야?”
……저 눈을 보면 이해할 수 없는 찝찝함과 불편함에 속마저 울렁거렸다.
* * *
“헬렌, 이만 나가서 네 일 보렴.”
“저도 남아서 도련님을 돌볼게요.”
“아냐. 이것만 먹이고 낮잠을 재울 생각이야. 아이 하나 재우는 데 굳이 네 손까지 빌릴 필요 없지.”
“하지만…….”
“괜찮으니 나가 봐. 내가 편히 있고 싶어 그래.”
아이는 간식을 놓고 나가는 헬렌의 뒷모습을 보며 비틀린 미소를 지었다. 저에게 이유 모를 두려움을 느끼면서도 주인을 걱정해 남을까 말까 고민하는 꼴이라니. 우스웠다.
어찌 보면 대단한 인간이긴 했다. 이 성내에 몇몇 인간들이야 제가 인간이 아님을 알고 있으니 경계한다지만 저 여자는 그 사실도 모르질 않나. 직감이 제법 쓸 만했다.
‘번거로운데…… 먹어 버릴까.’
허기가 들지는 않았으나 헤레이스를 걱정하며 곁에 머물고 싶어 하는 여인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게다가 아이의 기분은 얼마 전부터 쌓이기 시작한 불만으로 매우 저조했다.
“자, 이거 먹어 보자.”
비틀린 심기에 그것이 날카로운 이를 드러내다 입가로 다가오는 흰 손에 다시 숨겼다. 인간들이나 선호할 법한 냄새가 코를 찌르는 것에 입맛이 싹 가셨다.
헤레이스의 손에 들린 붉은 열매는 말린 것인지 본래보다 색이 어두웠다. 하지만 겉에 바른 꿀 때문에 제법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붉은 혀가 다정하게 내민 열매를 날름 삼켰다.
“씨는 뱉어야지. 자, 퉤.”
아이가 열매를 문 채 한참 우물거리자 헤레이스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접시를 내밀었다. 그것이 헤레이스가 내민 접시에 씨를 뱉으려다가 멈칫했다. 뒤틀린 심기. 아이는 어미가 시키는 대로 순순히 행동하고 싶지 않았다.
그것이 실수한 척 접시를 잡고 있는 헤레이스의 손 위에 씨를 뱉어 냈다. 커다란 씨에 남은 과육과 타액이 한데 묻어 헤레이스의 하얀 손 위로 떨어졌다.
더럽고 질척한 것이 허여멀건 피부를 더럽히자 왠지 모를 희열에 아이가 히죽 입꼬리를 올렸다. 그러나 그것은 곧 제가 어린아이의 탈을 쓰고 있음을 기억해 내고 미안한 얼굴로 헤레이스를 올려다봤다.
“괜찮아.”
헤레이스가 아이의 머리를 상냥하게 쓰다듬고 제 손에서 바닥으로 추락한 씨를 집어 들어 접시에 올려놨다. 그리고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손수건을 꺼내 손을 깨끗이 닦고 다시 열매 하나를 아이의 앞에 내밀었다. 아이가 무언가를 먹는 모습만 바라봐도 행복한지 흰 얼굴에는 미소가 가득했다.
“하나 더 먹을까?”
“……배불러.”
그것이 싫은 내색 하나 없는 헤레이스를 빤히 보다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뭘 먹어도 똑같은 맛에 이따위 것은 아무리 많이 먹어도 제 배고픔을 채워 주지 못했다.
“졸려. 나 자고 싶어, 엄마.”
“그래? 그럼 자러 가자.”
아이가 싫다고 하자 헤레이스가 쟁반을 옆으로 치웠다. 그러고는 잠이 온다며 칭얼거리는 아이를 안아 침대로 걸음을 옮겼다.
“우리 아들, 이제 조금 더 무거워지면 안아 주기 힘들겠어.”
“내가 무거워?”
“당연히…… 아?”
헤레이스는 그가 무럭무럭 자라고 있으니 당연한 거 아니겠냐고 웃으며 말하려다 가벼워진 팔에 걸음을 멈췄다.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잠깐 안아 든 걸로 팔이 아렸는데…….
묘한 감각이 그녀의 등을 찌르고 목덜미를 서늘하게 식힐 때였다. 품에 안긴 아이가 졸린 목소리로 얼어붙은 그녀를 불렀다.
“엄마.”
아들의 목소리에 헤레이스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 다시 침대로 향했다. 침대 가까이 다가가 팔을 아래로 내리니 아이가 가벼운 몸짓으로 침대 시트 밑을 파고들었다. 헤레이스가 다람쥐처럼 귀여운 아들의 모습에 잘게 웃으며 침대에 걸터앉았다.
“자장가 불러 줄까?”
“자장가보다는…….”
코 아래까지 시트를 덮은 아이가 고개를 가로젓더니 옆으로 꿈틀거리며 몸을 옮겼다. 얼굴의 반이 가려진 탓인지 아이의 눈동자가 어느 때보다 선명하게 헤레이스에게 박혀 들었다.
“엄마도 여기서 나랑 같이 자면 안 돼? 응?”
아이 특유의 천진난만한 목소리에는 어미를 향한 응석만이 존재했다. 하지만 언제나 기꺼웠던 아들의 어리광이 오늘따라 이상하게 불편했다.
“요새 밤에는 아버지랑만 있잖아. 나도 엄마랑 같이 자고 싶은데…….”
헤레이스가 가만히 앉아만 있자 아이가 시무룩한 표정을 지으며 울먹이는 소리를 냈다. 헤레이스는 기이한 불쾌감을 쫓고 아이의 옆에 모로 누웠다. 아들의 말이 맞았다. 요새는 통 아이와 함께 있어 주지…….
‘가지 마. ……만 두고 가지 마. 응?’
문뜩 머릿속에 아이의 울음소리가 희미하게 스쳤다. 헤레이스는 욱신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저도 모르게 신음을 내질렀다. 머릿속을 누군가 망치로 쾅쾅 두드리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