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걱정 마, 이즈카엘. 내가 널 편하게 해 줄게.”
“…….”
“그녀가 기억을 찾을지도 모른다는 걱정은 하지 마. 지금의 그녀는 너무 행복해. 너무 행복해서 나오지 않을 거야, 이 행복에서.”
그것이 눈을 가느다랗게 접어 이즈카엘에게 웃어 보이며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그러나 이즈카엘은 쉽사리 수긍하지 않았다. 그가 미간을 구기며 입술을 피가 날 정도로 물었다.
“이게 고민할 일이야? 잘 생각해 봐. 뭐가 이득인지.”
이즈카엘의 갈등을 알아챈 그것이 답답한 듯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더니 침대에서 일어나 이즈카엘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그냥 이대로 행복해지는 게 어때? 우리 셋이 행복한 가족이 되는 거야.”
아이가 달콤한 말을 하며 안아 달라는 듯 팔을 뻗었다. 이즈카엘은 저를 올려다보는 눈동자 속에 그려진 풍경에 주먹을 꽉 쥐었다.
웃고 있는 헤레이스, 그녀에게 사랑한다 속삭이는 저, 그리고 아이…….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가족이, 그가 원했던 미래가 그곳에서 그를 유혹하고 있었다.
* * *
눈을 감고 있는 헤레이스의 얼굴에는 평온이 내려앉아 있었다. 이리 편히 잠든 아내의 모습을 본 게 얼마 만인지. 이즈카엘은 헤레이스의 옆에 누워 그녀의 말간 얼굴을 천천히 쓸었다.
‘그냥 이대로 행복해지는 게 어때? 우리 셋이 행복한 가족이 되는 거야.’
그는 끝내 그것의 제안에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고개를 젓지도 않았다. 마음 같아서는 끄덕이고 싶었다. 하지만 실낱같이 얇은 무언가가 그래서는 안 된다고 그를 말렸다.
아내 옆에 누워 있던 그가 몸을 일으켰다. 자신은 그녀의 곁에 이리 누워 있을 자격이 없었다.
이즈카엘이 침대에서 내려와 헤레이스가 잠들어 있는 침대 왼편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헤레이스는 똑바로 누워 있었으므로 이즈카엘의 눈에 보이는 것은 그녀의 옆얼굴이었다. 이즈카엘은 일순 다행이라 생각했다. 아내의 얼굴을 정면으로 보면 목이 막혀 제대로 사죄할 수 없었을 테니.
“……미안해.”
“…….”
“미안해, 헤레이스.”
“…….”
“내가…… 내가 잘못했어.”
하지만 말로 꺼냈다 한들 제대로 된 사죄는 아니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들어야 할 이가 듣고 있지 않은데 천 번 만 번을 외친들 무슨 소용이겠나.
이즈카엘이 공허한 눈으로 정처 없이 아내를 훑었다. 그리고 아내의 손 부근을 보던 그가 별안간 무엇이 생각난 듯 몸을 벌떡 일으켰다.
이즈카엘이 향한 곳은 화장대였다. 그가 거울 뒤에서 열쇠를 꺼내 서랍 깊숙이 있던 보석함 자물쇠에 가져다 댔다. 달칵하는 소리와 함께 곧이어 어둠 속에서도 빛이 반짝였다.
찬란한 보석들 가장 위에는 언젠가 이즈카엘이 샬럿에게 돌려받은 반지가 있었다. 금으로만 세공했으되 어느 보석보다 존재감을 뽐내는 반지. 그걸 집어 든 이즈카엘이 헤레이스에게 다가갔다.
이즈카엘은 아내가 깨지 않게 조심스레 손을 가져다 댔다. 사내의 손이 부드러운 뺨에서 목으로 미끄러지더니 빗장뼈를 건드리고 팔로 내려왔다. 잠깐 아내의 손등을 쓸던 그가 아내의 약지를 만지작거렸다. 그리고 가지고 온 반지를 아내의 손가락에 살살 끼워 넣기 시작했다.
처음 끼워 줄 때만 하더라도 아내에게 꼭 맞았던 반지는 조금이지만 헐렁해져 있었다. 바로 빠질 정도는 아니었으나 격하게 움직인다면 잃어버릴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러잖아도 말랐던 아내가 살이 더 내렸다고 생각하니 괴로웠다. 그가 저도 모르게 힘을 조절하던 것을 잊고 아내의 손을 세게 만지작거렸다.
“으응…….”
그의 손아귀 힘에 헤레이스의 눈꺼풀이 팔랑였다. 반쯤 떠진 푸른 눈에 이즈카엘이 훔친 물건을 내려놓듯 그녀의 손을 놓았다. 하지만 이미 마주친 시선은 돌이킬 수 없었다.
“이즈카엘?”
제 손을 만지작거리던 이가 이즈카엘임을 알아본 헤레이스가 빙긋 미소를 지었다. 그녀가 눈을 비비는가 싶더니 몸을 틀어 옆에 앉아 있는 이즈카엘의 무릎 위에 제 머리를 올려놨다.
“……깼어? 미안해.”
“아니에요. 그보다 갑자기 이건 왜…….”
헤레이스가 손을 들어 손가락에 끼워져 있는 반지와 이즈카엘을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번갈아 봤다.
“……그냥. 이 반지를 낀 당신 손을 보고 싶었어. 오랫동안 끼지 않았잖아.”
이즈카엘의 말에 헤레이스가 고개를 끄덕이려다 멈췄다. 반지. 그러고 보니 내가 이걸 언제 뺐더라? 항상 몸에 지니고…….
‘아기라 피부가 약해 반지가 닿는 게 불편한가 봐.’
물음에 이어 곧바로 기억 속의 제 목소리가 생각났다. 헤레이스는 그제야 마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이후로 잊고 있었구나. 이이가 몰래 끼워 줄 정도로 신경 쓰지 않았다니. 섭섭했겠어.’
“미안해요. 이제 계속 끼고 있을게요.”
헤레이스의 사죄에 이즈카엘의 표정이 순간이지만 참담히 무너졌다. 그러나 반지를 보고 있던 헤레이스는 그의 표정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녀는 반지 낀 제 손가락을 보다가 개구쟁이 아이처럼 침대에 몸을 굴렸다.
“이리 들어와요. 꼭 안아 줄게요.”
부드러운 시트 밑으로 몸을 넣은 헤레이스가 제 옆을 두드리며 이즈카엘에게 환하게 웃어 보였다. 그는 자신과 꼭 안고 있는 것을 좋아했으니 완전히는 아니어도 어느 정도 섭섭함을 풀리라.
그녀의 예상대로 이즈카엘은 별말 없이 헤레이스가 이끄는 대로 움직였다. 헤레이스는 자신을 꼭 안은 채 제 목덜미에 얼굴을 묻는 남편의 귀에 입을 맞췄다.
“……우리 아들도 그러더니 당신도 어리광이 느네요. 섭섭했으면 진작 말하지. 그럼 계속 끼고 다녔을 텐데.”
우리 아들이라는 단어에 이즈카엘이 몸을 굳혔다. 그러나 그는 곧 제 피부를 더듬는 아내의 손에 힘을 풀었다. 그리고 들릴 듯 말 듯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미안해, 헤레이스.”
* * *
안나와 크리스의 행방은 생각보다 빠르게 찾을 수 있었다. 에드가는 지도에 표시된 빨간 점들을 보며 그들이 세르펜스 성까지 오는 데에 걸리는 기간을 대략 어림짐작했다.
‘두 달이면…….’
손가락으로 지도의 길을 따라 그리던 그가 계산을 마치고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그리고 이즈카엘에게 보고하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잠깐 기다려 주십시오.”
선객이 있는 모양인지 보좌관이 에드가를 막아섰다. 그러나 방문한 이가 에드가임을 알리자 집무실 문은 바로 열렸다.
집무실에는 제임스가 먼저 와 있었다. 이즈카엘의 앞에 마주 앉아 있던 그는 에드가가 들어오자 일어나 허리를 숙이고는 다시 앉았다.
“계속해.”
이즈카엘이 에드가에게 자리에 앉으라 눈짓하고는 제임스에게 말했다. 집무실에 들어온 순간 제임스의 보고를 함께 들어도 좋다는 뜻이었기에 에드가는 조용히 제임스의 옆자리에 앉았다.
“그럼 계속하겠습니다.”
의자가 여덟 개 딸린 기다란 책상에는 여러 서류가 널브러져 있었다. 제임스가 이즈카엘 쪽으로 펼쳐져 있는 서류의 몇 군데를 손가락으로 짚으며 입을 열었다.
“예상대로 사제들이나 사제들처럼 신성력을 어느 정도 가진 이들이 이 물건에 반응했습니다. 그래서 그 방면으로 조사를 했는데…….”
“…….”
“……비슷한 물건을 딱 하나 찾았습니다.”
여러 인물의 인적 사항을 지나 제임스의 손가락이 어느 그림에 닿았다. 이즈카엘과 에드가는 그 손가락을 좇아 그림을 살폈다. 화려한 보석들로 치장된 기다란 물건은 사제들이 쓰는 관 같았다.
“크게 분류하자면 성물입니다.”
“어느 신전의 것이지?”
성물이라는 말에 이즈카엘이 곧장 물었다. 북부 소속 신전의 성물이라면 지금 당장 가지고 오라 할 참이었다. 하지만 제임스는 이즈카엘의 물음에 고개를 살짝 젓더니 곤란한 얼굴을 했다.
“……어느 신전의 것이라 할 수 없습니다.”
“유실된 성물인가.”
“아닙니다. 이것은…… 교황의 관입니다.”
이제야 저 얼굴이 이해가 갔다. 보통의 성물도 빌려 오는 것이 힘들었다. 그런데 교황의 관이라니. 신전에서 옮기는 것을 허락할 리 없었다. 그것은 곧 황제에게 황제의 관을 빌려 달라는 말과 같았으니.
“다른 성물과 달리 가지고 오는 것이 불가합니다. 신전에서 내줄 리가 없으니까요.”
이즈카엘은 제임스의 난감한 목소리에는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가 그림 속 교황의 관을 찬찬히 살피다가 의문을 표했다.
“……이 관 전체가 찾는 물건은 아닐 텐데.”
제임스가 이즈카엘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림의 중앙 부위를 가리켰다.
“맞습니다. 각하께서 찾으시는 물건은 관에 박힌 보석 중 이것입니다.”
관의 정중앙에 박혀 있는 육각형 모양의 보석. 하얀 돌덩이로도 보이는 그것은 척 보기에도 크고 귀해 보였다. 비록 검은색 잉크로 그려진 흑백의 그림이지만, 그 속에서도 보석의 존재감은 확연했으니. 제임스가 손가락으로 보석을 툭툭 치며 말을 덧붙였다.
“장님으로 유명했던 14대 교황이 어느 강대한 마녀를 태우고 그 속에서 얻은 보석입니다. 이 관에 박힌 아흔아홉 개의 보석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이지요. 이것이 각하께서 주신 그 결정과 아주 흡사한 것으로 조사되었습니다.”
“…….”
“더 찾아보면 비슷한 물건이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니…….”
설명을 마친 제임스가 주인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지금도 이전에 성물을 찾아다닌 일로 신전 몇과 사이가 틀어졌는데, 더 나아가 교황이 있는 중앙 신전과 부딪치기라도 한다면……. 신전의 위용이 예전만은 못하다지만 그래도 아나이스의 정신적 지주로 있는 교황이었다. 괜한 척을 져 좋을 건 없었다.
“아니.”
“…….”
“사람을 보내.”
“…….”
“말을 먼저 꺼내 보되 안 된다면 어떤 수를 써서라도 가져와. 훔쳐서라도.”
하지만 제임스의 만류는 이즈카엘의 말 몇 마디에 스러졌다. 제임스는 속으로 한숨을 쉬면서도 예상한 일에 머릿속으로 계획을 그렸다.
“……알겠습니다. 어떤 식으로든 방안을 마련하겠습니다.”
훔쳐서라도 가져오라는 주인의 무도한 말에 제임스가 에둘러 답하며 책상에 흩어져 있던 서류를 정리했다. 그리고 이번에는 몇 장 안 되는 다른 서류 뭉치를 꺼내 들었다.
“한 가지 중요 안건이 더 있습니다.”
“말해.”
“수도에서 은밀히 받은 소식입니다만, 황태자께서 세르펜스 성을 방문할 예정이라 하십니다. 예상 일정은 두 달 정도 뒤입니다.”
황태자라는 단어에 이즈카엘은 물론이고, 에드가의 얼굴에도 의아함이 맴돌았다. 수도에 있는 황족들이 북부까지 오는 일은 거의 없었다.
“이유는?”
“황족으로서 나라 곳곳을 사찰한다는 이유지만 동행하는 이들의 목록을 살펴보면 조사단에 가깝습니다. 특히 여기 라그랑 후작과 밀로 백작은 황태자 전하의 최측근으로, 죄지은 귀족들을 심문하는 이들입니다.”
제임스가 펼친 종이에는 열댓 명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그리고 강조하듯 빨간 줄이 그인 이들은 대부분 황실 조사단 소속 귀족이나 관리였다.
“정확하지는 않으나 분명 좋은 일은 아닙니다. 황태자 전하의 호위라고는 하지만 함께 움직이는 기사단이 너무 많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목적지가 세르펜스 성인 게 너무 분명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