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목을 꺾는 악마여-86화 (86/108)

86화.

11장. 벌

헤레이스의 상태가 기이해진 지도 며칠이 지났다. 헤레이스의 곁에 붙은 그것을 보고 얼굴을 구기던 이즈카엘도 이제 어느 정도 침착함을 가장할 수 있었다.

헤레이스는 노래를 흥얼거리며 수를 놓다 고개를 들었다. 멀지 않는 곳에 이즈카엘이 고목처럼 선 채 그녀를 보고 있었다.

“이즈카엘, 이리 와 봐요.”

늠름한 모습에 얼굴을 살짝 붉힌 헤레이스가 남편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그의 소매 위로 아름답게 수놓은 넝쿨 모양을 들이댔다.

“당신 셔츠에 이걸 수놓을까 하는데 어때요?”

이즈카엘은 가까이 다가온 헤레이스를 빤히 보기만 했다. 뚫어져라 저를 보는 호박색 눈에 잠시 부끄러워진 헤레이스가 고개를 푹 숙였다. 그리고 자그마한 목소리로 조잘거리기 시작했다.

“은사로 소매에 넝쿨을 수놓으면 건강히 오래 산다 들었어요. 우스운 미신이긴 하지만 나쁜 것도 아니고…… 당신만 좋다면 모든 셔츠에 넝쿨을 수놓고 싶어요.”

“뜻대로…… 뭐든 당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해, 헤레이스.”

이즈카엘의 목소리는 어딘가 잠겨 있었다. 헤레이스는 여상하지 않은 남편의 상태에 고개를 갸우뚱거리다 그의 답을 듣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허락해 줘서 고마워요.”

말간 미소에는 조금의 아픔이나 괴로움도 없었다. 헤레이스가 가까운 탁자에 수놓던 것을 내려놨다. 그리고 다시 이즈카엘 쪽으로 몸을 돌리려 했다. 그때, 그녀의 드레스 소매에서 무언가 툭 바닥으로 떨어졌다.

“아…….”

떨어진 물건에 헤레이스가 당황한 얼굴을 했다. 바닥에 나뒹구는 물건을 확인한 이즈카엘도 몸을 딱딱하게 굳혔다. 그의 얼굴이 일순간에 죄책감으로 구겨졌다.

“……이건 아직 들키면 안 되는데.”

헤레이스가 허리를 숙여 손수건을 주웠다. 손수건에 반쯤 수놓인 천일홍처럼 붉어진 얼굴에는 수줍음이 가득했다.

“……천일홍 자수예요. 의미는 알고 있죠?”

고개를 수그리고 있는 터라 헤레이스는 이즈카엘의 참담한 표정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녀가 손수건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완성되면 당신한테 선물하려 했어요.”

“…….”

“조금 낯간지럽기는 하지만…… 당신은 내 영원한 연인이잖아요, 이즈카엘.”

그 말에 이즈카엘의 목울대가 위아래로 움직였다. 그가 참지 못하고 헤레이스를 제 품에 안았다.

“……헤레이스.”

한순간에 이즈카엘에게 안긴 헤레이스가 눈을 몇 번이고 깜빡이다 이즈카엘의 목소리에 놀란 낯을 했다. 잘못 들은 게 아니라면 남편은 지금…….

“이즈카엘?”

“…….”

“이즈카엘? 설마 울어요?”

“헤레이스…….”

그가 거세게 껴안고 있는 통에 헤레이스는 이즈카엘이 소리 없이 미안하다며 사죄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 그녀가 남편의 허리를 끌어안고 그 위 등으로 작은 손을 올렸다. 그리고 그의 가슴팍에 기댄 채 눈을 감고 말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울지 말아요. 당신이 슬퍼하면 나도 슬픈걸.”

등을 토닥이는 손이 완벽하던 그때와 같았다. 아주 짧았던 기간. 헤레이스는 기쁨에 웃고 이즈카엘은 그런 그녀를 안아 주던 그때.

헤레이스가 예쁘게 웃을수록, 그녀의 말씨가 다정할수록 이즈카엘은 스스로에 대한 혐오를 멈출 수 없었다.

자신이 이토록 아름다웠던 그녀를 망쳤다. 이렇게 웃고 행복해하는 사람을 고작 저열한 감정 하나로 짓밟고, 울게 하고, 망가뜨려 지금에 와서는 그것에 의해 기억조차 불분명하게 만들었다.

제가 저지른 일들만 아니었다면 헤레이스는 지금도 이 모습 그대로였을 것이다. 아이도 살아 있었겠지.

‘……각하께서 할 수 있는 최선이자 최소한의 도리니까요.’

에드가는 어떤 결과를 맞이하든 헤레이스에게 용서를 빌라고 했다.

하지만 이런 헤레이스의 앞에서 이즈카엘은 도무지 용기를 낼 수 없었다. 아내가 악마와도 같은 그것에 의해 어그러진 환영 속을 헤매고 있음을 인지했음에도, 지금 그녀의 행복을 깰 수 없었다. 아니, 사실은 자신도 이런 아내의 모습에 모든 것을 뒤로한 채 그저 그녀와 지금처럼 살고 싶었다.

이즈카엘의 속내도 모른 채 헤레이스는 계속해서 그의 등을 쓸어 줬다. 가슴팍에 뺨을 비비는 얼굴에는 기쁨이 만연했다. 이즈카엘은 한참 그렇게 헤레이스와 붙어 있다가 천천히 그녀를 떼어 냈다. 헤레이스의 푸른 눈이 그만을 담은 채 아름답게 빛났다.

“헤레이스, 내가 당신한테…….”

알아듣지 못한다고 하여도 사죄는 해야 한다 생각했다. 이즈카엘이 제 뺨을 쓰다듬는 헤레이스와 감히 눈도 마주치지 못한 채 입술을 달싹였다. 그러나 그가 힘겹게 사죄의 말을 내뱉으려는 순간, 문이 열리며 아이가 종종걸음으로 다가와 그들 부부 사이를 파고들었다.

“엄마!”

아이를 발견한 헤레이스가 화들짝 놀라며 이즈카엘에게서 떨어졌다. 어린아이에게 이런 모습을 보인 것을 민망해하는 모양새였다.

“……뭐 하고 있었어?”

“아무것도. 그냥 이야기하고 있었어.”

아이가 이즈카엘을 힐끔 보더니 헤레이스에게 팔을 뻗었다. 안아 달라는 무언의 요구였다. 헤레이스가 웃음을 터뜨리며 아이를 안아 들었다.

“우리 아들, 인사는 하고 어리광 부려야지.”

“응. 아버지, 안녕. 좋은 아침이에요.”

길게 올라간 입꼬리에는 비웃음이 가득했다. 이즈카엘이 아내에게 안겨 있는 그것을 보며 인상을 구기자 헤레이스가 의아한 얼굴로 그를 불렀다.

“이즈카엘?”

이즈카엘이 헤레이스의 목소리에 마지못해 표정을 풀었다. 그리고 헤레이스의 머리를 두어 번 쓸어 주고 몸을 돌렸다.

“……저녁에 올게. 쉬고 있어.”

헤레이스는 갑작스레 방을 나서는 이즈카엘의 뒷모습을 어리둥절한 얼굴로 봤다. 어미가 저보다 아비에게 집중하자 아이가 손을 뻗어 어미의 시야를 가렸다.

헤레이스가 제 눈을 가린 작은 손에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아이를 안은 채 카우치에 앉으며 말했다.

“오늘 아버지께서 기분이 안 좋으신가 봐. 조금 전에도 그렇고…… 우리 아들한테 인사도 해 주지 않고.”

아이가 근심이 내려앉은 헤레이스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다 그녀의 입술을 톡톡 쳤다. 아들의 요구를 알아들은 헤레이스가 잘게 웃었다.

“다섯 살이면 의젓하게 굴어야지. 언제까지 이럴 거야.”

그러나 장난스러운 타박을 하면서도 헤레이스는 아이의 원대로 짧게 입맞춤을 해 줬다. 어미의 온기가 제 입술에 짧게 닿자 아이가 똑같이 어미에게 입을 맞췄다.

노래를 부르며 아들의 어르는 헤레이스의 얼굴에는 그새 근심 걱정 따위 사라진 지 오래였다. 아이는 행복한 얼굴로 눈 감은 어미의 품을 집요하게 파고들며 속삭였다.

“사랑해, 엄마.”

* * *

그것이 눈을 뜨자 풀벌레가 울음을 멈췄다. 조용해진 밤, 커다란 침대에 홀로 누워 있던 아이가 시트를 끌어 내리고 천천히 앉았다.

침대 옆에는 사내가 있었다. 아이가 픽 웃으며 고갯짓으로 가까운 의자를 가리켰으나 이즈카엘은 인상을 구길 뿐, 선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늦은 시간 아들을 보러 온 아비의 얼굴이 아닌데?”

살기 어린 표정에 그것이 빈정거리며 팔짱을 꼈다. 그리고 아이의 앳된 목소리로 불만을 토로했다.

“어머니는 나랑 한 침대에서 자고 싶어 했다는데 네가 막았다며? 다섯 살짜리 아들 질투해서 어디에 쓰려고. 응?”

“……넌 우리 아들이 아니야.”

“아…… 맞아. 아버지, 넌 배 속의 아이도 질투했지. 태어나지도 않은 핏덩이가 죽었으면 좋겠단 생각도 했고 말이야.”

화난 짐승처럼 으르렁거리던 이즈카엘이 입술을 내리 물었다. 그것의 말은 너무도 명백한 사실이라 그의 말을 앗아 감과 동시에 그에게 비참함을 가져다줬다. 그것이 괴로움과 죄책감에 일그러지는 사내의 얼굴을 느긋하게 감상하며 말을 이었다.

“짐승도 제 새끼에게는 그런 마음을 품지 않을 텐데. 그래도 너무 자책 마. 그때는 다른 놈 씨인 줄 착각하고 그랬잖아? 짐승도 제가 차지한 암컷이 다른 수컷의 새끼를 배면 죽이려 들지. 그러니 짐승만도 못한 네가 그러는 건 뭐…….”

“언제까지 내 옆에 있을 참이지? 내게 원하는 게 뭐야.”

이즈카엘의 물음에 그것이 깔깔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배까지 움켜쥐고 허리를 굽혀 웃는 모습이 진정으로 즐거운 듯했다. 이즈카엘이 창백한 얼굴로 자지러지는 아이를 노려봤다.

“착각하지 마, 이즈카엘.”

그것은 한참 만에야 웃음을 뚝 그쳤다. 아이가 이즈카엘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스산한 얼굴로 말했다.

“네게 전과 같은 관심은 없어. 이미 알고 있잖아. 지금의 내가 관심 있는 건…….”

“…….”

“……네 아내야.”

헤레이스가 언급되자마자 이즈카엘이 아이의 멱살을 잡아 들어 올렸다. 허공에 달랑 매달린 아이는 숨이 막힐 법도 했건만 전혀 괴롭지 않은 듯 웃음만 지을 뿐이었다.

“그렇게 노려보지 마. 솔직히 너한테도 잘된 일이잖아?”

“뭐?”

“지금의 아내를 보면 기쁘지 않아? 널 보며 웃는 그녀가 만족스럽지 않냐고.”

이즈카엘의 손이 그의 눈동자만큼이나 떨렸다. 말을 잇지 못하는 이즈카엘의 모습에 그것이 예쁘게 눈웃음을 지으며 차근차근 달래는 목소리를 냈다.

“지금의 헤레이스는 널 사랑해. 너 때문에 아들을 잃고 그 모진 수모를 겪었던 일들을 모조리 잊었거든.”

헤레이스가 절 사랑한다는 말에 이즈카엘의 심장 박동이 빨라졌다. 그것이 헤레이스의 목소리를 흉내 내 이즈카엘의 귓가에 속삭였다.

“사랑해요, 이즈카엘.”

힘이 풀린 이즈카엘이 잡고 있던 아이의 멱살을 놓았다. 떨어진 아이가 침대 위에 가볍게 착지해 앉고는 이즈카엘을 올려다봤다.

“물론 좋으면서도 괴롭겠지. 그녀가 잊었다 한들 네가 한 짓은 사라지지 않으니까. 하지만 양심이 조금이라도 남았다면 그 정도 괴로움이야 당연한 거 아냐?”

그것은 이즈카엘의 속내가 훤히 보이는 듯 혀를 쯧쯧거리며 찼다. 그리고 이즈카엘의 심장 부근을 빤히 바라봤다.

“이즈카엘. 내 아버지. 형제야. 난 네 속에 자리한 감정이 너무도 뚜렷이 보여. 그게 우스워.”

씰룩이는 아이의 입가에는 비웃음과 경멸이 함께 있었다. 지은 죄가 낱낱이 파헤쳐진 죄인처럼 이즈카엘이 뒷걸음질 쳤다. 그러나 그것은 멈추지 않았다. 짙은 비소가 이즈카엘의 눈에 선명히 박혔다.

“지금의 넌 괴로움보다 불안감을 더 크게 느끼고 있잖아.”

“…….”

“그래. 불안하겠지. 언젠가 그녀가 기억을 일부라도 찾으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녀가 다시 너를 보지 않으려 하고 죽음을 통해서라도 널 지우려 하면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모르겠지?”

머리 위에 벼락이 내리 꽂힌 듯 이즈카엘이 비틀거렸다. 계속 부정하고 있었으나 사실이었다. 그는 제 죄로 느끼는 죄책감보다 아내가 기억을 찾는 것을 더 두려워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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