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목을 꺾는 악마여-85화 (85/108)

85화.

“뭐? 그 무슨…….”

“폐하께서는 싫다는 디본 후작 부인을 강제로 취하셨지요.”

미카엘의 말에 황제가 몸을 움찔거렸다. 까맣게 잊고 있었던 일. 그때 그 일을 아는 이들은 다 죽였다고 생각했건만 남은 이가 눈앞에 있었다.

“미카엘, 왜 그러나.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어.”

당황한 황제는 잠깐 얼굴을 굳혔으나 곧 너털웃음을 지으며 표정을 풀었다. 분명 알려지면 제 치부가 될 사건이기는 했다. 하지만 그리 큰 잘못은 아니라고 생각했기에 그는 미카엘에게 변명을 시작했다.

“자네도 알잖아. 그녀가 내 첫사랑이었다는 걸. 첫사랑이 아름다운 모습으로 계속 눈앞에 나타나는데 사내로서 가만있을 수 있어야지.”

황제는 여동생 율리스의 시녀였던 다프네를 꽤 오래전부터 호시탐탐 탐내고 있었다. 그러나 황태자 시절에는 아비의 눈치를 보느라 사고를 칠 수 없었고, 율리스와 다프네가 매일 붙어 있어 기회를 만들기도 어려웠다.

“디본 후작 그치랑 결혼만 안 했어도 정부로 들였을 텐데……. 아니, 그렇게 이른 나이에 죽지만 않았어도 지금까지 귀여워했을 테지. 그렇게 아름다운 여인은 보기 힘드니 말이야.”

입맛을 다시며 말하는 황제의 모습에는 죄책감보다는 아쉬움이 가득했다. 미카엘이 그런 황제를 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후작 부인을 죽인 건 폐하십니다.”

이제 와 후작 부인이 가엾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어차피 그와 상관없는 여인의 일이었고, 황제가 여인 하나쯤 마음대로 다스리는 일이야 흔한 일 아니던가. 다만 미카엘은 황제와 율리스, 그리고 다프네간의 관계를 이용해 황제를 압박할 뿐이었다.

“알고 계셨잖습니다. 후작 부인이 그 일 이후에 계속 앓았다는 걸.”

“그건 억측이야! 그녀가 일찍 죽은 건 그냥 몸이 약해서…….”

“한 번이 아니셨지요. 폐하께서는 몇 번이고 싫다는 후작 부인을…….”

“그만!”

결국 황제가 손을 들었다. 그가 미카엘을 못마땅한 얼굴로 바라보다 크게 한숨을 쉬었다.

“하아…… 알았네. 알았어. 자네 부탁 들어주지. 제길! 이 꼴인 걸 다행으로 생각하게. 죽어가는 게 가여워 목을 치는 대신 도와주는 거니까.”

“……감사합니다.”

“황궁으로 돌아갈 때 아이를 몰래 데려가지. 율리스에게는 자네가 알아서 둘러대. 내보냈다든가 죽였다든가, 그런 식으로 말이야.”

“……그럴듯한 변명을 대도 믿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 율리스가 이즈카엘을 또 한 번 죽이려 할 때를 노리지요.”

세르펜스 공작과 황제의 은밀한 거래는 그렇게 성사됐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세르펜스 공작의 사생아는 호수에 빠져 죽었다.

* * *

어떤 비밀도 영원하기란 힘든 법.

세르펜스 공작 미카엘이 식물에 가까운 상태가 된 지 몇 년 안 됐을 때였다. 샤를과 헤레이스의 교육을 위해 수도에 머물던 율리스는 제 오라비의 곁에 머무는 기사 하나를 봤다. 그리고 배신감에 치를 떨며 오라비를 찾아갔다.

“프란시스! 네가 내게 어떻게 이럴 수 있어! 그 사생아 새끼가 나한테 어떤 의미인지 알면서!”

눈동자 색이 바뀌었다고는 하나 율리스가 본 기사는 분명 이즈카엘이었다. 미카엘과 그 여자를 꼭 빼닮은 얼굴.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그 얼굴이 눈앞에 멀쩡히 나타난 순간, 그녀는 이성을 잃었다.

“……율리스, 말조심하거라. 난 네 오라비이기 이전에 이 제국의 황제다. 내 아래에 있는 백성 중 하나인 넌 내게 그따위 언사를 해서는 안 돼.”

“지금 나한테 그걸 말이라고…….”

“이만큼 세월이 지났으면 됐지 않나. 귀족 사내 중 많은 이들이 사생아를 가졌다. 너만 겪는 일도 아닌데 넌 황녀라고 해도 지나치게 예민하게 굴어.”

황제는 여동생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표정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황제의 자리에 오른 지 제법 세월이 지난 그에게도 많은 사생아가 있었다. 황제는 고작 사생아 따위로 제게 소리를 지르는 여동생을 못마땅한 얼굴로 바라봤다.

“사생아 하나 정도야 아량을 베풀 줄도 알아야지. 그게 여인의 덕목이야.”

“난 그딴 거 몰라. 그러니 죽여. 당장 그 더러운 사생아를 죽이란 말이야! 프란시스!”

율리스는 들끓는 배신감을 간신히 누른 채 오라비에게 말했다. 하지만 그녀의 오라비는 황제의 얼굴을 한 채 율리스에게 답했다.

“그건 안 돼. 불가하다.”

“뭐?”

“네 남편과의 약속도 있었지만 그 아이는 죽이기 아까운 아이야. 어느 방면으로도 부족한 점이 없어.”

이즈카엘을 데려온 황제는 아이의 재능에 감탄했다. 그는 이리된 거, 이즈카엘을 자신을 지키는 검으로 키우고 싶었다.

“율리스, 인제 그만 한발 물러서. 어차피 오늘내일하는 네 남편 죽고 나면 샤를이 그 자리를 물려받을 게 분명한데 왜 쓸데없는 데 신경을 써?”

“…….”

“사생아 따위는 잊어. 어차피 눈동자 색도 바꾼 채 내 옆에서 기사로 살아갈 아이다. 세르펜스의 성조차 받지 못하는데 왜 그리 그 아이를 미워해.”

황제는 그새 선황이 저와 사생아들을 비교하며 자신을 힘들게 한 일을 잊었다.

하기야 비교당한 적이 몇 번 있기는 했으나 결국 적자로 황가의 성을 받은 것은 그와 그의 동복형제들뿐이었으니 어릴 적 상처는 오만한 황제의 권위에 사라진 지 오래였다. 게다가 황제의 자리에 오른 그는 아비와 마찬가지로 어느새 사생아에게 관대해진 후였다.

“난 도통 이해가 가질 않아. 남편의 아이면 귀여워할 법도 하다만……. 하기야 황후도 사생아라면 치를 떨지. 황족으로서 대우한 것도 아닌데 여인들은 왜들 그렇게 속이 좁은지 원…….”

그리하여 황제는 여동생이 어떤 눈으로 자신을 보는지 알아채지 못했다. 여동생의 배신감이 얼마나 깊은지 조금이라도 이해했다면 감히 그따위 말은 내뱉지 못했으리라.

“프란시스, 이건 네가 자초한 일이야. 내가 널 미워하지 않기 위해 외면한 것이 무엇이었는데…….”

황제에게 쫓겨나듯 황궁을 나선 율리스는 그 즉시 오래도록 숨겨 놨던 상자의 자물쇠를 열었다. 거의 10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누구에게도 읽히지 못한 채 보관된 일기장…….

〈황녀님께는 감히 말할 수 없었다. 황녀님은 지금 본인의 일로도 충분히 슬프고 힘들 텐데…… 거기에 내 일로 근심을 더 할 자신이 없었다.

〉〈의원이 내 병의 원인은 근심과 걱정이라고 했다. 근심과 걱정으로 심장이 굳어 간다고……. 의원은 제발 마음을 편하게 가지라 말했지만 그럴 수 없다.

황제께서는 아직도 날 부르신다. 〉〈아무것도 모른 채 내 병을 걱정하며 우는 그이 얼굴을 볼 때면 그저 콱 죽어 버리고만 싶다.

하지만 크리스와 헤레이스를 보면 도저히 그럴 수 없다. 〉〈황녀님께 남은 사람은 나와 황제 폐하뿐이다. 하지만 난 병으로 죽어 가고 있으니…… 이 일은 영원히 비밀로 해야만 한다.

나 혼자 감내하고 견뎌야 한다. 〉〈헤레이스가 그이와 마찬가지로 헤레디스 꽃가루에 과민 반응을 보였다. 그렇다면 헤레이스는…… 아아.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죽음이 멀지 않았다. 황제께서도 이제는 날 찾지 않으시니 원하는 것은 단 하나다. 내게 소중한 이들이 건강하고 행복하기만을 기원한다.

〉〈……이제 정말 얼마 남지 않았다. 마지막까지 그이와 아이들을 볼 수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다만…… 황녀님이 보고 싶다.

그 시절 정원에서 지저귀는 새들처럼 그분과 마지막으로 떠들고 싶다. 〉밤새 다프네가 남긴 일기를 모조리 읽은 율리스의 얼굴은 새벽녘 하늘처럼 차갑게 굳어 있었다. 줄줄 흐르는 눈물을 닦은 그녀가 일기장을 품에 소중히 안았다.

“주인님께서는 손님을 받지 않으시겠다고…….”

“다프네 일이라고 전해.”

그날 저녁, 디본 후작가에 오랜만에 손님이 들었다. 그리고 후작 부인의 죽음 이후 누구도 만나지 않은 채 집에만 있던 디본 후작은 10년 만에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 * *

어른들의 사정을 이제 막 피어나기 시작한 아이들이 알 리 없었다. 다만 헤레이스는 갑작스레 디본가로 돌아가게 돼 걱정이 많은 참이었다.

‘헤레이스, 너도 곧 데뷔를 해야 할 나이이니 가문으로 돌아가 있거라.’

‘부인…….’

‘후작은 전과 같지 않을 거야. 그리고 샤를과 내가 자주 후작가를 들를 예정이니 걱정 마렴.’

미래의 일을 알았다면…… 왕래조차 없었던 공작 부인과 아비가 갑작스레 자주 만났던 이유가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헤레이스는 어떻게 행동했을까?

하지만 아무것도 몰랐던 열넷의 헤레이스는 후작가로 돌아가는 게 마냥 싫지만은 않았다. 후작가로 들어가면 자주 보지 못했던 오라비와 매일 같이 있을 수 있었으며, 어릴 적 자신에게 잘해 주었던 유모와 그 딸 안나, 그리고 여러 사용인을 볼 수 있었으니.

‘아, 아버지. 살려…… 흐븝…… 살, 살, 주세요.’

‘……다프네야?’

‘아니, 아니에…… 흐으…… 전 헤레, 헤레이스에…… 흡!’

‘그럼 거기서 죽도록 해.’

‘아버…… 흐읍. 아빠!’

‘네가 태어난 이후로 다프네는 내내 아팠어. 너만 보면 이상하리만치 힘들어하고…….’

‘제발…… 살, 살려 주…….’

‘……태어나게 해 준 어미를 괴롭게 하는 건 사라지는 게 맞지.’

다만 헤레이스는 아비를 다시 보는 것이 껄끄러웠다. 어미의 죽음 이후 일어난 일련의 일들 때문에 억지로 기억에서 지운 존재였으나, 돌아가면 다시 마주쳐야 할 터였다.

“하아…….”

심란한 마음에 헤레이스가 한숨을 내쉴 때였다. 그녀의 뒤에서 인기척이 나더니 누군가 그녀의 눈을 두 손으로 가렸다.

“샤를?”

함께 지낸 세월이 제법 길었던 만큼 헤레이스는 바로 손의 주인을 알아봤다. 샤를은 자신임을 단박에 눈치채는 헤레이스의 목소리에 활짝 웃다가 손을 모은 채 침착하게 있는 그녀를 조금 안타깝게 바라봤다.

‘디본의 영애는 어린 나이에도 참 몸가짐이 발라요. 얌전하고 점잖은 게 어른스러워 보기 좋네요.’

헤레이스는 이복형 이즈카엘의 죽음 이후 나이에 비해 조숙하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사람들은 칭찬으로 그런 말을 했겠지만 샤를은 헤레이스의 성숙함이 슬픔에서 온 것을 알았기에 항상 마음이 아팠다.

“내가 누굴 데려왔게?”

그래서 그는 오늘 선물로 헤레이스의 마음이 전처럼 천진난만해지길 바랐다. 그가 여전히 헤레이스의 눈을 가린 채 고개를 뒤로 돌렸다. 그러자 샤를의 뒤에 있던 이가 헤레이스의 앞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놀라서 기절하면 안 돼. 소리 질러도 안 되고. 알았지?”

“응.”

헤레이스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자 샤를이 천천히 손을 뗐다. 그리고 밝아진 헤레이스의 시야에 아직 사내라 부르기는 앳된 청년이 들어왔다.

상대를 알아본 헤레이스의 눈이 커졌다. 당연한 일이었다. 죽은 이가 바로 앞에 있었으니.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가 천천히 이즈카엘에게로 다가갔다. 그리고 마침내 그들 거리가 한 발짝 남았을 때 이즈카엘이 헤레이스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오랜만이야, 헤레이스.”

성인이라기에는 미숙한, 하나 아이라 부르기에는 성숙한 이들은 그렇게 재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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