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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목을 꺾는 악마여-84화 (84/108)

84화.

이즈카엘은 헤레이스가 거짓말을 하고 있음을 알았다. 그는 한 시간 전쯤 분명히 봤다. 그녀가 공작 부인, 샤를과 함께 웃으며 식사하는 모습을.

잘 차려진 식탁 위 음식은 먹음직스러웠다. 독살 시도 이후 음식에 제대로 손조차 대지 못하는 그의 배마저 울리게 할 만큼.

하지만 이즈카엘이 그 식사 시간 내내 몰래 훔쳐본 것은 잘 차려진 음식이 아니었다. 그는 제 이복동생과 또래인 소녀가 어떤 음식에 손을 많이 대는지, 얼마만큼 식사하는지, 또 어떤 주제에 웃었는지 등을 살폈다.

“……점심 먹지 않았어?”

“으, 응. 밀린 숙제를 하느라 시간이 없었어.”

거짓을 말하는 소녀의 얼굴에 홍조가 피었다. 이즈카엘은 붉게 물든 뺨을 잠깐 보다 헤레이스가 손수건 위에 펼쳐 놓은 간식거리 중 쿠키 하나를 집어 들어 입으로 가져갔다.

헤레이스는 그의 식사가 형편없음을 전부터 눈치채고 있었다. 다정한 성미 때문에 그걸 보고도 그냥 넘어가지 못한 것이지. 이즈카엘은 헤레이스에게 동정을 샀다는 사실이 화가 날 정도로 부끄러우면서도 그녀가 절 챙겨 주는 것에 환희를 느꼈다.

“……맛있네.”

기대감 가득한 헤레이스의 얼굴에 이즈카엘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감탄사를 뱉었다. 하지만 헤레이스에게는 부족한 모양이었다. 그녀가 실망 가득한 얼굴로 이즈카엘을 봤다.

“그게 끝이야?”

헤레이스로서는 드물게 보이는 뾰로통한 얼굴이었다. 이즈카엘은 당황해 쿠키를 씹다 말고 헤레이스를 바라봤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것들로만 챙겨 왔는데.”

헤레이스가 그의 손에 들린 나머지 쿠키 조각을 노려보다 중얼거렸다. 머뭇거리던 이즈카엘이 남은 쿠키 조각을 재빨리 입으로 가져갔다. 그리고 그걸 한입에 넣고 삼키며 어색한 동작으로 커다란 원을 그렸다.

“맛있어. 엄청. 많이.”

“풉.”

좀처럼 보기 힘든 모습에 헤레이스가 웃음을 터뜨렸다. 비웃음으로 들릴 수도 있었지만 이즈카엘은 저를 보며 눈을 예쁘게 접어 웃는 소녀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가 저도 모르게 소녀의 얼굴로 손을 뻗었다. 하나 헤레이스의 얼굴에 그의 손이 막 닿을 때쯤, 그들 뒤에서 항상 그러하듯 소년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헤레이스! 형! 여기 있었네.”

이즈카엘은 이런 일이 몇 번째인지 머릿속으로 세다 얼굴을 섬뜩하게 굳혔다. 그가 소녀를 따라다니듯 이복동생도 마찬가지였다. 그렇지 않다면 매번 이리 마주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둘 다 고양이도 아니고…… 왜 하필 이런 곳에 숨어 있는 거야.”

샤를은 이복형의 표정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샤를의 시선도 이즈카엘과 마찬가지로 소녀에게만 붙었기 때문이다. 샤를이 헤레이스의 옆에 털썩 앉았다. 그러다 앞에 펼쳐져 있는 손수건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응? 헤레이스, 배고파? 조금 전에 나랑 같이…… 읍.”

헤레이스가 재빨리 샤를의 입을 막고 눈치를 줬다. 그제야 소녀의 의중을 알아챈 샤를이 눈동자를 굴리다 고개를 끄덕거렸다.

순간 이즈카엘의 얼굴에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졌다. 싫었다. 소녀의 동정은 몰라도, 이복동생의 동정은 싫다는 감정 외 그 어떤 것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샤를, 여기는 어떻게 왔어. 넌 아직 공부할 때잖아.”

“네가 없어서. 너 보고 싶어서 도망쳤어, 헤레이스.”

헤레이스가 묻자 샤를이 그녀에게 바짝 붙으며 애교 가득한 목소리를 냈다. 샤를의 적극적인 마음 표현은 헤레이스에게는 이미 오래전에 익숙해진 일이었다. 그녀가 샤를의 접촉을 자연스레 받아들이며 그에게 걱정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뭐? 공작 부인께서 아시면…….”

“어머니는 낮잠에 드셨는걸. 그러니까 걱정 마. 그리고 너한테 주고 싶은 것도 있어서…….”

샤를이 주머니에서 무언갈 뒤적거리더니 상자를 꺼냈다. 척 봐도 선물이었다. 잘 포장된 선물 상자에 이즈카엘이 제 주머니에 슬그머니 손을 넣었다. 조금 움직인 탓일까. 팔찌는 조금 더 구겨진 것 같았다.

“자! 기대해!”

샤를이 상자를 열자 작은 꽃이 하나 나왔다. 질 좋은 천으로 꽃잎을 하나하나 만들어 낸 것이 척 봐도 귀해 보였다.

“어때? 예쁘지? 헤레이스 너 주려고 빌린스 부인한테 일주일이나 졸랐어. 하나만 접어 달라고.”

헤레이스도 마음에 드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얼굴에 미소가 떠오르자 샤를이 어깨를 으쓱이며 헤레이스의 손바닥에 꽃을 올려놨다.

“예쁘다. 고마워, 샤를.”

“정말? 예뻐? 그럼 헤레이스…… 여기 뽀뽀해 줘. 여기. 여기에.”

제 손을 떠난 꽃은 이미 샤를의 관심 밖이었다. 소년은 소녀의 얼굴에 피어난 미소를 보다 제 입술을 툭툭 건드렸다.

“샤를!”

과한 요구에 헤레이스가 고함을 빽 지르자 샤를이 손사래를 치며 물러났다. 그러나 어딘가 아쉬운지 그는 헤레이스의 눈치를 살피다 조금 누그러진 요구를 해 왔다.

“알았어. 장난이야, 장난. 그럼 대신 여기에 해 줘, 응?”

헤레이스는 바로 옆에 있는 이즈카엘의 얼굴이 어떤지 눈치채지 못한 채 샤를을 흘겨보다가 마지못해 소년의 뺨에 입을 맞췄다. 쪽 하는 소리와 함께 이즈카엘이 이를 갈았다. 그러나 원체 작은 소리라 당사자를 제외하고는 누구도 눈치채지 못했다.

“헤에…….”

“……샤를은 어린애 같아.”

“헤레이스, 네가 귀여워해 주면 영영 어린애로 있을게. 그러니까 나 쓰다듬어 줘. 지금처럼 매일 뽀뽀해…….”

헤레이스를 품에 안으며 샤를이 웃을 때였다. 샤를은 문뜩 등골을 오싹하게 만드는 시선을 느꼈다. 그가 그것을 좇아 이복형을 바라보려 했다. 그러나 고개를 반쯤 돌렸을 때 멀리서 하인이 그를 찾는 소리가 났다.

“샤를 도련님! 도련님! 어디 계세요!”

“어, 어머니가 깨셨나 봐. 어떡하지? 도망친 거 알면 엄청 화내실 텐데.”

“그러니까 왜 도망을 쳐서는…… 빨리 가 봐.”

하인의 외침에 샤를이 호들갑을 떨며 발을 굴렀다. 헤레이스가 샤를의 등을 밀며 빨리 가라면서 재촉했다. 샤를이 마지못해 걸음을 옮기며 둘에게 인사했다.

“둘 다 나중에 봐.”

샤를이 떠나자 조금 전에는 없었던 어색함이 두 사람 사이를 갈랐다. 헤레이스는 어쩐지 이즈카엘이 화가 난 것 같다고 느꼈다.

‘……뭐라고 하지.’

어찌 말을 걸까 고민하던 때였다. 헤레이스의 눈에 이즈카엘의 주머니 밖으로 삐죽 튀어나온 팔찌가 보였다. 여러 가지 색의 실로 꼰 팔찌는 누가 봐도 여자아이의 것이었다. 헤레이스의 눈이 반짝였다.

“이즈카엘, 그거…….”

“…….”

“……혹시 나 주려고 만든 거 아니야?”

소녀의 말에 이즈카엘은 팔찌를 아무렇게나 구겨 넣었다. 하지만 그는 곧 무엇을 생각해 냈는지 팔찌를 꺼냈다. 그리고 헤레이스의 손을 낚아채 그녀의 손목에 팔찌를 끼웠다.

“고마워.”

“…….”

“정말 예쁘다. 정말 예뻐.”

헤레이스가 손을 위로 들어 보이며 팔찌를 살폈다. 어른의 시선에선 조잡하게 느껴질 수 있는 물건이었으나 아직 소녀인 헤레이스에게 이 알록달록한 팔찌는 예쁘게만 보일 뿐이었다.

그녀가 팔찌를 마음에 들어 하는 기색을 보이자 이즈카엘이 입술을 달싹였다. 무언가 망설이는 모습에 헤레이스가 의아한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고마우면 나도 해 줘.”

“응?”

“샤를한테 해 줬던 거 말이야. 나도…… 해 줘.”

이즈카엘의 말을 알아들은 헤레이스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샤를이 그런 요구를 하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즈카엘은……. 소녀가 은발의 소년을 살폈다. 소년은 답지 않게 얼굴을 홍당무처럼 붉히고 있었다.

샤를 때와는 달리 헤레이스도 부끄러움에 휩싸였다. 그녀가 눈조차 깜빡이지 못한 채 제자리에서 굳자 이즈카엘이 거칠게 몸을 틀었다.

“잊어. 괜한 부탁이었어. 나 먼저…….”

쪽.

순간 헤레이스의 입술이 이즈카엘의 뺨에 닿았다가 천천히 떨어졌다. 이번에는 이즈카엘이 몸을 굳혔다.

“……고마워, 이즈카엘.”

귓가에 소녀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닿았다. 견딜 수 없어진 이즈카엘은 결국 몸을 완전히 돌렸다.

“다, 다음에 봐.”

말을 더듬은 그가 전속력으로 뛰기 시작했다. 뒤에 있는 소녀의 얼굴이 궁금했다. 하지만 올라오는 열기에 눈마저 감은 소년은 끝내 뒤돌아보지 못했다.

* * *

황제가 지병을 앓는 친우를 위해 직접 세르펜스 성을 방문했다. 이제는 완전히 병자가 되어 버린 세르펜스 공작 미카엘은 침대에 누워 황제를 맞이했다.

황제는 비쩍 마른 미카엘을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봤다. 황태자 시절 수도에서 함께할 때는 그리 건장한 사내였건만……. 미카엘에게서 그때의 모습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율리스는 아직도 자네를 보지 않는다지? 자네 부부는 도대체 언제 화해할 참인가?”

“…….”

“내가 뭐라 했나. 율리스 그 아이, 성격이 보통이 아니라고 했잖나. 그러게 왜 정부를 들여서는…… 쯧!”

“……그녀와 절 결혼시키신 건 폐하십니다.”

“이제 와 그렇게 말하면 안 되지. 율리스와 결혼해 자네가 얻은 게 얼마인데.”

황제는 여동생 부부가 서로 얼굴도 보지 않는다는 사실에 경악했다. 그러나 율리스도, 미카엘도 이 상황에 대해 아무렇지 않은 모양새였다.

미카엘은 의자에 몸을 기댄 채 저를 한심하게 보는 황제를 바라봤다. 그리고 잠깐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그때 일은 됐습니다. 그보다 폐하께 부탁을 하나 드리고 싶습니다.”

“부탁? 무슨 부탁?”

황제는 숨을 거칠게 몰아쉬는 친우에게 몸을 가까이 가져다 댔다. 병든 미카엘의 목소리는 점차 작아져 코앞에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알아듣기 힘들었다. 미카엘은 황제가 제게 다가오자 끓는 가래를 겨우 삼키고 쉬어 버린 목소리로 말했다.

“……이즈카엘을 좀 맡아 주십시오.”

“…….”

“독살부터 시작해 어제는 그 아이 처소에 불이 났습니다. 몇 번째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이대로면 이즈카엘은 율리스의 손에 죽고 말 겁니다.”

병색이 완연한 목소리였으나 황제의 얼굴은 차갑게 굳어 갔다. 황제가 미카엘에게서 몸을 떼고 인상을 찌푸렸다.

“허? 지금 나한테 자네 사생아를 지켜 달라 부탁하는 건가?”

“…….”

“공작, 잊은 모양인데 율리스와 난 동복형제야. 율리스가 새침데기긴 하지만 그래도 내 귀여운 여동생이라고. 그런데 내 여동생의 마음을 갉아먹는 사생아를 지켜 달라? 자네 미쳤나?”

“…….”

“그따위 말을 하려거든 돌아가지. 율리스가 아니라 내가 당장 자네 사생아를 죽이지 않는 것만 해도…….”

노기 어린 목소리가 형형했다. 다른 이였으면 황제의 목소리에 오금이 저려 온몸을 벌벌 떨고 있을 터였다. 하지만 미카엘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기침을 두어 번 하다가 몸을 겨우 일으켜 황제를 똑바로 마주 봤다.

“……부탁을 들어주지 않으시면 그때 제가 목격한 사실을 말하겠습니다. 율리스와 디본 후작에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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