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이즈카엘은 메데아의 말에 입술을 꾹 물었다. 어린 나이지만 알 수 있었다. 어미는 스스로도 납득 못 하는 말을 아들인 그에게 하고 있었다. 괜스레 반항심이 솟은 이즈카엘은 어미의 눈을 피하며 중얼거렸다.
“……이 성에는 이미 공주님이 있다고 했어요. 어머니 말고요.”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던 손이 멈췄다. 고개를 든 이즈카엘은 거울 속 어미와 눈을 마주하고는 저도 모르게 주춤거리고 말았다. 요요히 빛나는 눈에는 온갖 감정이 넘실거렸다.
“……피곤하니 그 얘기는 그만하렴. 그보다 이즈카엘, 네게 줄 선물이 있단다.”
아들과 눈을 맞춘 메데아는 이즈카엘을 바닥에 내려놨다. 그리고 화장대 서랍에서 무언가 꺼내 아들의 목에 걸었다. 얇은 가죽 줄 끝에는 하얀 눈 결정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내가 네게 마지막으로 해 줄 수 있는 일이야. 항상 지니고 있으렴. 그게 널 보호해 줄 테니.”
눈 결정을 만지작거리던 이즈카엘은 그 순간 직감적으로 알았다. 어미가 제 곁을 떠날 날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 * *
메데아는 죽을 때까지 동화 속 공주님처럼 아름다웠다. 이미 차갑게 식어 버린 시체를 보고도 모두들 아까운 외모라며 수군거리곤 했으니. 그러나 그녀는 공주님이 아니었다. 부적절한 정부인 그녀는 죽은 후에도 미카엘의 곁에 있을 명분을 갖지 못했다.
“그때 그 계집이랑 같이 묻어 버릴 것이지. 아직도 왜 여기에 얼쩡거리고 있지?”
“부, 부인…….”
그럼 공작 부인은 동화 속 공주님일까? 이즈카엘은 그리 생각하지 않았다. 황제의 여동생이라는 그녀는 황금 같은 금발과 고귀함을 지녔으나 이즈카엘에게만은 마녀와 다름없었다.
‘저 더러운 것을 내 눈앞에서 당장 치워!’
이즈카엘을 처음 공작 부인을 봤을 때를 기억했다. 그녀는 그를 세상에서 가장 혐오스러운 벌레 보듯 봤다. 일그러진 표정과 높은 목소리, 그리고 급작스레 행해진 폭력……. 동화 속 공주님이라면 그런 짓을 할 리 없었다.
“더러운 것!”
짝!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메데아가 죽고 나서 어느 순간부터 공작 부인의 폭력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았다.
어미를 잃은 어린아이에게 가해지는 가혹한 폭력에 공작 부인과 가까운 사용인들조차 고개를 들지 못했다. 하지만 이즈카엘은 울지도, 멈추라 애원하지도 않았다. 반항해 봤자 돌아오는 건 정도를 더한 폭력뿐인 걸 이미 경험으로 체득했으니.
“율리스! 미쳤소!”
얼마간 맞고 있었을까. 소란을 듣고 아비가 달려와 제 부인을 막아섰다. 이즈카엘은 공작 부인의 손을 붙잡은 채 고함을 지르고 있는 아비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어미의 죽음 이후 그는 많이 달라졌다. 전보다 마른 몸, 파리해진 얼굴 등 어린아이의 눈으로 본 아비는 죽은 어미와 비슷한 꼴을 하고 있었다.
“내가 왜 미쳐. 미친 건 당신이지! 놔! 내가 더러운 사생아 하나 제 주제 알게끔 교육 좀 한다는데…… 당신이 무슨 상관이야!”
“이즈카엘은 내 아들이오! 아들이라고!”
“아들? 당신 아들은 샤를 하나뿐이야! 저건 세르펜스의 성조차 받을 수 없는 사생아고!”
이즈카엘은 아비가 왜 공작 부인을 만류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아비는 어미를 사랑한다 수없이 속삭였으나 저에게는 무관심한 태도를, 아니 가끔은 저를 기이한 것 보듯 했다.
‘이즈카엘, 너 혹시 네 속에 뭐가 있다 생각한 적 없느냐. 어떤 목소리가 들리거나 하지는 않아?’
어미가 죽은 후에도 아비에게 들은 말이라고는 그것이 전부였다. 이즈카엘은 제 손을 낚아채 공작 부인에게서 벗어나는 아비의 얼굴을 유심히 보다 그냥 앞을 봤다.
‘난 떠날 거야. 다시 내 것을 되찾기 위해…….’
문뜩 아주 어릴 적 어미가 저에게 울며 떠나겠다 말한 날이 생각났다. 어미는 인간 사내는 믿는 게 아니었다고, 모든 것을 버린 대가가 고작 이것이라며 울부짖었더랬다. 뭉개진 목소리로 싫다고 울먹인 어미는 성을 떠나겠다고 이즈카엘에게 말했다.
이즈카엘은 그때 말없이 어미의 손을 잡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어미는 얼마 가지 않아 아비에게 붙잡혔다. 그리고 이즈카엘은 봤다. 아비가 어미에게 하는 짓을…….
‘메데아, 넌 영영 여기서 나갈 수 없어.’
‘싫어! 이거 놔! 놓으라고!’
‘그러게 왜 도망갔나. 날 사랑한다고 해 놓고 왜…….’
어미는 이후 죽을 때까지 별채를 벗어날 수 없었다. 아니, 벗어나지 않았다 말하는 게 옳을지도 몰랐다. 아비는 짐승이었으나 어미 또한 다르지 않았다. 도망치다 잡힌 어미는 자신을 향한 광기 어린 집착과 폭력에 울면서도 이죽이며 웃고 있었다.
‘사랑해, 미카엘.’
제 손을 꼭 쥐고 있는 아비의 손을 보다가 이즈카엘은 갑자기 궁금해졌다. 아비의 등에는 그때 어미가 긁어내린 손톱자국이 아직 있을까?
* * *
메데아가 죽고 미카엘의 건강은 급속도로 나빠졌다. 점점 방 밖으로 나오지 않더니, 3년 만에 하루의 대부분을 침대 위에서 보내게 된 그는 더는 부인에게서 이즈카엘을 지켜 주지 못했다.
이즈카엘을 향한 폭력은 이제 일상이 됐다. 공작 부인은 이제 그를 불러내 매질을 했다. 점점 도를 지나치는 폭력에 사용인들조차 고개를 내저었지만 공작 부인을 막을 수 있는 이는 없었다.
나이 많은 한 사용인은 어느 날 그에게 성을 떠나라 말했다. 이대로면 정말 죽을 거라고 말하는 얼굴에는 동정이 가득했다. 하지만 이즈카엘은 성을 떠날 생각 따위 하지 않았다. 아니, 못 했다.
“이, 이즈카엘…….”
괴로움에 허덕이는 몸을 이끌고 목적지에 앉아 있자 예상대로 퉁퉁 부은 얼굴에 얼음주머니가 닿았다. 이즈카엘은 제 곁에 앉아 울먹이는 여자아이를 봤다. 새까만 머리카락에 커다란 푸른 눈. 여자아이의 얼굴을 보는 순간 욱신거림조차 사라졌다.
“……헤레이스.”
헤레이스는 어미가 죽기 몇 달 전 세르펜스 성에 도착했다. 하지만 이즈카엘은 메데아의 죽음 이후에나 헤레이스와 마주했다.
‘괜찮아? 안 아파?’
‘…….’
‘……난 엄청 아팠는데. 아!’
별채 정원에서 우연히 마주친 헤레이스는 율리스에게 뺨을 맞은 이즈카엘을 보고 깜짝 놀란 얼굴을 했다. 그러다가 지금처럼 울먹이며 그의 상처를 닦아 줬다. 이즈카엘은 그날 성가시다는 듯 헤레이스의 손을 쳐 내고 달아났지만 이후 공작 부인의 눈에 띌 위험을 감수하면서도 성 여기저기를 서성였다.
“왜 그러시는지 모르겠어. 나한테는 친절한 분인데 왜 이즈카엘한테만…….”
그러길 3년 가까이……. 이즈카엘은 제가 헤레이스에게 묘한 감정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인정했다. 평상시에는 뛰는지 감도 오지 않는 심장이 이 작은 여자아이 옆에서만은 터질 듯이 뛰었고 어두침침한 세상은 이상하리만치 밝아졌다.
“울지 마.”
“피가 나잖아. 아플 텐데. 흐윽…….”
“난 괜찮으니 울지 마, 헤레이스.”
헤레이스에게 손을 댈 때면 피부가 화끈거렸다. 이즈카엘은 헤레이스를 달래 주는 척 작은 몸을 안았다. 그리고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공작 부인에게 발각된 보람이 있었노라 생각하며.
“헤레이스! 어디 있어! 헤레이스!”
하지만 이즈카엘의 만족감은 오래가지 않았다. 가까이서 헤레이스를 부르는 사내아이의 목소리가 들리더니, 곧 세르펜스 공작만큼이나 붉은 머리가 쏙 튀어나왔다.
“샤를?”
익숙한 얼굴에 헤레이스가 이즈카엘의 품에서 벗어나 고개를 돌렸다. 헤레이스를 발견한 샤를이 활짝 웃는 얼굴을 하다 그녀의 옆에 있는 이즈카엘을 보고 놀란 얼굴을 했다.
“나랑 그림 그리기로…… 어! 형! 얼굴이 왜 그래?”
“……별일 아니야.”
이즈카엘을 바라보는 얼굴에는 걱정이 가득했다. 하나 이즈카엘은 샤를을 본 순간부터 어딘가 불편하고 또 불쾌했다. 제게 친절한 남동생이 싫은 것도 아닌데……. 그의 호박색 눈이 헤레이스의 팔을 자연스레 잡는 샤를의 손으로 향했다.
“미안해. 어머니께서 또 형을…….”
“신경 쓸 필요 없어.”
냉랭한 이즈카엘의 대꾸에 샤를이 미안한 얼굴을 하며 입을 닫았다. 어색한 침묵이 세 아이 사이를 감돌았다.
“샤를, 그림은 다음에 그리자. 이즈카엘은 본채에 들어갈 수 없잖아.”
두 사람 중간에서 눈치를 보던 헤레이스가 불쑥 끼어들어 침묵을 깼다. 그리고 한 손에는 샤를의 손을, 또 한 손에는 이즈카엘의 손을 잡고 말했다.
“별채에 가서 숨바꼭질은 어때? 우리 다 같이 할 수 있잖아.”
“그래! 난 좋아!”
샤를은 헤벌쭉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반짝거리는 동생의 눈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이즈카엘이 제 손을 흔드는 손에 고개를 돌렸다. 헤레이스가 그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이즈카엘도 같이 갈 거지?”
“……좋아.”
엉겨 있던 마음이 누그러지는 기분이었다. 이즈카엘이 고개를 끄덕이자 헤레이스가 환한 웃음을 지으며 있는 힘껏 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뒤를 이즈카엘과 샤를이 천천히 쫓았다.
그러나 세 아이는 몰랐다. 정원을 가로지르는 그들을 높다란 성에서 누군가 보고 있었음을.
“……내 삶을 갉아먹는 벌레를 더는 두고 보기 힘들구나.”
“예?”
“전에 말했던 물건을 준비하렴.”
* * *
이즈카엘은 저를 보며 울먹이는 헤레이스의 얼굴에 주머니에 넣은 손을 조금 움직였다. 몇 가지 색실로 엮은 팔찌가 작은 손짓에도 불안히 구겨졌다.
“이즈카엘, 왜 이렇게 얼굴 보기가 힘들어. 별채로 찾아가도 보이지 않고…… 며칠 동안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조금 아팠어.”
말은 그렇게 했지만 이즈카엘은 죽다 살아났다. 음식을 입에 넣기 무섭게 내장을 움켜쥐는 고통이 몰려오고 검은 피가 쏟아졌다. 며칠 내내 지속된 끔찍한 고통에 그가 입 안쪽을 꾹 물었다.
‘다행입니다. 먹은 양이 적은 데다 도련님께서는 다른 이들에 비해 훌륭한 체질을 타고나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이미…….’
아비의 주치의가 빠르게 조치하지 않았다면 그는 이미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으리라. 지금쯤 오래전 곁을 떠난 어미의 옆에 묻혔겠지.
“정말? 이제 괜찮아?”
아팠다는 말에 헤레이스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의 이마에 손을 가져다 댔다. 그러다가 제 손과 비슷한 온도를 확인하고 손을 거두었다.
‘……싫어.’
하얀 손이 제게서 떨어지자 아쉬움이 샘솟았다. 그러나 그런 이즈카엘의 속내도 모른 채 헤레이스는 옆에 둔 무언가를 그의 앞에 내밀었다.
“이거 가져왔는데 잘됐다.”
소녀가 내민 것은 동그랗게 모아 묶은 손수건이었다. 헤레이스가 그들이 앉아 있는 풀 위에 손수건을 올려놓고 매듭을 풀었다. 그러자 갖가지 간식거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플 때는 잘 먹어야 한대. 마침 나도 점심을 걸렀어. 그러니까 이거 같이 먹자, 이즈카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