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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목을 꺾는 악마여-82화 (82/108)

82화.

율리스는 어린 샤를의 손을 잡은 채 멍하니 친우를 내려다봤다. 하얀 꽃에 쌓인 다프네는 죽었다 믿기 어려울 만치 깔끔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어딘가 생기가 없는 얼굴, 화장으로도 가려지지 않는 파리한 낯빛이 그녀의 영혼이 이미 이승을 떠났음을 알려 줬다.

“어머니…….”

어린 샤를이 율리스의 손을 붙잡고 작게 흔들었다. 이런 어미의 모습은 처음 보는지 아이의 얼굴에는 걱정이 한가득하였다.

평소라면 샤를을 다독이면서 괜찮다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율리스에게는 아들조차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율리스는 그렇게 멍하니 서 다프네의 관이 닫히고 그 위로 흙이 쌓여 가는 모습을 지켜봤다.

“이것으로 고인께서 신의 곁으로 떠났음을 선언합니다. 안식이 깃들길…….”

사제의 마지막 말이 끝나자 장례식에 참관했던 많은 이들이 흩어졌다. 그러나 율리스는 사람들이 떠나고도 한참을 제자리에 서 있었다. 잊고 있었지만 이렇게 보낼 친우는 아니었다. 부채감과 속 좁은 제 마음에 대한 원망이 죄책감이 되어 그녀를 찔렀다.

“다프네……, 흐윽.”

떨어진 눈물방울이 땅을 적셨다. 율리스는 고요해진 친우의 묘비 앞에 양 무릎을 꿇고 눈물을 쏟았다. 샤를이 그녀에게 울지 말라며 옆에서 울먹였다.

“황녀 전하.”

어린 아들조차 무시한 채 한참 울고 있는 율리스의 옆으로 누군가 다가왔다. 아직 앳된 아이의 목소리. 율리스는 문뜩 드는 기시감에 고개를 들었다.

“넌…….”

율리스는 대번에 아이가 누구인지 알아챘다. 디본 후작의 금발을 물려받은 아이의 눈은 다프네의 푸른색을 그대로 빼닮았다. 율리스가 크리스를 보며 얼굴을 와락 구겼다.

“……네가 크리스구나. 다프네의 아들이야.”

율리스는 크리스를 끌어안고 또 한 번 오열하다 한참 만에 눈물을 그쳤다. 그리고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

“날 어떻게 알아봤니?”

“어머니께서 보면 알 수 있다 하셨어요.”

아이의 말을 들으니 가슴이 더 미어졌다. 율리스는 다시 샘솟는 눈물을 가까스로 삼킨 채 자신을 향해 입술을 달싹이는 크리스를 봤다.

“그래, 크리스. 무슨 일이야. 무슨 일로 날…….”

“도와주세요, 황녀 전하. 제 여동생이 위험해요.”

크리스는 율리스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빠른 속도 말했다. 여동생? 헤레이스를 기억해 낸 율리스가 당황한 얼굴로 눈물을 닦았다.

“그게 무슨…….”

“부탁드릴 분이 황녀 전하밖에 없어요. 집안에 있는 다른 어른들은 아버지 눈치만 살피니까요.”

아이의 얼굴에는 근심과 걱정이 잔뜩 내려앉아 있었다. 심상치 않은 일음을 직감한 율리스가 얼굴을 굳혔다. 그러고 보니 장례식 때 눈앞에 있는 크리스의 뒷모습은 언뜻 본 기억이 났지만, 디본 후작과 샤를 또래 여자아이의 모습은 보지 못했다.

“……헤레이스는 어디 있니? 그리고 네 아비는?”

“동생은 어머니 침실에 갇혀 있어요. 아버지도 아마 그곳에……. 계속 거기에 뒀다간 아버지가 그 애를 말려 죽일 거예요.”

율리스는 제가 들은 말을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했다. 그러자 크리스가 크게 숨을 들이쉬더니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어머니께서 돌아가신 이후로 아버지께서 헤레이스를 계속 어머니 이름으로 부르세요. 게다가 그 방에서 자기 싫다는 그 애한테 손찌검도 하셨어요. 그리고 며칠 전에는…….”

“…….”

“……헤레이스를 호수에 빠뜨리셨어요. 어머니가 아니면 그냥 죽으라고……. 이대로면 헤레이스가 위험해요. 아버지는 미쳤어요!”

율리스는 크리스의 말을 이해하자마자 경악 어린 얼굴을 하고는 곧장 다프네의 방으로 걸음 했다. 그리고 그녀가 마주한 광경은 크리스의 말을 증명했다.

다프네의 어린 시절을 꼭 빼닮은 여자아이는 커다란 침대에 짐승처럼 묶인 채 쪼그리고 앉아 있었고, 디본 후작은 침대 가까이 있는 의자에 앉아 다프네의 이름만 중얼거리고 있었다.

헤레이스의 몸은 이곳저곳 할 것 없이 상처가 가득했다. 그 상흔들을 확인한 율리스가 참지 못한 채 디본 후작에게 다가가 방을 장식한 유리병으로 그를 내리쳤다.

와장창.

디본 후작이 머리에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율리스는 제 배경을 이용해 경악한 디본가 식솔들을 제압했다. 알려진다면 귀족 사회를 발칵 뒤집을 정도로 문제가 큰 행동이었지만 머리 꼭대기까지 화가 난 율리스는 개의치 않았다.

그녀는 헤레이스를 의원에게 보이고 품 안에 안은 채 어르다가, 디본 후작이 깨어날 낌새가 보이자 헤레이스를 세르펜스 공작가 기사들과 샤를이 있는 곳으로 보냈다. 그리고 눈을 뜬 디본 후작에게 격앙된 목소리로 말했다.

“아이들은 내가 데려가겠소. 후작 같은 미치광이한테 맡길 수는 없지.”

“……데려가십시오. 다프네도 그걸 원할 테니.”

디본 후작은 율리스의 말에 한참 만에 대꾸했다. 무언가를 포기한 듯 고개를 푹 숙인 그의 눈에는 초점이 없었다.

“다프…… 아니, 헤레이스의 근황은 알려 주실 필요 없습니다. 그냥 당분간 잘 데리고 있어 주십시오.”

“그렇지 않아도 그럴 참이었소.”

“…….”

“경고하지, 후작. 헤레이스가 성인이 될 때까지 볼 생각 마시오.”

“…….”

“어긴다면 폐하께 말씀드려 그대의 죄를 묻도록 하겠소.”

제국의 법상 아이들에 대한 학대는 중범죄로 매우 엄격하게 다스려졌다. 물론 대부분의 학대는 부모와 자식 간의 일로 숨겨졌으며, 신분 높은 가해자가 신분 낮은 아이에게 가하는 학대는 무죄로 처리되는, 어찌 보면 무의미한 법이었다. 하지만 황제가 아끼는 동복동생인 율리스는 그러한 법도 제대로 집행할 수 있는 신분이었다.

“오빠도 같이 가, 응?”

“안 돼, 헤레이스. 난 디본가의 후계야. 이럴 때 내가 가문을 비워서는 안 돼.”

“하지만…….”

“편지할게. 그리고 자주 만날 수 있을 거야.”

율리스는 헤레이스와 더불어 크리스도 데리고 가려 했다. 하지만 크리스는 어찌 된 일인지 떠나는 것만은 완강하게 거부했다. 결국 율리스의 마차에는 헤레이스만 탔다.

가까웠던 오라비와 떨어지는 것이 서글펐는지 헤레이스는 마차가 출발하고도 한동안 침울해했다. 하지만 그런 헤레이스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 채 계속해서 달래 주는 이가 있었으니, 율리스와 함께 있던 샤를이었다.

“울지 마, 헤레이스. 네가 울면 나도 슬퍼. 자! 이거 먹어 보자. 아 해 봐.”

샤를은 헤레이스의 손을 한시도 놓지 않은 채 계속해서 얼렀다. 어린 나이였지만 또래 여자아이를 달래는 모습이 퍽 의젓했다.

자신에게 더할 나위 없이 친절한 샤를과 율리스. 헤레이스는 태생이 따뜻한 아이인지 금세 웃음을 되찾았다. 북부로 향하는 마차 안에는 어느새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가득했다.

‘잘된 일이야. 좋은 짝이 되겠어.’

율리스는 제 아들과 잘 어울리는 헤레이스를 보며 다프네에게 가졌던 부채감을 조금이나마 지웠다. 아이들이 자라 좋은 짝이 된다면 저세상에서 다프네도 안도하리라.

그러나 가까스로 되찾은 율리스의 평온은 오래가지 못했다. 시작은 헤레이스의 짐 사이에서 발견한 낡은 일기장에서부터였다.

“그게 뭐니, 헤레이스?”

“어머니 방에서 발견했어요. 안에 그려진 그림이 예뻐서…… 글자도 있는데 아직 읽을 수가 없어요.”

“이리 줘 보렴.”

헤레이스의 답에 율리스는 그것이 다프네의 일기장임을 알아챘다.

〈공작 각하께서 황녀님을 슬프게 하신다. 각하가 밉다. 황녀님은 귀하고 아껴 주셔야 하는 분인데. 〉다프네의 일기에 율리스는 아이들 몰래 눈물을 쏟았다. 일기장에는 하루도 빠짐없이 자신의 이름이 나왔다. 떠난 친우의 마음이 그대로 느껴져 고마우면서도 마음이 아렸다.

하지만 슬픔은 잠깐이었다. 앞부분만 조금 보던 율리스는 어쩌다 넘어간 일기장의 중간 페이지에 눈을 크게 떴다.

〈황제 폐하께서 또 부르셨다. 너무 괴롭다. 신이시여. 더러워진 절 용서하지 마세요. 〉〈갑자기 생긴 회의에 그이는 밤새 돌아오지 않았다. 그리고 예상대로 황제 폐하의 시종이 찾아왔다. 〉일기장을 한 장 한 장 넘기는 손이 파르르 떨렸다. 율리스는 입을 막은 채 떨리는 눈으로 다프네의 일기를 읽다 어느 장에서 멈췄다.

〈아이를 임신했다. 그이는 아이가 딸이기를 바란다. 마음이 너무 괴롭다. 〉일기가 적힌 날짜는 샤를이 태어난 해였다. 율리스는 황급히 일기를 덮었다. 더는 읽을 자신이 없었다.

‘오라버니는 항상 다프네에게 친절했는데…….’

율리스는 오라비 프란시스를 떠올렸다. 프란시스는 황제였지만 동복동생인 율리스에게는 언제나 다정하고 친절한 이였으며, 샤를을 제외하고는 그녀에게 하나 남은 소중한 이였다.

‘……아냐. 오라버니가 그럴 리 없어.’

그녀는 다프네의 일기를 제 짐 깊숙이 넣었다. 체한 듯 속이 불편하고 머리가 아팠지만 율리스가 당장 할 수 있는 일은 눈을 감고 회피하는 것뿐이었다.

* * *

이즈카엘은 어미의 이름을 메데아라 알고 있었다. 그러나 아비를 제외한 누구도 그녀를 메데아라 부르지 않았다.

“저게 그 여자의…….”

“쉿! 주인님 귀에 들어가면 어쩌려고…….”

“주인님보다야 부인이 문제지. 고귀한 황가 출신께서 정부에 사생아라니…….”

세르펜스 성에서 메데아는 보통 공작의 정부라 불렸다.

“……정부가 뭐예요?”

이즈카엘은 담 구석에서 여자들의 이야기를 훔쳐 듣고 어미에게 달려가 물었다. 멍한 얼굴의 메데아는 허리 끝까지 내려오는 은발을 빗어 내리다 아들의 질문에 어두운 얼굴을 했다.

“정부? 누가 네게 그런 말을 했어?”

“사람들이요. 여자건 남자건 어머니를 아버지의 정부라 불러요.”

메데아는 빗을 내려놓고 아들을 안아 무릎에 앉혔다. 자신과 똑같은 머리색에, 아비의 금안을 가진 아들은 보고만 있어도 사랑스러웠다.

“……정부란 아버지께 제일 사랑받는 여자라는 뜻이란다.”

메데아의 목소리는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이즈카엘은 생기 없는 어미의 낯을 빤히 들여다봤다. 그림처럼 아름다운 어미는 가끔 정말 인간 같지 않았다.

“왜 그런 얼굴이니?”

“……들으면 알 수 있어요. 그건 어머니 말씀처럼 좋은 단어가 아니었어요.”

이즈카엘의 대꾸에 메데아가 아들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그리고 한참 만에 꾸며 낸 것이 분명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건 사람들이 이 어미를 질투해서 그런 거란다. 어제 읽어 준 동화책에서도 봤지? 나쁜 사람들은 항상 아름다운 공주님을 질투하잖아.”

“하지만…….”

“사람들 말 신경 쓰지 마. 이즈카엘, 넌 미카엘의 첫 번째 아이야. 그리고 난 그가 사랑하는 여자고.”

“…….”

“그래. 그런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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