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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목을 꺾는 악마여-81화 (81/108)

81화.

“공주님이라니요. 그런 말씀은…….”

어린 딸들에게 으레 하는 말에 다프네의 얼굴이 파리해졌다. 율리스는 그제야 이상함을 조금 느꼈으나 곧 예의를 중시하는 다프네의 염려라 생각하며 넘겼다.

“뭐 어때. 너희 부부에게는 공주님이지, 뭐. 그보다 헤레이스가 널 닮아 예쁘다는 말은 들었어. 디본가 초상화를 그린 화가가 천사가 나타났다며 그림을 그리다가 울었다지?”

“……과장된 이야기예요. 아직 어린 아기일 뿐인걸요.”

“수도에 온 김에 보고 가야겠어. 널 닮았으면 분명 예쁜 아기일 거야. 오랜만에 크리스도 보고 싶고. 모레쯤 디본 후작가에 들를까? 샤를도 데리고 갈게.”

“네……. 언제든지요. 언제든 오세요.”

다프네가 머뭇거리다가 율리스의 재촉 어린 손길에 가까스로 고개를 끄덕였다. 입술을 잘근 깨무는 모습이 무언가에 쫓기는 사람 같았다.

“그러고 보니 샤를과 헤레이스의 나이가 비슷하네. 태어난 해가 다를 뿐이지 실제로는 넉 달 차이잖아.”

“…….”

“어쩜! 잘된 일이야. 이참에 우리 샤를과 헤레이스를 미리 짝지어 놓으면…….”

“안 돼요!”

친우의 아이를 생각하며 율리스가 조잘거릴 때였다. 살짝 시선을 아래에 둔 채 그녀의 말을 듣고 있던 다프네가 고개를 번쩍 들며 소리쳤다. 너무도 명백한 거절에 율리스가 당황한 목소리로 반문했다.

“뭐?”

“그, 그건 안 돼요!”

“다프네, 왜 그래?”

무례한 거절에 기분이 상할 법도 했지만 율리스는 그보다 다프네가 걱정이었다. 파리한 얼굴에는 어느새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율리스가 손수건을 꺼내 다프네의 얼굴을 닦아 줬다.

“어디 아파? 얼굴색이 안 좋아. 궁의를 부를까?”

“아니. 아니에요.”

다프네가 떨리는 손으로 찻잔을 들더니 식어 버린 차를 들이켰다. 몇 번의 숨을 고른 끝에 그녀가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은 듯하자 율리스는 그제야 섭섭한 티를 냈다.

“……왜 싫은 거야. 내 아들, 네 딸이잖아. 나 좀 섭섭해, 다프네.”

“전…… 그냥, 샤를 도련님은 세르펜스 공작가의 적자이자 후계시잖아요. 헤레이스는 샤를 도련님의 짝이 되기에는 부족해요. 디본가에서 태어났다지만 제 출신도 있고…… 공작가와 황실의 피를 타고난 분과는 어울리지 않아요.”

다프네의 답을 들은 율리스의 얼굴에 안타까움이 서렸다. 친우가 왜 그리 반응했는지 알 것 같았다. 힘들다 투정 부린 적은 없었지만 다프네는 디본가 노부인에게 몇 년이고 출신으로 괴롭힘을 당했다.

초창기에는 노부인 아래에 있는 시녀장이 명령이라는 이름 아래 감히 다프네의 종아리를 매질한 일도 있었다. 율리스가 친우를 갑작스레 찾아 그 장면을 목격하지 못했으면 다프네는 그 후로도 그따위 일들을 당했으리라.

그때 노부인의 시녀를 가시나무로 채찍질해 수도에서 내쫓은 율리스였지만 아직도 분이 안 풀리는지 그녀는 이를 갈다 다프네의 손을 꼭 잡았다.

“물론 내 아들의 짝이니 집안이나 출신도 중요하지. 하지만 다프네, 헤레이스는 네 딸이잖아. 그것만으로도 헤레이스는 샤를의 짝으로 충분한걸. 게다가 조금 외진 곳에 터를 잡고 있을 뿐이지, 네 태생인 몰랑 자작가도 훌륭한 귀족가야. 무엇보다 지금의 넌 디본가의 안주인이야. 그리고 네 아이의 성은 모두 디본이지. 그러니 괜한 걱정 마.”

“…….”

“누구도 헤레이스를 내 아들의 짝으로 부족하다 여기지 않을 거야. 감히 그런 말을 하는 인간이 하나라도 나타나 봐. 내가 가만두나. 그러니 다프네, 우리 아이들을 이어 주자. 응? 좋잖아. 너와 내 아이가 가족이 되는 거.”

누구도 이 오만한 황녀 출신의 공작 부인에게서 이런 말을 듣지는 못할 것이다. 다프네는 저를 향한 율리스의 배려와 마음에 입술을 살짝 깨물어 울컥 올라오는 감정을 삼켰다. 그리고 무언가 망설이던 그녀가 한참 만에 율리스의 손을 마주 잡고 눈을 마주쳤다. 잘게 떨리는 푸른 눈은 여전히 불안정했지만 또렷이 율리스에게 향해 있었다.

“황녀님.”

“응?”

“사, 사실…….”

똑똑.

그러나 다프네가 막 입을 열 때, 밖에서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율리스는 잠깐이라고 말하고는 밖을 향해 들어오라 소리쳤다. 그리고 곧 들어온 시종과 시녀들 중, 시종 하나를 알아본 다프네의 얼굴이 지금까지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딱딱하게 굳어졌다.

“황후 폐하께서 공작 부인을 따로 뵙자고 하십니다.”

“황후께서?”

무슨 용건이든 물리려 했던 율리스가 한숨을 푹 쉬었다. 다른 이들의 청은 다 거절할 수 있는 그녀였지만 오라비 부부는 예외였다. 그들은 그녀의 가족이었지만 그 전에 제국의 황제와 황후였다. 율리스가 고개를 작게 젓고는 다프네의 손을 꾹 잡았다가 놓았다.

“가 봐야겠네.”

“아…….”

“광산 채굴 건으로 황후 폐하의 오라비와 내 남편이 작게 다퉜거든. 가문에서 기사로 키우던 아이 둘이 죽었다나 뭐라나. 아마 그것 때문에 부르는 걸 거야.”

율리스는 짐작 가는 이유를 설명하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다프네는 제게서 멀어지는 율리스의 손을 향해 손을 뻗었다가 어느 눈길에 곧 가슴께로 다시 가져갔다. 숙여진 얼굴 아래 그늘이 어두웠다.

“마음껏 쉬다 돌아가. 오늘 저녁…… 아니다. 저녁은 오라버니와 약속이 있으니까 내일 봐. 내일은 방해 없이 마음껏 이야기할 수 있을 거야.”

“네. 나중에…… 나중에 봬요.”

율리스가 문밖으로 나서자 방 안에 들어왔던 많은 시녀와 시종들이 그 뒤를 따랐다. 하지만 방에 들어올 때부터 다프네만을 뚫어져라 보고 있던 시종은 나가지 않았다. 다프네만큼이나 젊은 그는 한창 잘나가는 집안의 장남으로, 출신과 능력을 이용해 황제의 시종 자리를 당당히 차지한 이였다.

“부인.”

“…….”

“부인께서는 저와 따로 가셔야겠습니다.”

타인의 기척이 완전히 사라지자 시종이 다프네에게 말했다. 다프네는 시종의 검은 눈을 두려운 듯 마주 보지 못한 채 간신히 고개를 저었다.

“싫, 싫어요. 난 남편에게, 그이에게 가, 가겠어요.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디본 후작은 폐하의 명으로 급한 회의에 들어가셨습니다.”

다프네의 답을 미리 듣기라도 한 듯 시종이 바로 말하며 느릿한 몸짓으로 그녀의 앞에 허리를 숙였다. 그리고 감히 무례하게 허락도 없이 다프네의 손을 잡고 손등에 입을 맞추며 손목을 주물렀다.

“부인.”

시종의 입술이 손목까지 타고 오른다 싶더니 그의 입술이 곧 다프네의 귓가에 닿았다. 뱀처럼 징그러운 숨소리를 낸 그가 다프네에게 나지막하게 주인의 명을 전했다.

“빨리 오시라는 폐하의 명입니다.”

황제를 일컫는 단어에 다프네가 숨을 멈췄다. 시종이 딱딱하게 굳은 다프네의 팔을 쓰다듬으며 계속해서 속삭였다.

“설마 폐하의 명을 어길 생각입니까?”

“…….”

“계속 고집부리시면 폐하의 진노가 머리 위로 떨어질지 모릅니다. 부군과 아이들의 앞날을 생각하셔야지요.”

남편과 아이들까지 나오자 견딜 재간이 없었다. 결국 다프네는 소리 없는 울음을 터뜨리며 몸을 일으켰다.

“아…… 잠깐, 가기 전에 충고 하나 드리지요.”

시종이 비틀거리는 그녀를 부축하는 척하다 억지로 카우치에 눌러 앉혔다. 일어나려고 했던 다프네가 힘없이 자리에 앉아 시종을 올려다봤다. 시종이 다정한 목소리를 꾸며 내다 손가락을 다프네의 입에 가져다 댔다. 입술을 내리누르는 손가락의 힘이 제법 강했다.

“황녀……, 아니 세르펜스 공작 부인께서는 곧 북부로 다시 돌아가실 겁니다. 그러니 괜한 말은 마시고 지금처럼 침묵하며 폐하께 복종하십시오. 그게 폐하께서 원하는 바이자 부인과 가족이 사는 길입니다. 아시겠습니까?”

시종의 말은 다프네의 마지막 희망을 꺾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다프네는 율리스의 환한 미소와 제게 내민 그녀의 손을 기억하고 고개를 살짝 틀었다.

그러나 그녀가 작은 부정의 뜻을 내비치자마자 시종은 그녀의 턱을 틀어잡고 제자리로 돌려놨다. 그리고 여전히 다프네의 입술 위에 자리한 손가락에 힘을 주며 재차 종용했다.

“답을 하셔야지요. 알아들으셨습니까?”

결국 시종의 압박을 이기지 못한 다프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뺨을 가로지른 눈물이 시종의 손가락을 적셨다. 시종이 제 손가락에 묻은 눈물을 털어 내더니 씩 웃으며 다프네 앞으로 안내하듯 팔을 뻗었다.

“그럼 가시죠.”

방을 나서는 다프네의 뒤로 긴 그림자가 흐르듯 움직였다.

그리고 그날, 율리스와 황제 부부가 저녁을 함께하기 직전까지 다프네는 황제만이 드나드는 은밀한 공간에서 피눈물을 쏟았다.

* * *

“뭐? 다프네가 없어?”

“그게…… 이것만 전해 주시라고.”

율리스는 다음 날 다프네를 만나지 못했다. 무슨 일인지 다프네는 급히 지방에 있는 디본가 별장으로 내려가 버렸고 율리스에게 당분간 만나기 어려울 것 같다며 편지를 전했다. 몇 년 만에 만났는데……. 많이 섭섭했던 율리스는 답장조차 않았다.

“……폐하께 인사드리고 이만 돌아가자. 더는 수도에 있을 필요가 없을 거 같구나.”

함께했던 전이라면 금세 풀렸을 마음이었다. 그러나 두 사람 사이의 물리적 거리는 너무도 멀었고, 끈끈한 우정도 어느새 녹이 슨 청동 거울처럼 빛이 바랬다.

“그이는?”

“그게…….”

“솔직하게 말해.”

“그, 그 여자가 머무르는 곳에…….”

“떠날 때도 거기 있더니…… 내가 수도로 간 이후 별채에서 나온 적이 있더냐.”

게다가 차가운 북부로 돌아간 율리스를 맞이한 것은 사라지지 않는 남편의 정부와 사생아, 그리고 날이 갈수록 정부에게 집착하며 광증을 보이는 남편이었다.

“얼마 동안 거기서 나오질 않았느냐고!”

“……그때부터 쭉 별채에 머물고 계십니다.”

율리스의 신경은 나날이 날카로워졌고 여유가 사라진 그녀는 다프네를 잊은 채 색깔 없는 세월을 보냈다.

“그 사람한테 전하렴. 폐하의 서신에 직접 답하라고.”

“예.”

“일조차 안 할 생각이라면 샤를에게 자리를 물려주기나 할 것이지. 한심해서는.”

어느 순간부터 율리스는 더는 남편에게 애정을 구걸하지 않았다. 그녀는 한때 사랑해 마지않던 남편을 어느새 남편의 정부와 사생아만큼이나 미워하고 증오했다.

“샤를, 내 아가.”

“네, 어머니.”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 그래야 이 어미가 슬프지 않아요.”

“네. 열심히 공부할게요, 어머니.”

버석함만 남은 그녀의 삶에 마지막 희망이자 색이라고는 어린 아들 샤를뿐이었다. 율리스는 샤를을 가르치고 돌보는 일에만 온 신경을 쏟았다.

그렇게 어느새 5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겨울이 막 지난 어느 봄날, 율리스는 일상이 된 편두통 때문에 겨우 카우치에 기댄 채 차만 마시고 있었다.

“부, 부인!”

“왜 그렇게 소란이야. 머리가 아프니 작게 말하렴.”

“그게 디본가에서…….”

결혼 전부터 데리고 있던 시녀가 편지 하나를 내밀었다. 서신은 부고를 알리는 검은색이었다. 율리스는 디본가의 인장을 보고 다급한 손길로 서신을 뜯다가 손을 떨구었다.

다프네 디본…… 결코 적혀서는 안 될 친우의 이름이 선명히 박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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