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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목을 꺾는 악마여-80화 (80/108)

80화.

그러나 마음속 깊은 곳 불안은 적중했다. 평소처럼 작은 다툼이었을 뿐이었건만 메데아는 사라졌다. 설산의 눈처럼 하얀 그녀가 이대로 사라진다면? 미카엘은 덜컥 겁이 났다. 그리고 사내의 두려움을 눈치챈 아이의 목소리가 다시금 파고들었다.

“메데아는 너랑 달라. 그녀는 인간인 널 언젠가는 지겨워할 거야.”

“아냐. 메데아는 날 사랑한다고 말했어. 그녀는 화가 나 잠시 외출했을 뿐이야.”

“정말? 그렇게 생각한다면 왜 기사들에게 그녀를 끌고 오라 명했어?”

“…….”

“알고 있잖아. 메데아는 네 곁에서 도망친 거야. 한낱 인간에 불과한 널 참지 못하고 떠난 거지.”

귀를 막고 듣지 않아도 될 말이었건만, 미카엘은 제 심장을 찌르는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아들이 뱉는, 아니 아들의 목소리를 빌린 어떤 존재가 내뱉는 단어 하나하나가 그를 난도질했다.

철컹.

결국 떨림을 견디지 못한 미카엘의 손에서 검이 추락했다. 그리고 참담한 얼굴로 무릎을 꿇는 미카엘을 향해 그것이 느릿한 목소리로 마지막 쐐기를 박았다.

“내게 허락된 짧은 시간이 끝나 가.”

“…….”

“내가 네게 주는 마지막 충고야, 미카엘. 메데아를 믿지 마. 그녀는 다른 이에게도 유일한 존재가 되어 달라 수없이 속삭이고는 했지. 영원히 사랑하겠다고 수천 번, 아니 수만 번 말했어. 하지만…….”

“…….”

“……그녀의 사랑은 결코 영원하지 않았어.”

* * *

“다프네!”

율리스는 홀에 들어서자마자 한 귀부인을 보고 그대로 달려들었다. 황녀 출신의 오만한 그녀가 체통도 벗어던진 채 호들갑을 떨자 사람들의 이목이 쏠렸다.

“보고 싶었어.”

율리스가 덥석 안은 이는 디본 후작의 부인 다프네였다. 사람들은 검은 머리의 아름다운 귀부인을 확인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황녀님. 그동안 몸 건강히 지내셨어요?”

다프네는 어릴 적부터 율리스의 말동무이자 시녀로 곁을 지킨 여인이었다. 다정다감하고 조용한 성미의 그녀는 오만하고 까다로운 황녀였던 율리스를 잘 보필했고, 율리스도 또래의 그녀를 퍽 아꼈다. 덕분에 그녀들은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친우가 될 수 있었으며, 율리스가 세르펜스 공작과 결혼해 북부로 떠나기 전까지 거의 매일 붙어 다니다시피 했다.

“오랜만에 보는데 너무 딱딱하잖아. 나 섭섭해지려고 해.”

“보는 눈이 많으니까요.”

“뭐 어때. 그럼 이리로 와. 빨리.”

율리스는 조곤조곤하게 말하며 고개 숙이는 다프네를 황족들을 위한 휴게실로 이끌었다. 황궁 연회장의 어느 휴게실이 안 그렇겠냐마는 황족들을 위한 휴게실은 크기부터 달랐다.

“이렇게 둘만 있는 것도 오랜만이네.”

“그러게요. 정말 오랜만이에요.”

율리스가 대기하고 있던 사용인들을 모두 물리자 다프네가 웃으며 찻잔에 차를 따랐다. 적당히 맑은 색의 홍차가 잔을 채우고 은은한 향을 내자, 율리스가 카우치에 몸을 아무렇게나 기대며 탄성을 내질렀다. 차갑고 딱딱하다는 외부의 평과 달리 다프네 앞의 율리스는 떼 묻지 않은 소녀 같았다.

“좋아. 너무 편해.”

“북부에서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을 텐데 오늘은 푹 쉬시지.”

“괜찮아. 어제 쉬었는걸. 그리고 황궁에 온 것만으로도 마음이 편안해. 진짜 내 집에 온 기분이야.”

고개를 늘어뜨린 채 눈을 감은 율리스의 목소리는 어딘가 서글펐다. 다프네는 옛 주인을 보던 눈을 숨기고 친우로서 율리스를 찬찬히 살폈다.

율리스는 예전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황녀다운 당당함과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었다. 잘 관리된 피부와 손톱, 윤기 나는 금발과 그 아래 선이 뚜렷한 아름다운 얼굴, 값을 헤아릴 수 없는 보석들과 눈이 부신 드레스까지. 언뜻 보기에 율리스는 그 옛날 도도한 황녀님 그대로였다. 하지만 감긴 눈 아래에 진 그늘과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을 알아채지 못할 다프네가 아니었다.

‘공작 각하께서 아직도 정부 따위를…….’

다프네는 율리스의 수심이 어디서 비롯됐는지 알고 걱정스러운 얼굴을 했다. 그녀들은 율리스가 북부로 떠난 후에도 여전히 1년에 수십 통씩 편지를 주고받는 사이였고, 덕분에 물리적 거리가 멀어졌어도 서로의 상황에 대해 제법 잘 알고 있었다.

[친애하는 다프네. 미카엘도, 그 여자도, 그 애새끼도 죽여 버리고 싶어. 하지만 난 아무것도 할 수 없어. 그 사실이 날 미치게 해. 돌아가고 싶어. 부모님과 오라버니, 그리고 다프네 네가 있는 수도로.]

율리스는 본래라면 황족으로서 외국의 황후나 왕비가 될 여인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세르펜스 공작인 미카엘을 짝사랑했고, 황궁 모두의 뜻을 꺾고 그와 결혼했다.

그런데 그리한 결혼의 결과가 정부와 사생아라니. 게다가 미카엘의 사생아는 율리스가 낳은 샤를보다 2년이나 먼저 태어났다.

아나이스 귀족가에서 첫아이, 특히 장자가 가지는 의미는 컸다. 후계 다툼을 배제하기 위해 대부분의 귀족들이 장자에게 작위와 가문을 물려줬으니 말이다.

사생아조차 첫아이로 인정만 받는다면 적법한 아이들과 경쟁을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애초 사생아가 적당한 자녀로 인정받는 일은 남편에 비해 부인의 신분과 지위가 아주 낮았을 때나, 부인에게 자녀를 보지 못했을 때나 가능한 일로 매우 드물었다.

율리스는 대단한 신분이었으니 남편이 사생아를 첫아이는커녕, 적법한 자녀로 인정조차 할 수 없었다. 하나 사생아가 먼저 태어났다는 사실조차 그녀에게는 불명예였다.

믿었던 남편의 배신, 정부, 그리고 사생아. 부인의 처지에 있는 여인이라면 어느 누가 괴롭지 않을까 싶다마는, 율리스가 느끼는 괴로움의 크기는 황녀로서 그녀가 쌓아 올린 자존심만큼이나 컸을 터였다. 결국 다프네는 참지 못한 채 떨리는 목소리로 간신히 입을 열었다.

“……아직은 많이 힘드실 거예요.”

“그런 얼굴은 하지 마. 나 정말 괜찮아. 이제 다 상관없…….”

율리스는 다프네의 울음기 섞인 목소리에 눈을 뜨고 피식 웃어 보였다. 그러나 괜찮다고 말한 것도 잠시, 가슴에 뭉친 응어리가 불쑥 튀어나왔다.

“……샤를은 아직 말도 제대로 못 하는데 그 더러운 사생아는 벌써 세 살이야. 그리고 그 여자랑 그 사생아 자식이 아직도 성에 빌붙어 있어.”

몸을 일으킨 율리스의 손이 발발 떨렸다. 핏발 선 눈이 분노로 어찌나 번들거리는지, 다프네는 저도 모르게 몸을 움찔거렸다. 하지만 율리스는 친우의 눈에 띄는 행동조차 눈치채지 못한 채 속에 담아 뒀던 말을 쏟아 냈다.

“미카엘은 샤를을 임신한 이후 날 찾지 않아. 그 사람은 그 여자한테만 붙어 있어.”

“…….”

“그뿐이야? 재작년인가, 그 허여멀건 계집이 잠깐 도망친 이후로는 아예 별채에 살다시피 하고 있어. 덕분에 이번에 수도로 온 것도 나랑 샤를뿐이야. 정신이 나간 거지.”

“…….”

“가족과 다프네 널 떠나는 선택에 대한 대가가 이거라니. 내가 어리석었어. 가만있다 리비도의 왕비로 갔으면 3년은 더 황궁에 머물렀을 텐데…… 정말 후회돼.”

다프네는 조용히 율리스의 곁으로 다가갔다. 하얀 손이 율리스의 어깨를 감싸더니 그녀를 카우치로 이끌었다.

다프네의 손길을 따라 카우치에 앉은 율리스의 얼굴에는 그새 분노 대신 슬픔이 자리했다. 울음을 터뜨린 그녀의 어깨가 규칙적으로 들썩였다. 다프네는 율리스의 등을 작게 토닥이며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외국으로 가셨으면 3년은 함께했을지언정 오늘은 만나지 못했을 거예요. 그리고 어쩌면 영영 보기 힘들었을지도요.”

“…….”

“공작 각하께서 어떤 사람이든, 전 황녀 전하께서 아나이스에 남아 주셔서 기뻐요. 자주는 아니지만 이렇게 볼 수 있잖아요.”

위로하듯 느리고 따뜻한 말씨에 율리스가 고개를 돌려 다프네를 바라봤다. 다프네의 푸른 눈은 친우를 향한 애정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남편과 갖가지 일들로 다쳤던 마음에 봄바람이 불었다. 율리스는 울음을 멈추고 다프네를 향해 픽 웃었다.

“황녀 전하…… 그 호칭은 오랜만이네. 옛날 생각나고 좋은데?”

“황궁에 돌아오셨으니 황녀 전하시지요. 그리고 제게는 언제나 황녀 전하세요.”

“고마워, 다프네. 선친께서도 모두 작고하셨고 이제 진정한 내 편은 너랑 오라버니뿐이야.”

어느새 활기를 되찾은 율리스가 밝은 목소리를 냈다. 그러나 율리스의 말에 다프네는 순간 멈칫하더니 눈물을 닦아 주던 손을 거둬들였다. 파르르 떨리는 손끝이 어딘가 불안정했다.

“오랜만에 만났는데 너무 재미없는 이야기만 했네. 그보다 넌 어때, 다프네. 후작이 여전히 잘해 줘?”

“……네. 그이는 제게 잘해 줘요.”

“다행이야. 하기야 잘해야지. 내 시녀였던 널 그렇게 채 갔는데.”

율리스는 다프네의 어색한 미소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녀가 친우의 손을 낚아채듯 잡고 흔들며 오두방정을 떨기 시작했다.

“이제 출신으로 괴롭히는 사람도 없고? 디본가 할망구. 아주 너만 보면 가문이 한미하다, 얼굴값 한다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잖아.”

다프네는 디본 후작가에 시집가기에는 많이 부족한 집안의 출신이었다. 아비가 자작인 데다 집안이 오래됐다고는 하나, 제국 초창기부터 이름을 알린 디본가에는 못 미쳤다.

게다가 다프네의 아비는 도박으로 빚까지 지고 있었다. 아마 율리스가 황녀로서 제 시녀인 다프네를 보호하지 않았더라면 그는 진작 아름다운 딸을 아내 잃은 노인이나 돈만 많은 혼처에 팔아 버렸을 터였다.

하지만 율리스의 비호 아래 다프네는 디본가의 하나뿐인 후계자를 만날 수 있었고, 다프네에게 반한 그는 열렬한 구혼 끝에 결국 그녀와 결혼에 성공했다.

결혼 후에 조실부모한 손자를 키운 디본가 노부인의 꼬장꼬장한 구박이 있긴 했지만 다프네가 결혼을 잘했다는 것에는 이견은 거의 없는 편이었다.

“몇 년 전에 무덤으로 갔을 때 어찌나 속이 시원하던지. 오래 살아 하는 짓이 손자 부인 괴롭히기라니.”

“조모님께서도 크리스가 태어난 이후로는 많이 누그러지셨어요.”

“아, 크리스! 하기야 크리스는 귀여운 아이니까. 그런 아이를 보고도 널 구박하면 사람이 아니지. 그나저나 아기일 때 봐서 큰 모습이 상상이 안 돼.”

“착한 아이예요. 떼 한번 쓰지 않고 헤레이스한테도…… 아.”

아들 크리스의 이야기를 하며 서서히 펴지던 다프네의 얼굴이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딸 이름에 다시금 굳었다. 그러나 헤레이스의 이름을 들은 율리스는 손뼉을 짝 치며 더욱 호들갑을 떨었다.

“헤레이스? 맞아! 헤레이스가 있었지. 내 정신 좀 봐. 쓸데없는 이야기를 하느라 새로 태어난 공주님을 잊고 있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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