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장난해?”
메데아의 말은 단칼에 잘렸다.
미카엘은 메데아의 손을 털어 내고 깔끔한 동작으로 두어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눈물을 줄줄 흘리는 메데아를 바라보며 팔짱을 꼈다. 잔뜩 모인 미간에는 성가심이 가득했다. 그가 긴 한숨을 내쉬고 머리를 쓸어 올리더니 금안을 차갑게 빛냈다.
“메데아, 이즈카엘이 태어난 지가 언제인데…… 이제 정신 좀 차리고 분수를 좀 깨달아. 언제까지 동화 속에 있을 거야.”
“…….”
“넌 내 정부야, 정부. 정부가 사랑놀이하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그렇다고 망상에 빠져 자기 위치도 모르면 곤란하지.”
“…….”
“난 세르펜스 공작이야. 그런데 내가 어떻게 널 유일한 존재로 삼을 수 있겠어. 내게는 너만큼이나 중요한 이들이 많아.”
“하…….”
눈물을 줄줄 흘리던 메데아는 미카엘의 말에 헛웃음을 지었다. 이번에는 그녀가 미카엘에게서 한 발짝 물러났다. 어딘가 공허한 눈과 자신을 멀리하는 태도, 미카엘의 눈이 번뜩였다.
“그런 얼굴 마, 메데아. 계속 말했잖아. 난 널 사랑해. 누구보다.”
단걸음에 메데아의 앞으로 온 그가 그녀의 어깨를 꽉 붙들더니 자신의 품 안에 욱여넣었다. 투정을 부리는 메데아는 성가셨지만 이렇듯 자신에게서 멀어지려는 메데아는 극도로 불쾌했다. 그가 메데아의 은발을 부드럽게 쓸며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율리스가 질투 나? 그럴 필요 없어. 난 그녀를 너처럼 사랑하는 게 아니야. 다만 존중할 뿐이지.”
“…….”
“아까도 말했지만 그녀는 황녀여서 공작 부인 자리에 있는 거야. 산에서 살았던 넌 모르겠지만 내가 속한 이 사회는 그런 게 중요하거든.”
“…….”
“그러니까 메데아, 너무 당연한 일로 투정 부리지 마. 예쁘게 웃으며 지내기도 바쁜데 이렇게 울면 내 기분이 언짢아.”
“…….”
“웃어. 넌 날 보며 꽃처럼 예쁘게 웃을 때 제일 빛이 나.”
눈물을 닦아 주는 손길은 다정했으나 온기가 없었다. 메데아는 미카엘의 양손을 꼭 붙들었다. 그리고 그와 눈을 똑바로 마주하며 입을 열었다.
“미카엘, 난 널 살렸어. 널 위해 모든 걸 희생했어. 그런데 돌아오는 대가가 고작 이거야?”
“…….”
“이럴 수는 없어. 내가 너를 위해 뭘 포기했는데, 너의 유일한 존재가 되기 위해 뭘 버렸는데…….”
“메데아.”
그녀의 말이 길어질 것 같자 미카엘의 얼굴이 구겨졌다. 언제까지 그 일을 빌미로 그에게 무리한 요구를 할 생각인지. 메데아가 그의 목숨을 구해 준 것은 사실이었으나 미카엘은 그 때문에 메데아도 얻은 게 많다고 생각했다.
그가 또 한 번 긴 한숨을 내쉬더니 정신 차리라는 듯 메데아의 어깨를 붙잡고 흔들었다.
“계속 성가시게 굴 거야?”
“…….”
“내가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계속 귀찮게 할 거냐고.”
“…….”
“주제도 모르고 계속 투정이면 나도 봐주기 힘들어. 너 아무것도 모르는 모양인데 보편적인 정부들 취급이 어떤지 알기나 해?”
“…….”
“부인보다 더 사랑받으며 위세 부리는 정부는 몇 없어. 본래 너 같은 출신의 정부는 적당히 침대나 데우다 사라질 뿐이야. 하지만 난 메데아 널 사랑해서 지켜 주잖아. 네게 가는 손가락질도, 경멸 어린 시선도 모두 막아 주고 있어. 게다가 율리스 못지않게 풍족한 삶도 주고 있지.”
“나는!”
“그만. 더는 들어 주기 힘들군.”
“악!”
미카엘은 메데아를 아무렇게나 밀쳤다. 약한 인간 여인의 몸은 그대로 꼬꾸라져 쓰려졌다. 바닥에 부딪친 무릎에서 피가 났다. 그러나 미카엘은 눈썹을 한 번 꿈틀거릴 뿐, 매정히 몸을 돌렸다.
“반성하며 얌전히 기다리고 있어. 네가 잘못을 깨달았을 때 찾아오지.”
미카엘이 나간 문을 한참 응시하던 메데아가 입술을 꾹 물었다. 떨어지다 만 눈물이 뺨을 적시고 붉게 상기된 피부로 스며들었다. 인간이 된 지도 꽤 오랜 시간이 지났건만 메데아는 미카엘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사랑해.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너뿐이야, 메데아.’
미카엘은 그녀에게 사랑한다 속삭이면서도 모든 것을 주지 않았다. 그녀가 아는 사랑은 그런 것이 아닌데…….
메데아는 고개를 들어 제가 오랜 시간 지냈던 설산 쪽을 바라보며 무언가 다짐한 듯 주먹을 꾹 쥐었다.
그리고 그날 메데아는 성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 * *
“그, 그것이 아가씨께서…….”
“찾아. 찾아서 내 앞으로 끌고 와.”
“…….”
“반항한다면 조금 흠집을 내도 좋아. 팔다리 정도야 부러져도 괜찮겠지.”
미카엘은 제 정부의 도주를 용인하지 않았다. 눈이 돌아간 그는 메데아가 머물던 방에 앉아 한숨도 자지 않은 채 황금색 눈을 번뜩였다.
그리고 메데아가 사라진 지 나흘이 지난 어느 새벽, 어미에게 버림받고 남겨진 이즈카엘이 아비에게 앳된 목소리로 말했다.
“……언제까지 모른 척할 참이야?”
아직 세 살도 안 된 아이의 또렷한 발음. 아이의 무표정한 얼굴과 다른, 비웃음 가득한 목소리. 미카엘은 제게 말을 건 자가 아들이 아님을 곧바로 알아차렸다.
미카엘이 자리에서 일어나 검을 쥐었다. 그러나 예기를 뿌리는 검에도 어린 이즈카엘은 눈 하나 깜빡이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
“이미 짐작했지? 그녀는 인간이 아니야. 그러니 언젠가는 인간인 널 떠나는 게 당연한 이치 아니겠어?”
기괴한 아들의 목소리에 본능은 당장 사제를 불러오라 명하고 있었다. 하나 미카엘이 눈을 부릅뜬 채 제자리에서 굳고 말았다. 아들의 말은 정확히 그의 불안을 관통했다. 그가 갑자기 욱신거리는 옆구리를 붙잡은 채 아들에게 물었다.
“……메데아가 인간이 아니야?”
“오…… 미카엘, 이미 알고 있잖아. 그런데 뭘 계속 물어.”
미카엘은 처음부터 마음 한편에 메데아에 대한 의심을 품고 여태 거두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의 정체는 뭘까. 메데아를 곁에 두고 있으면서도 미카엘은 문뜩 그런 의문을 가졌다.
“아냐. 메데아는 사냥꾼의…….”
“사냥꾼의 여식이라고? 이미 조사도 했잖아. 그런 설산에 사람이 어떻게 살겠어. 게다가 메데아가 널 치료해 준 오두막 말이야. 뭐가 제대로 있기나 했어? 네 눈으로 봤잖아. 거긴 당장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을 폐가야. 사람이 살았던 흔적이라고는 없었지.”
처음에는 메데아 본인의 말처럼 산에 홀로 사는 괴팍한 사냥꾼의 여식인 줄 알았다. 가여운 그녀가 사냥꾼 부모를 들짐승에게 잃고 홀로 남겨졌다, 그리 믿었다.
‘예? 거기는 1년 내내 눈이 녹지 않는 산입니다요. 게다가 집채만 한 서리 늑대 떼들이 터를 잡아 사람은 살 수가 없지요.’
‘사냥꾼? 칠십 넘게 이 마을에 살았지만 저 산에 사냥꾼이 산다는 말은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요, 나리.’
하지만 미카엘이 조사한 바, 설산에 사는 사냥꾼 가족에 대해서는 공작령의 그 누구도 알지 못했다. 그렇게 메데아의 정체에 대한 의심이 커 가던 중, 미카엘은 가문에 내려오는 전설 하나를 떠올렸다.
‘최초의 세르펜스 공작은 저 설산에 사는 눈마녀가 낳았다는 전설이 있지요.’
물론 지나친 망상이라고 스스로를 비웃고 말았으나 메데아를 볼 때면 미카엘의 가슴 한쪽에는 항상 불안이 거스러미처럼 거슬리게 자리해 있었다. 그리고 메데아와 사랑을 나눌수록 거스러미는 점차 커졌다.
‘미카엘, 왜 그렇게 빤히 쳐다봐? 내 얼굴에 뭐 묻었어?’
‘메데아, 가끔은 네가…… 아니야. 그보다 몸은 어때? 다음 달이 산달이잖아.’
‘괜찮아. 우리 아들은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어.’
‘……아들? 그걸 어찌 알아?’
‘그냥. 알 수 있어.’
아이가 태어나면 나아지겠거니 생각했지만 이즈카엘이 태어난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아니, 미카엘의 마음 한구석을 차지한 불안은 점차 커졌다. 메데아는 그를 사랑했고 그를 갈구했지만 그에게 어딘가 이유 모를 기시감을 선사했다.
‘율리스가 아이를 가졌어.’
‘……알아. 그 애도 아들이야.’
‘…….’
‘죽일 거지? 우리한테는 이즈카엘이 있잖아. 그러니 그 여자랑 그 애, 죽일 거지? 응? 미카엘.’
‘……세르펜스의 적자가 태어날 거야. 그러니 이즈카엘을 데리고 별채로 물러나.’
그리하여 미카엘은 메데아에게 더욱 냉정하게 굴었다. 그녀를 출신이 천한 정부로 대하고 상처를 주며 확인받고 싶었다. 제가 무슨 짓을 하든 어떤 말을 하든 메데아는 저를 사랑할 거라고. 언제나처럼 그의 곁에서 그를 갈구할 거라고.
‘그 여자가 임신했는데 왜 내가 네 곁에서 멀어져야 해? 미카엘, 넌 여기서 살잖아. 그럼 나도…….’
‘메데아, 넌 정부니까.’
‘뭐?’
‘당연한 이치야. 넌 내 부인이 아닌 한낱 정부에 불과하잖아.’
정부라는 단어를 몰랐던 메데아는 정부가 가지는 의미에 대해 점차 알아 가더니 율리스를 미워하고 질투했다. 미카엘은 그럴 때마다 메데아가 자신과 같은 인간임을 느꼈다.
‘오늘 율리스에게 무례하게 굴었다고 들었어. 왜 그런 거야?’
‘……나 그 여자한테 뺨을 맞았어, 미카엘. 아파. 여기가 너무 아파.’
‘잘못을 했으면 벌을 받아야지, 메데아.’
안도를 위한 행위는 어느새 중독으로 넘어갔다. 미카엘은 어느새 율리스를 질투하는 메데아를 보며 묘한 희열에 허덕이고 있었다. 자신이 그녀에게 어떤 존재인지 확인받는 느낌. 그게 좋아 율리스와 메데아 사이의 갈등이 그의 태도로 인해 점차 심해짐을 알면서도 미카엘은 모른 척 넘겼다.
‘미카엘, 난 너를 위해 모든 걸 버렸어. 그런데 나한테 어떻게 이래?’
‘그래서? 날 떠나기라도 할 참이야?’
하지만 메데아의 반응이 격해질수록, 그녀의 바닥에 있는 그 감정을 끌어낼수록, 미카엘의 불안도 커졌다. 제법 영리한 그는 알고 있었다. 지금 제 행동이 얼마나 멍청하고 어리석은지.
‘왜 대답이 없지? 대답해, 메데아. 날 떠날 수 있어?’
‘……아니.’
‘그래. 그렇게 착하게만 굴어. 그러면 정부라 한들 넌 내 사랑을 받을 수 있을 거야. 사랑해, 메데아.’
‘……나도 사랑해, 미카엘.’
안다고 해서 멈출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미카엘은 초조해질수록 더욱 메데아를 몰아붙였다. 그녀가 제게만 의지하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