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난 미카엘, 저 사람을 원해. 저 사람의 유일한 존재가 될 거야.”
첫 번째 메데아가 그것을 볼 때와 같은 얼굴. 당당히 선언하는 메데아의 얼굴에 그것은 노기를 참을 수 없었다. 지금껏 간신히 눌러 왔던 감정이 터지고 두 존재의 보금자리였던 얼음 동굴은 한순간에 엉망이 됐다.
“넌 날 위한 존재야! 네게 유일한 존재는 나야!”
난동을 부리는 그것의 모습에도 메데아는 냉랭한 얼굴이었다. 그녀는 제 발치에서 울음을 터뜨리는 그것을 징그럽다는 듯이 내려다보며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 곁에 억지로 있는 거 이제 못 참아. 징글징글한 것. 내게 더는 상관하지 마!”
메데아는 내리는 눈송이에 제 숨을 불어 넣고 그것을 향해 던졌다.
전이라면 피조물의 마력쯤이야 쉽게 쳐 냈겠지만 그것은 메데아의 영혼을 복구하는 대가로 대부분의 힘을 소진한 후였다. 신에 가까웠던 그것은 이제 피조물보다 약해진 채 피조물에 의해 컴컴한 얼음 동굴에 홀로 남겨졌다.
“으아아아악! 메데아! 메데아!”
그것은 얼음 동굴 속에서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냈다. 만년설의 삭기가 뼛속으로 침투하고 날카로운 얼음 결정들이 온몸을 찔러 댔다. 하지만 얼어붙은 몸도, 피조차 얼려 버리는 냉기도 심장을 죄이는 고통에 비하면 참을 만했다. 그것은 배신감에 몸부림치며 매번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것은 인간의 형상 위로 괴물의 거죽을 덮어쓰기 시작했다.
손톱과 발톱이 증오로 만들어진 채 돋아났으며, 피부에는 배신의 아픔으로 비늘이 솟아났다. 그러나 분노와 슬픔으로 허덕이는 와중에도 그것은 메데아를 보기 위해 눈동자를 두 쌍으로 만들었다. 울분에 차 소리를 지르다 울음을 터뜨리고, 그러다가도 네 개의 눈동자를 움직이는 모습이 기괴했다.
‘사랑해요.’
반면 메데아는 세상을 다 가진 얼굴을 했다. 그녀는 그것에게만 허락하던 말을 사내에게 서슴없이 하며 사내에게 안겼다. 그것은 두 쌍의 눈으로 메데아를 훔쳐보며 피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곧 진실을 깨닫게 된 그것은 기쁨에 입술을 끌어 올렸다.
‘오라버니께서 봄이 가기 전 당신과 함께 수도로 오라 편지하셨어요.’
‘폐하께서? 왜?’
‘잘 살고 있나 보려 그러시는 거겠지요. 나도 오랜만에 수도에 가고 싶어요. 가서 다프네도 보고…….’
‘…….’
‘왜요? 힘들어요? 요새 밖에 자주 나가던데 혹 바쁜 일이면 나 혼자…….’
‘아냐. 그냥 사냥에 재미를 들여서.’
‘…….’
‘……그뿐이야.’
메데아가 사랑하는 미카엘이라는 사내는 메데아와 사랑에 빠지긴 했으나 그녀만큼 상대에게 맹목적이지 않았다. 게다가 사내에게는 이미 아내가 있었다.
‘율리스, 당신 혼자 수도로 가는 건 보기 좋지 않아. 이번 달 내로 같이 출발하지.’
그것은 메데아가 진실을 깨닫고 다시 제 곁으로 오길 바라며 몸이 타들어 가는 고통을 견뎠다. 하나 어느 날 메데아는 만삭의 몸으로 그것의 앞에 나타났다.
“어떻게…… 분명 널 보고 있었는데…….”
“음침한 네 취미를 내가 모를 줄 알아? 이 아이가 얼마나 소중한 아이인데 네게 들키겠어?”
“안 돼! 당장 아이를 죽여! 네 배 속에서 떼어 내! 아니면 네 영혼은 또…….”
“그래. 망가지고 금이 가다 부서지겠지.”
메데아의 얼굴은 어딘가 결연했으나 그녀의 눈동자는 불안정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녀가 징그러운 모습으로 팔다리를 버둥거리는 그것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 입술을 한 번 꾹 내리 물고 천천히 말했다.
“……방법을 찾았어. 나, 내가 가진 모든 걸 희생해 인간이 될 거야. 넘치는 마력도, 네 곁에서 지긋지긋한 영원을 사는 것도 싫어. 그냥 미카엘의 옆에서 이즈카엘을 키우다가 그 사람이랑 한날한시에 죽을 거야.”
“안 돼! 넌 날 사랑하기 위해 있는 존재야, 메데아. 그따위 식으로 널 낭비하다니 절대 안 돼! 그리고 그 사내는 널 완전히 사랑…….”
그것의 말이 끝나기도 전, 메데아는 치부를 들킨 듯이 얼굴을 붉혔다. 그녀가 손이 하얗게 변하도록 주먹을 세게 쥔 채 소리쳤다.
“듣기 싫어! 난 당신이 싫다니까! 지금의 난 전의 나와 달라! 난 네가 끔찍해!”
그것은 소리 지르는 메데아를 찬찬히 살폈다. 자세히 본 그녀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부푼 배를 보느라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파리한 낯과 어두운 표정에는 불안이 가득했다.
“이 아이가 태어나면 그 사람은 그 여자를 내치고 나만 봐 줄 거야! 내가 그 사람의 유일한 존재가 될 거야! 그러니 넌 상관 마!”
메데아와 자신의 사이에 공통점을 깨달은 그것이 음울한 얼굴을 했다. 그것이 메데아에게 명령했다.
“……마지막 기회야, 메데아. 돌아와.”
“…….”
“지금이라도 돌아온다면 지금까지의 네 배신은 눈감아 주겠어. 하지만 계속 그 사내 곁에 있겠다면 언젠가는 너와 그 배 속 벌레, 그리고 네 사내 모두 죽여 없애 버리겠어. 아니, 너와 관련된 것들을 모조리 없애 버릴 거야.”
네 곁에 나만 남게.
내용은 고압적인 명령이었지만 그것의 목소리와 표정은 애원에 가까웠다. 메데아가 저를 뚫어져라 바라보는 그것에게서 한 발 떨어졌다.
“……그 꼴로?”
삐뚜름하게 올라간 입술에는 비웃음이 가득했다. 메데아는 얼음 동굴에 갇힌 제 창조주를 향해 한바탕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웃음은 어느 순간 뚝 끊겼고 그녀는 곧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의 넌 볼썽사나울 정도로 약해. 하지만 언니들도 약한 인간에게 죽었는데…… 너 같은 존재는 나중에라도 어떻게 될지 모르지.”
메데아가 그것에게 바짝 붙었다. 그것의 얼굴을 쓰다듬는 손이 서늘했다.
“어차피 인간이 되는 순간 모조리 포기해야 할 것들이야. 그렇다면…….”
메데아의 손이 한순간 하얗다 못해 투명하게 변하더니 곧이어 그것의 심장 부근에 박혔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통에 그것이 반항조차 못 한 채 몸을 딱딱하게 굳혔다.
“커헉……!”
“일단 널 없애는 데 온 힘을 다하겠어.”
“메, 메데아…… 흐으…….”
“……그러니 사라져, 제발.”
메데아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눈물을 줄줄 쏟으며 괴로운 눈으로 그것을 바라봤다. 그리고 그녀의 울음 섞인 목소리를 끝으로 그것의 몸이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세상에서 가장 더러운 오물들을 모아 놓은 것처럼 검고 진득한 액체가 얼음에 떨어졌고, 검은 연기를 만들었다. 메데아는 그것의 형체가 어느 정도 뭉개지자 손을 뺐다.
만삭의 몸이 휘청였다. 어지러움을 이기지 못한 메데아가 결국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러나 전에는 느낄 수 없었던 냉기가 손과 몸에 그대로 전해졌으므로 그녀는 몸을 가누지 못하면서도 다시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널…… 저주한다, 메데아.」
그런 메데아를 향해 그것이 쇠 긁는 소리를 냈다. 이제는 형체조차 잃은 그것의 목소리가 얼음 동굴을 울렸다. 메데아는 알 수 없는 얼굴로 그것을 내려다보다 몇 걸음 뒤로 물러섰다. 꾸물거리며 터질 듯 움직이는 모양새가 불안했다.
「……넌 결코 원하던 것을 이룰 수 없을 거야. 절대로.」
“…….”
「이른 시일 내 다시 네게 돌아가겠다. 그리고 내가 돌아가면 넌 모든 걸 잃을 거야.」
그 말을 끝으로 그것이 순식간에 터졌다. 그것의 공습을 대비하고 있던 메데아가 팔을 올리며 재빠르게 몇 발자국 더 뒤로 물러났다. 그러나 아주 작은, 티끌에 가까운 그것의 일부가 메데아의 눈에 튀었다.
“아…….”
힘을 잔뜩 소진해 지친 메데아는 그 티끌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녀는 그저 무의식적으로 눈만 몇 번 끔뻑이다 아래를 내려다봤다.
그것은 그새 검은 물웅덩이로 변해 있었다. 새까만, 꼭 지옥의 불에서 수천 년간 그슬린 듯 어두컴컴한 모양새는 보는 것만으로도 오싹 소름이 돋게 했다.
하지만 메데아의 손에서 옮겨 간 빛이 물웅덩이를 시시각각 태워 가고 있었다. 메데아는 줄어드는 물웅덩이를 보다 몸을 돌렸다. 인간에 한발 가까워져 그런지 냉기를 견디기가 점점 힘들었다.
“추워…….”
얼음 동굴을 나서며 메데아는 처음으로 옷깃을 여몄다. 동굴 밖 늦봄의 따스함이 이리도 그리울 수 없었다.
점차 작아지는 그녀의 인영 뒤로 검은 물웅덩이도 점점 작아져만 갔다. 그리고 빛이 마지막으로 검은 물웅덩이를 태웠을 때, 그것의 목소리가 다시 한번 얼음 동굴 안에 울렸다.
「영원의 메데아.
내가 증오하는, 그리고 사랑하는 나만의 마녀야. 네 배신으로 심장을 걸고 영혼을 묶어 완성한 우리의 계약은 한순간에 산산조각이 나 버렸다.
나와의 신뢰를 저버린 대가는 클 것이다. 위대한 로디바의 대마녀가 내린 자비도, 불사를 넘볼 만한 용의 마력도 네 피를 지키지는 못하리.
네 피가 조금이라도 섞여 있는 자는 영원히 내 숨결과 함께함에 은혜를 입고 그 속부터 썩어 문드러질 것이다. 그때 등 돌렸던 네가 그랬던 것처럼.」
* * *
괴물을 무찌른 마녀는 과연 자신이 선택한 연인과 행복하게 살았을까? 안타까운 일이지만 메데아가 바라는 동화의 결말은 없었다.
“왜? 나한테는 미카엘 당신뿐인데! 당신은 왜! 왜! 다른 여자가 필요해?”
미카엘은 눈앞의 연인을 차가운 눈으로 봤다. 발작처럼 시작되는 메데아의 투정은 항상 즉흥적이었고 날이 갈수록 정도가 심해졌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메데아는 그와 멀쩡히 식사를 하다가 갑자기 날뛰기 시작했다.
“그 여자를 쫓아내! 당신 옆에서 내보내라고! 보기 싫어!”
그 여자.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그의 부인인 율리스가 문제가 된 것은 확실했다. 미카엘은 미간을 좁히면서 울고불고 악을 지르는 메데아를 단호히 밀쳤다.
가는 몸이 쉽사리 그에게서 멀어졌다. 미카엘은 떼쓰는 아이에게 훈계하듯 메데아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우스운 소리. 율리스는 내 부인이자 세르펜스 공작가의 안주인이야. 그런데 그녀를 어떻게 내치겠어.”
“뭐?”
“표정이 왜 그래? 그럼 내가 정부의 투정에 황녀 출신인 그녀를 내쫓을 줄 알았어? 메데아, 정신 차려. 율리스는 고귀하기 때문에 내 부인 자리에 있는 거야.”
“난…… 내가 원하는 건…….”
“이제 와 이러면 곤란하지. 분명 전에 네 입으로 그랬잖아. 공작 부인 자리를 가지고 싶은 게 아니…….”
“그래! 난 공작 부인이 되고 싶은 게 아니야! 아니라고!”
버럭, 소리를 지르는 목소리에는 억울함과 분이 가득했다. 메데아는 주춤거리는 발걸음으로 미카엘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그의 멱살을 쥐고 흔들었다.
“난 네게 유일한 존재가 되고 싶다고! 내가 널 그렇게 여기듯 너도 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