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헤레이스의 눈을 봤나?”
깊은 한숨 새로 울음이 섞여 들었다. 뼈마디가 툭 불거져 나온 사내의 손이 파들파들 떨렸다.
“보자마자 알 수 있었어. 아내는 날 지워 낼 생각이야. 그리고 언젠가는 영영…… 떠나려 들겠지.”
“…….”
“에드가, 난 다른 건 몰라도 그것만은 두고 볼 수가 없어.”
에드가는 이즈카엘을 타박하지도, 그렇다고 위로하지도 않았다. 그는 그저 제 죄로 힘없이 무너져 버린 사내를 고요한 눈으로 보다 고저 없는 목소리로 말할 뿐이었다.
“레이디 셜벗 같은 경우 큰 문제가 없습니다. 하지만 부인의 핏줄은 사형을 겨우 면하고 황명으로 추방된 자입니다. 함부로 데려왔다가는 문제가 생길지 모릅니다.”
“…….”
“일전 동부 방문 일로 아직 말이 많습니다. 황태자 전하를 비롯해 몇몇이 호시탐탐 각하를 깎아내리려는데, 이때 부인의 핏줄을 데려온다면 황제께서도 어느 편에 서실지 모릅니다.”
무심한 어조였다. 이즈카엘과 헤레이스의 관계가 파국으로 치닫든 말든 상관없다는 듯 에드가는 현실적인 부분만 짚어 냈다. 가만히 수하의 말을 듣고 있던 이즈카엘이 고개를 들었다. 호박색 눈에 어느새 형형한 살기가 돌고 있었다.
“관심도 없는 머저리들이 반역이니 뭐니 떠들어 대도 좋아. 그자들은 어떻게든 꺾어 버릴 자신이 있어. 감히 내 아내를 지킬 울타리를 파괴할 생각을 하는 놈들이니 짓밟아 뭉개 버리면 그만이지.”
이즈카엘은 그런 상황쯤은 이겨 낼 자신이 있었다. 아내의 오라비를 불러들여 말이 나오면 어떠한가. 그걸 막아 내는 건 제 몫이었다.
“하지만 에드가, 헤레이스가 날 지워 내고 어떤 방식으로든 날 떠난다면…….”
그러나 닫혀 버린 아내의 심장은 그가 어찌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이즈카엘은 마지막으로 본 헤레이스의 푸른 눈을 떠올릴 때마다 저 아래로 꼬꾸라지는 기분이었다.
“미움받아도 좋아. 날 죽일 만치 증오해도 이해해. 하지만 그녀가 이대로 사라지면 어찌하지? 난 그것만은 이겨 낼 자신이 없어.”
결국 이즈카엘이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에드가는 책상을 질게 물들이는 눈물 몇 방울을 보다 입술을 꾹 내리 물었다. 그가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부인의 핏줄과 레이디 셜벗을 찾는 일은 맡겨 주십시오.”
에드가는 에르젠이 죽은 시점에 이즈카엘과 헤레이스의 관계는 돌이킬 수 없다고 여겼다. 의도하진 않았겠으나 주군은 아이의 죽음에 관여돼 있었고 이유가 어찌 되었든 분명 원인을 제공했다.
보통의 어미에게도 자식의 죽음은 삶이 무너지는 재앙 그 이상일 터였다. 하물며 아이가 삶의 전부인 것처럼 보이는 헤레이스에게 아이의 죽음이 어떤 무게일지 에드가는 감히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그는 주군인 이즈카엘을 존경하고 따르는 것과 별개로 이번 일만큼은 이즈카엘의 편에 설 수가 없었다. 하지만 오랜 시간 함께해서일까, 무너지는 주군을 옆에서 보니 마음이 흔들렸다. 제 손으로 모든 것을 망친 눈앞의 사내가…… 안타까웠다.
“각하께서는 부인께 용서를 비십시오.”
에드가는 제 말이 헤레이스에게 기만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용서라니. 헤레이스에게는 상상 속에서도 본 적 없는 것이 이즈카엘을 용서하는 것이리라.
‘그 기이한 것이 없었다면…….’
하지만 두 사람 사이에는 인간의 탈을 쓴 그것이 끼어 있지 않은가. 에드가가 그것에게 책임의 일부를 돌리며 애써 변명했다. 그렇게라도 해야 했다. 아니라면 제 주군은 영영 희망의 귀퉁이조차 쥘 수 없을 테니.
“용서…… 용서를 빌라고? 하지만 헤레이스가 과연 날…….”
에드가의 말에 이즈카엘의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그가 용서라는 단어를 여러 번 외며 고개를 숙였다. 회의감 가득한 목소리에 에드가가 냉정하고 서늘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물론 부인께서는 각하를 용서하기 힘드실 겁니다. 어쩌면, 아니 영영 용서하지 못할 가능성이 크지요. 각하께서 이렇게 후회한들 지금껏 부인께 저질렀던 일이나 에르젠 도련님의 죽음을 되돌릴 수는 없으니까요.”
이즈카엘이 무언가에 머리를 세게 맞은 듯 아득한 얼굴을 했다. 후회한들 되돌릴 수 없다는 말이 그렇게 슬플 수 없었다. 그러나 에드가의 말은 틀린 게 없었다. 이즈카엘은 어떤 것도 되돌릴 능력이 없었다. 그렇다면 지금의 헤레이스도…….
이즈카엘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어차피 지금의 각하께서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뿐입니다. 이렇게 혼자 후회할 시간에 부인께 계속 용서를 구하십시오. 그분께서 끝내 각하를 외면하고 용서치 못한다 하셔도 그리하셔야 합니다. 각하의 목숨이 다할 때까지, 아니 그 영혼이 닳아 없어질 때까지 그리하셔야 합니다. 결과가 어찌 되든 그게…….”
에드가의 말은 신께 기도하며 매달리라는 허무맹랑한 말과 같았다. 하지만 모든 걸 잃은 이들이 그러하듯 이즈카엘이 절망 어린 눈을 하면서도 에드가의 뒷말을 기다렸다.
“……각하께서 할 수 있는 최선이자 최소한의 도리니까요.”
말이 끝나자마자 이즈카엘이 몸을 일으켰다. 에드가는 뛰어가는 이즈카엘의 뒷모습을 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 * *
아내가 있는 곳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다급했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방까지 단숨에 달려간 이즈카엘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문에 머리를 기댔다.
너머에 있을 아내를 보는 것이 두려웠다. 그러나 그는 헤레이스가 어떤 반응을 보이건 모두 감내하고 용서를 빌 작정이었다. 후회하고 뉘우치고 용서하지 않아도 좋았다. 다만 자신에게 용서를 빌 기회만을 주기를 바랐다.
달칵.
문이 부드럽게 열렸다. 이즈카엘은 차마 바로 들어가지 못한 채 머뭇거리다 심호흡을 내쉰 뒤에야 발걸음을 뗐다. 문틈 사이로 새는 공기가 어쩐지 좀 이질적이었다.
방에 들어서자 아내의 뒷모습이 보였다. 헤레이스는 창가에 서서 밖을 보고 있었다. 길게 늘어뜨린 검은 머리는 부드럽게 찰랑거렸고 가는 여체는 햇빛에 반짝거렸다.
헤레이스가 당연히 침대 있을 거라 생각했던 이즈카엘은 당황한 얼굴을 하다 손을 움켜쥐었다. 편안해 보이는 아내의 모습을 보니 말을 걸기 어려웠다.
‘설마…….’
그렇게 얼마를 있었을까. 문뜩 얼마 전 계단에서 떨어져 머리를 다쳤던 모습이 떠올랐다. 끔찍한 상상을 한 이즈카엘이 망설임 없이 헤레이스의 뒤로 다가갔다. 그리고 떨리는 목소리로 헤레이스를 불렀다.
“……헤레이스.”
헤레이스가 그의 부름에 뒤를 돌았다. 가벼운 몸짓이 한 마리 새와 같았다. 그러더니 곧…….
“이즈카엘!”
헤레이스는 환하게 웃으며 그를 봤다. 한껏 피어난 미소가 먼 예전과 같았다. 생각지도 못한 아내의 모습에 이즈카엘이 모든 것을 잊고 제자리에 굳어 버렸다.
헤레이스가 얼어붙은 이즈카엘에게 종종걸음으로 다가가더니 사내의 가슴에 손을 올리고 몸을 기댔다. 그리고 다정한 얼굴로 물었다.
“나를 보러 왔어요?”
사랑이 가득한 목소리가 꿀같이 달콤했다. 이해할 수 없는 현실에 이즈카엘이 당혹감을 숨기지 못했다. 그가 고개를 내려 제게 안긴 아내를 봤다. 생기 가득한, 반짝이는 푸른 눈이 처음 사랑을 나눴던 날과 비슷했다.
“헤레이스, 당신…….”
“아니면…….”
헤레이스가 이즈카엘의 입가에 손가락을 가져가 그의 말을 막았다. 그리고 그에게서 살짝 떨어져 뒤를 쳐다보았다. 이즈카엘의 시선이 헤레이스를 따라 좇았다.
“……우리 아들을 보러 왔어요?”
헤레이스가 웃으며 말을 함과 동시에 작은 아이 하나가 그녀의 뒤에서 얼굴을 내밀었다. 이즈카엘이 저와 닮은 아이의 모습에 눈을 부릅떴다.
“아버지, 오셨어요?”
아이가 이즈카엘과 같은 호박색 눈을 예쁘게 휘며 말했다. 헤레이스는 아이가 그를 아버지라 부르자 잘했다는 듯 머리를 쓰다듬다 아이의 키에 맞춰 몸을 숙였다.
“우리 아들, 인사도 잘하네.”
이즈카엘을 보던 아이가 냉큼 고개를 돌려 헤레이스의 품을 파고들었다. 헤레이스의 드레스를 있는 힘껏 움켜쥔 손가락에 알 수 없는 집착이 뚝뚝 떨어졌다.
“너…….”
아이는 이즈카엘의 경악 어린 시선에도 여전히 헤레이스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이 헤레이스의 입맞춤을 받으며 얄밉게 입꼬리를 올렸다.
10장. 모든 일의 시작 (과거 외전)
눈마녀.
작금에 와서는 눈요정이라 불리는 이들은 전설 속 허구가 아니었다. 최초의 인간과 용 일곱 마리가 전쟁을 벌이던 전설 속 시절, 눈마녀 세 자매는 ‘그것’이 재미로 조각한 얼음에서 태어났다.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을 타고났으나 눈마녀들은 인간과 여러모로 달랐다. 항상 무표정한 그녀들은 크든 작든 여러 욕망을 좇는 인간들과 다르게 하나의 고유한 욕망을 품었다.
‘이 세상에 날 이길 자는 없어.’
자매 중 첫째는 강대한 힘을 원했다. 그녀는 거대한 마력과 뛰어난 검술로 이름을 알리며 강한 존재들을 수없이 베어 나갔다.
일곱 용 중 하나인 서리의 용 우르달린도 그중 하나였다. 우르달린은 북부에 둥지를 틀고 사람들을 괴롭혔기에 북부의 사람들은 첫째의 존재를 숭상하기 시작했다. 아나이스에 떠도는 눈마녀의 전설 대부분은 그녀의 업적에서 비롯됐다.
하나 첫째는 전설의 용사요, 아나이스 제국의 초대 통일 황제의 손에 스러졌다. 황제가 서리의 용 우르달린의 복수를 꿈꾸던 나머지 여섯 용의 힘을 받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멍청하기는. 힘으로 꺾으려 드니 그 꼴이지.’
둘째는 그런 첫째를 야만적이라며 비웃었다. 아름다움만을 추구하는 그녀는 세상 모든 생명체를 홀리며 손가락 하나로 제 뜻을 이뤘다. 첫째의 목을 벤 아나이스 초대 황제뿐 아니라, 자신의 종족 외 누구도 쳐다보지 않는 용 중 두 마리가 둘째에게 빠져 서로 싸우다 목숨을 잃었다.
그러나 둘째는 아름다움을 위해 수천 사내의 심장을 빼먹고 수만의 처녀에게 피를 갈취했다. 결국 그녀는 장님이자, 신전의 역사상 가장 위대한 교황의 신성한 빛에 불타 소멸했다.
첫째와 달리 둘째는 어느 인간 무리에게 추앙을 받지는 못했으나 후의 예술가들에게 많은 영감을 주어 그림과 활자 속에 남겨졌다. 그녀를 주제로 한 가장 오래된 그림에는 눈먼 교황이 그녀를 불태우며 눈물을 흘리는 장면이 생생히 담겨 있었다.
그리고 세 번째 눈마녀…….
그녀는 앞서 사라진 자매들과 달리 알려진 바가 거의 없었다. 자매들보다 훨씬 오래 산 그녀는 첫째처럼 업적을 알리지도, 둘째처럼 예술품에 기록되지도 못했다.
셋째는 메데아라는 이름을 가졌다. 눈마녀 특유의 은발과 은빛 눈동자가 수려한 그녀는, 자매들과 달리 창조주인 ‘그것’을 사랑하는 데 제 모든 것을 쏟았다. 그것에게 유일한 존재가 되는 것이 메데아의 유일한 욕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