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미겔이 깨진 거울처럼 여러 갈래로 쪼개진 헤레이스의 눈두덩이 위로 작은 손을 가져갔다. 온기라고는 한 줌도 없는 손에 헤레이스의 짓무른 눈가가 식어 갔다.
“그럼 복수 말고 원하는 건? 설마 없어?”
미겔은 헤레이스가 혹여나 동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눈을 깜빡였다. 울음이 섞인 간절한 목소리가 일말의 희망을 담은 채 흘러나왔다.
“다른 건 원하지 않아. 내가 원하는 건 단 하나야. 네게 빌면…… 내게 에르젠을 돌려줄 수 있니? 내 아들을 다시 내 품에 안겨 줄 수 있어?”
“아니.”
미겔은 헤레이스의 희망을 단숨에 짓밟았다. 푸른 눈이 또 한 번의 절망에 뭉개져 흐릿한 빛으로 어그러졌다.
낙담한 헤레이스의 낯에 그것이 속으로 혀를 찼다. 사실 굳이 하려면…… 할 수야 있었다. 하나 자신은 에르젠을 살리길 원하지 않을뿐더러, 그 일에 제힘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잖아도 자칫 잘못하다간 사라질 몸인데…….
“에르젠은 떠났어. 다시는 볼 수 없지. 하지만…….”
“…….”
“……네게 에르젠을 보여 줄 수는 있어.”
호박색 눈이 교묘한 빛을 띠기 시작했다. 그러나 헤레이스는 고개를 저었다. 에르젠을 보여 준다니. 그따위 것이 무슨 소용인가. 그녀가 원하는 것은 온전하게 살아 있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숨을 쉬었던, 에르젠 그 자체였다.
“그런 건 필요 없…….”
더 이상의 대화는 무의미하다고 판단한 헤레이스가 몸을 반대로 틀고 눈을 감을 때였다. 그리운 목소리가 등을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엄마.”
등 뒤의 온기와 쌕쌕이는 숨소리가 익숙했다. 헤레이스가 몸을 딱딱하게 굳히며 눈을 잘게 떨었다.
“엄마, 보고 싶었어.”
“……틀려.”
“엄마는 에르젠이 안 보고 싶었어?”
“아냐. 넌, 넌 에르젠이 아니야. 내 아들이 아니야!”
헤레이스가 귀를 틀어막고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자 뱀 같은 무언가가 그녀의 등을 미끄럽게 타고 오른다 싶더니 작은 손이 그녀의 손 위로 포개졌다.
“맞아, 난 에르젠이 아니야. 하지만…….”
후 하고 열기를 머금은 숨이 옆머리를 간지럽혔다. 동시에 목을 시작으로, 헤레이스의 모든 피부에 소름이 돋았다.
잘게 떨리는 여인의 몸에 그것의 눈이 가느스름하게 변했다. 뱀의 길고 징그러운 혀가 빨간 입술 사이로 기어 나오고 그 사이로 에르젠의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에르젠은 엄마가 제일 좋아. 엄마만 있으면 돼.”
“…….”
“그러니까 가지 마, 엄마. 에르젠만 두고 가지 마, 엄마.”
방구석이나 머릿속에서 울리는 목소리와 달랐다. 선명하고 확실했다. 헤레이스가 참지 못하고 몸을 일으켰다.
침대에는 정말 에르젠이 있었다. 그녀와 같은 색의 검은 머리카락, 푸른 눈……, 유순해 뵈는 눈매와 동그랗고 보드라운 뺨까지. 헤레이스가 아이의 작은 몸을 꼭 껴안았다.
“에르젠.”
“……이 모습으로 삶에 목적을 줄 수는 있지.”
“에르젠, 내 아가. 내 아들.”
“원한다 말만 하면 영영 이 모습으로 살아 줄 수 있어. 지금 이 모습은 물론이고, 자라는 모습까지 그대로 보게 될 거야.”
자식을 잃은 어미 중 누가 이 유혹을 이겨 낼 수 있을까. 헤레이스가 아이의 얼굴을 연신 쓰다듬고 비볐다. 살아 있는 아이의 온기가 너무도 선명했다.
하지만 에르젠의 이름을 부르며 우는 와중에도 헤레이스는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 아이를 어루만지는 순간에도 그녀는 똑똑히 알고 있었다. 품 안의 에르젠이 거짓임을.
“내키지 않아? 그럼 이렇게 생각해 볼까?”
그것이 헤레이스의 마음 한편을 차지한 불편함을 눈치챘다. 누구보다 여려 보이는 여인은 생각 외로 강한 정신력을 가지고 있었다. 누구와 다르게.
‘어떤 멍청이는 말 몇 마디에 바로 넘어왔는데…….’
이토록 똑똑한 여인을 여기까지 몰아붙인 어리석은 사내가 떠올라 비실비실 웃음이 샜다. 그것이 여전히 에르젠의 모습을 흉내 낸 채 헤레이스에게 슬픈 목소리로 말했다.
“나도 너처럼 혼자야. 그래서 외롭고…… 너무 추워.”
“에르젠, 에르젠…….”
“넌 아들을 잃었고 난 어미를 잃었어. 그러니 서로 위안이 되면 좋을 거 같은데…….”
젖은 얼굴의 헤레이스가 팔에 힘을 풀고 아이를 내려다봤다. 아이의 작은 손이 멍한 헤레이스의 눈가에 닿았다. 손은 조금 전처럼 차갑지 않았다. 부드러웠고 적당히 온기가 있었다. 아이가 양손을 모두 들어 헤레이스의 두 눈을 가렸다.
“어렵지 않아. 눈만 살짝 감으면 돼. 그럼 넌 에르젠과 똑같이 생긴, 어미를 갈구하는 아이를 가지게 될 거야. 어때?”
“원하는 게 뭐야. 나한테 뭘 원하고…….”
헤레이스는 아이의 손을 쳐 내는 대신 울음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 눈앞이 가려진 것이 답답할 법도 했건만 어딘가 모르게 아늑해 벗어나고 싶지 않았다.
“내가 너한테 원하는 대가는 하나야, 헤레이스.”
컴컴한 시야 너머의 목소리가 변했다. 어느새 에르젠의 탈을 벗은 그것이 감미로운 목소리로 속살거렸다.
“살아. 살기만 해.”
어디선가 들은 말에 헤레이스의 몸이 굳어졌다. 익히 아는 사내의 목소리가 겹쳐 들린다 싶더니 손가락 사이로 이즈카엘이 보였다.
“무슨…….”
놀란 헤레이스가 몸을 뒤로 움직이며 눈을 깜빡였다. 그러나 등이 침대 헤드에 닿자마자 이즈카엘은 미겔로, 또 에르젠으로 변했다. 그러다가 다시 이즈카엘이 됐다.
“나도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 하지만 당장은 어머니…… 아니, 헤레이스 당신 옆에 있고 싶은걸.”
시시각각 변하는 모습에 헤레이스가 고개를 거칠게 흔들었다. 소년에서 사내로 둔갑한 그것이 그런 그녀를 보다 그녀의 가는 허리를 껴안고 품에 얼굴을 묻었다. 어느새 미겔이 그녀에게 어리광을 부리고 있었다.
“그러니 곁을 줄래요? 응?”
허리 뒤로 깍지를 낀 미겔의 손가락이 단단하게 얽힌다 싶더니 그가 순식간에 커졌다. 다 큰 사내가 그녀에서 웃어 보이고 있었다.
“놔! 이거 놔!”
“엄마…….”
헤레이스가 끔찍한 괴물에게 붙잡힌 듯 버둥거리다 에르젠의 얼굴을 보고 멈췄다.
아들이 바르작거리며 그녀의 품에 얼굴을 비볐다. 헤레이스가 왈칵 울음을 토해 내다 결국 아이를 안고 무너져 내렸다. 끅끅대는 소리에 그것이 작은 손으로 그녀를 토닥였다.
들썩이는 등 뒤로 어둠이 서서히 사라졌다. 어느새 달이 희미하게 지고 해가 새벽을 알렸다. 하나 안개 가득한 푸르스름한 새벽은 어딘가 공허하고 서글펐다.
“자장, 자장, 우리 아가…….”
혼란이 뒤얽혀 흐르던 방에는 어느새 여인의 자장가 소리만 남았다. 헤레이스의 무릎에 얼굴을 묻은 그것, 아니 에르젠이 편안한 얼굴로 눈을 감았다.
그런 아들을 보다 헤레이스도 편안히 눈을 감았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컴컴한 어둠 속, 촛불 하나가 피어올라 얼어붙은 몸을 데우는 기분이었다.
* * *
“……찾았나?”
제임스는 허리를 깊이 숙이고 입술을 물었다. 질책 가득한 주인의 목소리가 억울할 법도 했지만 그런 감정을 가지기에는 맡은 일의 실마리도 제대로 찾지 못했다.
“죄송합니다, 각하. 찾고 있습니다만 아직…….”
이즈카엘은 허리 숙인 제임스를 제대로 쳐다보지도 않았다. 어딘가 음울한 눈동자는 그저 책상 위만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제임스의 목이 뻣뻣해질 때쯤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작은 물체가 책상 맞은편 제임스 쪽으로 밀려났다.
“이른 시일 내로 찾아. 찾지 못하면 만들 수 있는 이라도 구해 와.”
제임스는 조심스레 물체를 집어 들었다. 눈송이 모양의 장신구는 딱 반으로 부러진 채 빛을 발하고 있었다. 어찌 보면 백금처럼 보이는 그것이 손에 닿자 백금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만치 차가운 서늘함이 잠시 느껴졌다가 곧 사라졌다.
‘그런데 이게 왜…… 일전에 봤을 때는 분명 멀쩡했건만.’
제임스가 물건이 왜 망가졌는지 의문을 품을 때였다. 이즈카엘이 손짓으로 그에게 축객령을 내렸다. 제임스는 이유를 물어볼까 아주 잠시 고민했지만 곧 그건 제가 할 일과 무관함을 깨닫고 허리를 숙였다.
“에드가.”
“예.”
제임스가 나간 뒤 불려 온 에드가는 멍한 이즈카엘의 얼굴에 티 나지 않게 인상을 찌푸렸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주인의 나약함이 어색했다.
“……사람을 찾아야겠어.”
이어지는 주인의 목소리 또한 얼굴과 다르지 않았다. 곧 무너지고 흩어져 버릴 것 같은 목소리에 에드가의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그는 이즈카엘의 말에 고개를 숙이면서도 주인을 유심히 살폈다.
“말씀하십시오.”
“크리스…… 헤레이스의 오라비. 그리고 아내의 시녀.”
“……부인의 핏줄과 레이디 셜벗 말씀입니까?”
“그래. 두 사람 다 대략 어디에 있는지 제임스가 알 거야. 가서 물어본 다음 찾아. 그리고 성으로 데려와. 최대한 빨리.”
오랜만에 들리는 이름에 에드가의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 그가 무언가를 잠시 생각하다 담담한 목소리로 주인에게 물었다.
“두 사람으로 부인을 협박하실 요량입니까?”
“뭐?”
이즈카엘이 고개를 들어 에드가를 봤다. 일그러진 얼굴에 분노와 당혹감이 가득했다. 그러나 당장 목이 떨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말을 내뱉은 에드가는 침착한 눈으로 소리 없이 되물었다. 지금껏 그리하시지 않으셨냐고.
수하의 고요한, 그러나 냉정한 물음에 이즈카엘의 눈에 괴로움이 일렁였다. 틀린 말이 아니었다. 그는 지금껏 몇 번이고 그런 방법으로 아내를 겁박했다. 그러니 이런 물음이 돌아오는 것도 이상하지 않으리라.
“부인을 옭아맬 수단이라면 꼭 성으로 데리고 오지 않아도 됩니다. 말만 하셔도 충분…….”
“아니야!”
이즈카엘이 참지 못하고 벌떡 일어났다. 쾅 하고 책상을 내리치는 소리가 제법 크게 방 안을 울렸다. 이즈카엘이 에드가를 노려보며 짓씹듯 말했다.
“그런 게 아니야! 협박이라니 그 무슨…….”
“…….”
“난 그저…… 헤레이스에게 조금이라도…… 그녀가 조금이라도 편해졌으면…… 안정을 찾았으면 해서.”
“…….”
“저대로 둘 수는 없잖나. 저러다 정말 그녀가 잘못되기라도 하면…….”
“…….”
“아내는 그 두 사람을 아껴. 적어도 그 사람들을 등지고 세상을 떠날 생각은 못 하겠지.”
에드가는 횡설수설하는 이즈카엘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어느새 다시 의자에 앉은 사내는 두 손에 얼굴을 묻고 체념한 듯했다. 손가락 사이 언뜻 비치는 물방울이 빛에 반사돼 반짝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