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이즈카엘.”
“…….”
“부탁이니 나도 거기에 던져 줄래요? 응?”
애원하는 목소리는 간절했으나 텅 비어 있었다. 이즈카엘이 헤레이스의 손목을 놓고 한 손으로는 침대를, 다른 손으로는 그녀와 손을 얽었다. 한 사람만 바득바득 힘을 주고 있는 모습이 우스웠다.
“헤레이스, 제발…….”
덜컥 겁이 났다. 아내가 이대로 희미해지다 종국에는 사라질 것 같았다. 이즈카엘은 멘 목으로 간신히 말을 쥐어짰다.
“헤레이스, 당신한테는 잘못 없어. 모두 내 탓이야. 다 내가…… 내가 잘못한 거야.”
“…….”
“내가 어리석었어. 있지도 않은 일로 당신을 의심하고 정신이 나가 당신과…….”
더듬거리며 나오는 목소리가 그답지 않았다. 헤레이스는 말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는 이즈카엘을 빤히 봤다.
문뜩 단단하고 철옹성 같았던 그 오해를 어떻게 풀었을까 의문이 들었다. 그러나 이어 나온 이즈카엘의 말에 헤레이스의 물음은 안개처럼 흩어졌다.
“에르젠……, 우리 아들에게 씻을 수 없는 죄를 저질렀어.”
에르젠을 입에 담는 이즈카엘의 눈에는 절망과 후회가 눈물과 함께 넘쳐흘렀다.
헤레이스는 뚝뚝 떨어지는 사내의 눈물을 무감한 얼굴로 봤다. 우습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언가 그녀의 가장 아래를 긁어 헤집는 기분이었다.
“감히 당신한테 용서를 바라지 않아. 하지만 헤레이스, 제발…… 제발 그런 말은 말아. 당신 말대로 난 카르베에 가라앉아 마땅하지만 당신은 아냐. 난 당신을 절대 그런 곳에 둘 수 없어.”
“그럼 샤를을 불러 줄래요?”
샤를의 이름이 나오자 이즈카엘이 말을 멈췄다. 그가 무언가 가늠하듯 헤레이스를 살폈다. 그 모습에 헤레이스가 처음으로 감정을 담아 이즈카엘을 올려다봤다. 일자로 그어졌던 입매가 비틀렸다.
“그 사람한테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어요. 같이 침대에 올라 그 사람 품에 안겨 보고 싶어.”
“뭐……?”
“당신 의심대로 샤를과 간통이라도 저지를 걸 그랬어요. 그가 사랑한다 했을 때 나도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였으면…….”
샤를을 입에 담은 것은 헤레이스로서도 충동적인 일이었다. 이즈카엘의 얼굴이 사정없이 구겨지자 헤레이스는 아주 잠깐이지만 희열을 느끼고 희미하게 웃었다. 하나 딱 거기까지였다. 그녀의 입꼬리는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제자리를 찾았다.
“……아니, 이제 와 그런 게 다 무슨 소용이에요.”
헤레이스의 심장은 더는 어떤 감정도 담을 수 없었다. 깨진 유리병처럼 그녀의 마음속에는 공허만이 남았다. 줄줄 새는 무언가를 막을 생각도 없이 헤레이스가 이즈카엘에게 말했다.
“내가 언제 그랬죠. 당신이 후회하고 부끄러워했으면 좋겠다고.”
이즈카엘이 몸을 굳혔다. 그때까지도 아내는 그에게 호소하고 있었다. 에르젠은 그의 아이라고.
“내가…….”
“그리하지 말아요.”
헤레이스가 무어라 말하려는 이즈카엘의 목소리를 단번에 잘랐다. 초점 없는, 그러나 완전히 얼어붙은 푸른 눈이 이즈카엘을 응시했다.
“당신은 자격이 없어요, 이즈카엘.”
아내에게 불리는 제 이름이 그렇게 두려울 수가 없었다. 이즈카엘이 죽음을 앞둔 이처럼 잘게 떨었다. 아내의 얼음 같은 눈을 본 순간 알 수 있었다. 그녀가 자신을 지워 내고 있음을.
“헤레이스, 제발…….”
그의 애원에도 헤레이스는 덤덤히 얽혀 있던 손을 뺐다. 양손 모두에 침대 시트의 감촉만 느껴지자 이즈카엘이 고개를 저으며 제발이라는 말만 반복했다. 그런 그의 모습을 물끄러미 보던 헤레이스가 고개를 옆으로 틀었다.
“……에르젠은 내 아이예요. 오롯한 내 아이. 그러니 지금 와서 에르젠이 우리 아이니 뭐니 그런 말 듣고 싶지 않아요. 에르젠에게…… 내 아이에게 모욕이니까.”
귓가를 때리는 목소리에는 그를 향한 감정이 없었다. 이즈카엘이 헤레이스의 옆얼굴을 내려다봤다. 아내는 그의 팔 사이, 그가 만든 공간에 있음에도 그와 분리돼 있었다.
이즈카엘은 문뜩 아내의 가느다란 숨이 덜컥 두려워졌다. 투명하고 단단한 유리 상자 안으로 들어가 버린 아내는 유심히 살펴보지 않으면 죽었다 착각할 만큼 미동이 없었다. 그가 참지 못한 채 헤레이스에게로 손을 뻗었다.
“싫어.”
사내의 손이 다가오자 헤레이스가 눈을 감으며 말했다. 완벽한 거부에 이즈카엘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헤레이스는 몸을 아예 틀고 그를 외면했다.
“……당신이 생각하는 일은 없을 거예요.”
당분간은.
헤레이스는 일부러 뒷말을 삼켰다. 지금 당장은 아니었지만 이른 시일 내 그녀는 에르젠을 따라갈 생각이었다. 그녀가 당장 에르젠을 쫓지 않는 이유는 하나였다.
‘엄마!’
눈을 감으면…… 아직은 에르젠의 얼굴이 보였다. 아들의 웃음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그러나 아들의 죽음을 인정한 이상, 이것도 잠깐이면 사라질 게 분명했다.
“그만 나가 줄래요?”
제게 남은 시간이 언제까지일까 가늠하던 헤레이스가 선명해지는 에르젠의 모습에 시트를 끌어 올려 얼굴을 묻었다. 이즈카엘이 그런 헤레이스를 보다 몸을 일으켰다. 침대 머리맡에 선 그가 그대로 나가려다 아내의 등을 보고 말을 꺼냈다.
“……에르젠을 안전한 곳에 뒀어. 보고 싶으면 언제든 말해.”
말이 끝나고도 이즈카엘은 한참을 서 있었다. 저를 보는 시선이 느껴졌는지 헤레이스가 머리끝까지 시트를 뒤집어썼다. 그러자 질질 끄는 듯한 발걸음 소리가 나더니 곧이어 문이 닫혔다.
“……거짓말.”
주변이 고요해지자 헤레이스가 중얼거렸다. 말라 버린 줄 알았던 눈물이 두 뺨을 타고 흘렀다. 그녀를 감싸고 있는 시트가 그녀의 어깨를 따라 들썩였다.
“내 아들은 여기 있는걸. 그렇지, 에르젠?”
일그러진 시야에 웃는 얼굴의 에르젠이 잡혔다. 헤레이스는 제게 파고든 아이를 꼭 안아 줬다.
하얀 손에 잡히는 거라고는 얄팍한 시트와 공허한 공기뿐이었다. 그럼에도 헤레이스는 포근한 미소를 지으며 아들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엄마가 사랑해, 에르젠.”
* * *
또 얼마간 시간이 흘렀다. 헤레이스는 이즈카엘이 떠난 뒤에도 침대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관 속에 갇힌 시체처럼 가만히 누워 있는 것이 그녀가 하는 전부였다.
거의 매시간 헬렌이 들어와 그녀를 살피고 의원의 지시에 맞춘 식사를 대령했다. 정성껏 차려진 따뜻한 음식은 먹음직스러워 보였지만 헤레이스는 냄새를 맡자마자 빈속을 게워 냈다. 덕분에 결국 헬렌은 온종일 헤레이스에게 몇 모금의 물만을 먹일 수 있었다.
“내일은 뭐라도 드셔야 해요, 부인.”
“…….”
“이러다 정말 큰일 나세요.”
“……나가 줄래? 혼자 쉬고 싶어.”
헬렌은 무어라 더 말하려다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갈 때까지 헤레이스를 응시하는 그녀의 얼굴에는 근심과 걱정이 가득하였지만 헤레이스는 눈치채지 못했다.
헬렌마저 나가자 방에는 적막이 내려앉았다. 고요한 공간, 헤레이스는 무생물처럼 변화가 없었다. 천장을 보는 공허한 눈, 일자로 다물린 입술, 생기라고는 눈 뜨고 찾아볼 수 없이 창백한 손……. 간혹 파리한 뺨을 적시고 흘러내리는 눈물만이 그녀가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음을 알려 줬다.
그렇게 시간이 속절없이 흘렀다. 해는 초여름이라는 계절에 걸맞게 제법 길었지만 어느덧 완전히 저물었다. 헬렌이 두어 번 더 들어오고 저녁이 성큼 다가온다 싶더니 어느덧 달이 뜬 밤이 찾아왔다. 환하게 뜬 보름달이 헤레이스의 새하얀 낯을 더욱더 하얗게 비췄다.
덜컹.
바람 한 점 없는 밤, 창문이 저절로 열렸다. 그러자 들어차는 바람에 커튼이 흔들리고 공기가 식어 갔다. 하지만 헤레이스는 눈만을 깜빡일 뿐, 직접 창문을 닫거나 헬렌을 부를 생각은 않았다.
끼이익.
창문 경첩이 접혔다가 펴지길 반복하며 섬뜩한 소리를 냈다. 그리고 어느 순간 달을 등지고 아이 하나가 방 안에 섰다. 하얀 달빛이 아이의 은발을 백금처럼 반짝이게 했다.
“안녕.”
헤레이스는 아이가 인사를 한 후에야 그 존재를 알아챘다. 살짝 움직인 그녀의 해쓱한 얼굴에 언뜻 놀라움이 스쳤다. 하나 이내 설핏 짐작한 듯 헤레이스의 눈이 무감해졌다.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그 모습을 보니 알겠어. 넌 사람이 아니야. 그렇지?”
아이의 손과 팔은 온통 검은 비늘로 덮여 있었다. 길고 검은 손톱을 딱딱 부딪친 그것이 세로로 쭉 찢어진 동공을 움직이다 어깨를 으쓱였다. 동시에 비늘이 사라지고 팔과 동공이 인간의 형상을 되찾았다.
“그게 끝이야?”
“…….”
“겁먹지도 않고…… 조금 시시한데.”
헤레이스의 무관심에도 미겔의 웃는 낯은 변하지 않았다. 아이는 헤레이스에게 다가가는 대신 창문에 걸터앉아 작게, 그러나 짙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뭐 그리 중요한 건 아니니까. 그보다 도와줄까?”
“…….”
“복수하고 싶지 않아?”
간드러진 웃음소리에는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아 홀리는 구석이 있었다. 그러나 헤레이스는 관심 없다는 듯 무심한 얼굴로 대꾸했다.
“누구한테?”
“누구긴 누구야. 네 남편이지. 정부를 데려와 사생아를 낳은 남편. 네 사랑을 의심하고 부정을 저지르고 친자식을 오해한, 그리고 결국 아들을 죽음에 이르게 한 네 남편. 이즈카엘 말이야.”
“…….”
“이즈카엘한테 복수할 생각 없어?”
물음이었으되 답을 확신하는 목소리였다. 미겔이 창틀에서 폴짝 내려와 헤레이스의 옆에 섰다. 그녀의 이어질 말을 기다리는 아이는 무언가 기대하는 낌새였다. 헤레이스가 생기 넘치는 아이의 붉은 뺨을 보다 고개를 저었다.
“……필요 없어.”
“왜?”
“…….”
“널 고통스럽게 하고 에르젠을…… 네 아이를 죽게 만든 자야. 네 심장에 몇 번이고 검을 찔러 넣은 사내야. 그런데 왜 복수가 필요 없어?”
인상을 팍 찌푸린 채 빠르게 말을 뱉는 모습에는 답답함이 가득했다. 긴 한숨을 푹 내쉰 아이가 침대로 올라 헤레이스의 곁에 누워 그녀를 쳐다보았다. 답을 기다리는 호박색 눈에 헤레이스가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그리하면 에르젠이 돌아와?”
“…….”
“그 사람 심장에 똑같이 검을 꽂아 넣고 수천 번 난도질하면 내 아들이 살아 돌아와?”
“…….”
“난 지쳤어.”
“…….”
“그 사람에게 무언가 쏟아 내기에는…… 힘들어. 너무 힘들어. 이제 그만 쉬고 싶어.”
힘없는 목소리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거센 파도에 수만 번 깎여 결국 모래로 흩어진 산호처럼 헤레이스는 부스러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