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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목을 꺾는 악마여-73화 (73/108)

73화.

이즈카엘은 매캐한 연기를 바라보다 짧아진 시가를 손으로 부수어 비벼 껐다. 시가를 너무 피워 정신이 몽롱했으나 제정신으로는 도저히 있을 수가 없었다.

어디서부터 무얼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아니, 제가 벌인 일이 감당되지 않았다.

샤를, 헤레이스, 에르젠. 세 사람의 얼굴이 계속 맴돌기만 했다. 어느 누구에게도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지었다. 돌이키거나 보상을 할 수도 없었다. 이즈카엘은 그것이 가장 두려웠다.

“헤레이스…….”

시시각각 자신을 조여 오는 두려움에 이즈카엘은 아내의 이름만 계속 내뱉었다. 저따위가 감히 이름을 부르는 것조차 아내에게는 모욕이었지만 그 이름을 외지 않고는 지금 상황을 견딜 수가 없었다.

“헤레이스…….”

이제는 눈물조차 나지 않았다. 죽은 동생과 에르젠을 생각한다면 목숨이 다할 때까지 머리를 조아리고 눈물을 흘려야 하건만 가증스러운 그의 눈물샘은 그새 말라 버렸다.

대신 보이지 않는 피눈물이 계속해서 그의 발밑을 적시고 있었다. 그래. 꼭 그의 죄악처럼.

“헤레이스…….”

죽어 마땅하다 스스로도 생각했지만 이즈카엘은 죽을 수 없었다. 아니, 아무리 괴롭다 한들 죽을 생각 따위 없었다.

그에게는 헤레이스가 남아 있었다. 아내는 아주 오래도록, 어쩌면 영영 그를 봐 주지 않을 테지만…… 그럼에도 그는 아내를 두고 떠날 생각 따위 추호도 하지 않았다.

“헤레이스…… 내가 어디서부터 당신한테…….”

그렇기에 이즈카엘은 큰 위기에 봉착해 있었다. 헤레이스의 옆에서 속죄하고 그녀를 지키며 살아가려면 어디서부터 제 죄를 고하고 사죄해야 할까.

“……용서를 빌어야 하지?”

사실 마음 같아서는 모조리 덮어 두고 싶었다. 샤를과 그녀의 연을 망친 것도, 어리석음으로 간통했다 의심한 일도, 그로 인해 동생과 아들을 죽음으로 내몬 일도 모조리 덮어 두고 싶었다.

홀로 괴로움에 허덕이는 일이 있더라도 아내의 눈만은 가리고 싶었다. 그래서는 안 된다는 걸 알지만 도저히 제 죄를 고백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지금도 그를 용서하지 못할 아내인데 사실 이 모든 일이 그로 인해 비롯됐다 하면 아내는…….

“못 해.”

이즈카엘이 손을 달달 떨며 고개를 저었다.

진실을 고백했을 때 차라리 아내가 자신을 원망하며 검으로 그를 난도질하고 팔다리를 베겠다고 하면, 심장에 검을 꽂아 넣겠다고 하면 그리하라 검을 내주며 발치에 조아릴 수 있었다.

하지만 자신이 아는 헤레이스는 그렇게 할 이가 아니었다. 아내는 그를 베어 내지도, 그의 수급을 자르지도 않을 터였다. 그저 조용히 죽은 눈으로 그를 바라보겠지. 그리고 어떻게든 그를 지워 낼 것이다.

“……그런 건 견딜 수 없어, 헤레이스.”

이즈카엘은 디본 후작을 기억했다. 헤레이스는 아비인 디본 후작의 죽음에 별다른 동요를 보이지 않았다. 그녀에게 디본 후작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 같았다.

헤레이스는 근본적으로 따뜻하고 자비로운 이였지만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이는 아예 머릿속에서 지워 버렸다. 어떤 방법으로든.

“그러니까 말할 수 없어.”

이즈카엘은 그녀의 손에 죽을 수는 있었지만 그녀에게 잊힐 수는 없었다. 그를 잊은 그녀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몸은 물론이고, 속에 영혼까지 타들어 가는 기분이었다.

입술을 내리 문 이즈카엘이 덜덜 떨며 시가 상자를 향해 손을 뻗었다. 하지만 심히 흔들리는 손가락은 무언가를 잡는 행위조차 쉬이 하지 못했다. 이즈카엘은 네 번이나 손을 삐끗하고서야 시가를 쥘 수 있었다.

이즈카엘이 공허한 눈으로 불을 붙일 때였다. 누군가 급박하게 뛰어오는 소리가 들리더니 문을 급히 두드렸다.

똑똑.

들어오라 말하기도 전에 방문이 열렸다. 이즈카엘이 뿜어낸 매캐한 연기 뒤로 노집사가 창백한 얼굴을 보였다. 그는 초췌한 안색의 이즈카엘을 보고 잠깐 움찔거렸으나 제대로 예의도 차리지 않은 채 주인의 방에 들어온 목적을 밝혔다.

“부인께서…… 부인께서 쓰러지셨습니다.”

노집사의 말이 끝나기도 전 막 타들어 가기 시작한 시가가 바닥으로 아무렇게나 내동댕이쳐졌다. 눈앞이 어지러웠음에도 이즈카엘은 뛰었다. 그에게 밟힌 시가가 부드러운 양탄자 일부를 까맣게 그슬렸다.

* * *

머리에 붕대를 감은 아내는 미동이 없었다. 꼭 얼음 위 아이처럼.

헤레이스의 파리한 얼굴이 시야에 들어오자 이즈카엘의 얼굴이 까맣게 타들어 가는 심장과 반대로 하얗게 질렸다. 그가 감히 침대나 의자에 앉지도 못한 채 바닥에 무릎을 꿇고는 아내의 손을 잡았다.

“헤레이스…….”

부들거리는 사내의 손에 헤레이스의 팔마저 미세하게 떨렸다. 이즈카엘은 죄인처럼 고개를 수그린 채 애원하듯 아내의 손에 뺨을 비볐다.

“당신이 왜……. 이 꼴이 되어야 하는 건 난데 당신이 왜…….”

감히 사죄조차 할 수 없었다. 어리석은 자신 때문에 이제 아내마저 죽어 가고 있었다. 이즈카엘은 형편없이 마른 아내의 곁에서 그 자세 그대로 눈물을 쏟았다.

그렇게 사흘하고도 몇 시간이 지났다. 헤레이스는 밤이 지나고 새벽이 한창일 때 눈을 떴다. 어딘가 공허한 푸른 눈동자가 옆으로 굴러갔고, 그녀는 석상처럼 굳어 있는 사내를 확인하고 그를 불렀다.

“이즈카엘.”

“헤레이스?”

제 차례를 기다리는 사형수처럼 머리를 푹 숙이고 있던 이즈카엘이 헤레이스의 부름에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가 말조차 하지 못한 채 헤레이스의 손을 꼭 부여잡고 의원을 부르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헤레이스는 작게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바짝 마른 입술을 달싹여 입을 열었다.

“……그 여자는요?”

이즈카엘은 헤레이스가 누구를 말하는지 대번에 알아듣고 얼굴을 굳혔다. 샬럿. 검은 피를 토하고 죽은 그 여자를 말하는 것이리라.

샬럿을 떠올리자 이가 갈렸다. 동시에 진즉 그 여자를 죽이지 못한, 아니 애초에 그 여자를 데려온 자신에 대한 환멸이 온몸에 들끓었다.

“당신이 데려온 그 여자, 에르젠을 죽인 그 여자 말이에요. 어떻게 했어요?”

이즈카엘이 바로 답을 않자 헤레이스가 재촉했다. 아내의 독촉에 퍼뜩 정신을 차린 이즈카엘이 싸늘한 얼굴을 했다. 아내도 여자가 죽은 건 이미 알 터였다. 계단에서의 꼴은 도저히 산 자라 부르기 어려웠으니. 그러니 아내가 묻는 것은…….

“내버렸어.”

일말의 동정도 없는 냉랭한 목소리였다. 헤레이스가 눈을 깜빡이며 이즈카엘 쪽으로 고개를 살짝 틀었다. 그러자 이즈카엘이 짓씹듯 말을 이었다.

“카르베에 가라앉혔어. 눈조차 감겨 주지 않았으니 그 여자는 어디에서도 안식을 찾을 수 없을 거야.”

카르베는 썩은 늪들을 통칭하는 단어로, 아나이스에서 가장 기피되는 장소였다. 짐승의 사체와 고인 물이 한데 썩어 가는 장소의 특성상, 어느 곳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게 당연했다. 특히 아나이스 사람들은 거의 병적으로 카르베를 멀리했다. 그리고 그 속에는 예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속설의 역할이 가장 컸다.

‘목이 잘린 네 시체는 눈 뜬 채 카르베에 가라앉을 것이다. 신께서도 널 용서치 않으시길.’

‘제발…… 자비를 베푸시오. 그것만은…….’

‘네 손에 죽은 사내가 둘이요 여인이 여섯, 아이가 넷이다. 그 주제에 어찌 자비를 바라는가!’

아나이스에서는 오래전부터 눈 뜬 시체를 카르베에 가라앉히면 죽어서도 구원받지 못한다는 말이 널리 퍼져 있었다. 때문에 보통 죄질이 몹시 나쁜 사형수나, 페가토 후작 같은 반역의 수괴들이 사형당한 후 눈꺼풀이 아교로 붙여진 채 그곳에 버려지고는 했다.

죽어서도 구제받지 말고 영영 떠돌라는, 마지막 자비조차 거둔 일종의 형벌로, 심성 여린 이들은 감히 카르베라는 단어조차 입 밖으로 내뱉지 못했다.

“……그럼 지금쯤 끔찍한 몰골이겠네요. 가여워라.”

말과 다르게 헤레이스의 목소리에는 일말의 동정도 없었다. 그녀의 시선이 이즈카엘 뒤쪽의 허공을 향했다가 다시 그에게 맞춰졌다. 아주 잠깐이지만 그 안에는 원망과 증오가 언뜻 비쳤다.

“그런데 당신은 왜 여기 있어요? 그 여자가 카르베에 가라앉았다면 당신도 그래야 하잖아.”

헤레이스의 물음에 이즈카엘이 입술을 내리 물었다.

아내의 말이 맞았다. 샬럿. 그 여자가 카르베에 버려졌다면 자신도 마땅히 그 꼴이 되어야 옳았다. 에르젠의 죽음…… 아니, 지금까지 일어난 모든 일의 발단은 자신이었다. 자신의 열등한 감정이 모든 것을 어그러뜨렸다.

“일전에 에르젠이 위험했을 때 당신은 그 여자를 추방만 했어요. 본래라면 죽을죄인데…… 당신은 그 여자를 살려 보냈어. 하긴 사랑하는 여자니까 그랬겠지.”

이즈카엘이 헤레이스의 오해에 주먹을 쥐었다. 아내는 그가 샬럿을 아껴 목숨만은 살려 주었다고 착각하고 있었다. 참지 못한 이즈카엘이 설명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헤레이스, 믿지 못하겠지만…… 난 그 여자를 단 한순간도 아끼거나 사랑한 적 없어. 그 여자를 추방한 이유도…….”

“이유가 어찌되었건 애초 그 여자를 들인 건 이즈카엘 당신이잖아요. 그러니 에르젠은 당신이 죽인 거나 마찬가지야.”

하나 헤레이스는 그의 말을 중간에 잘랐다. 설명을 들으면 무엇 하나. 에르젠은 이미…….

헤레이스가 사내의 손아귀에 잡혀 있었던 자신의 손을 뺐다. 사내가 그러쥐지 않았던 손과 다르게 따뜻한 손의 온기가 이질적이었다.

“하기야 나도 마찬가지네요. 에르젠을…… 내 아들을…… 지켜 주지 못했으니까.”

헤레이스가 허탈한 웃음을 픽 흘렸다. 어느새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한 줄기 주르륵 흘렀다.

머리에 피가 빠져나가 그런 걸까. 정신이 어느 때보다 선명했다. 아들이 죽었다는 사실이 인지됨과 동시에, 자신의 존재가 역겨워 견딜 수가 없었다. 헤레이스가 양손을 목 근처로 가져갔다.

“그 여자가 안식 없이 떠도는 벌을 받는다면 나도 마땅히 그래야 해요. 나도 썩은 물에 가라앉아야 해.”

그대로 목을 조르고픈 충동이 들끓었다. 숨구멍을 틀어막고 눈을 뜬 채 늪 아래로 내려앉는다면, 그리한다면 산 채로 심장을 갉아먹히는 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포개진 손에 있는 힘껏 힘이 들어갔다.

“헤레이스!”

이즈카엘이 손을 뻗어 헤레이스의 손을 뜯어냈다. 헤레이스는 버둥거리며 반항했으나 사내의 힘을 당해 낼 수 없었다.

이즈카엘에게 양손을 결박당한 채 깔린 형국이 되자 헤레이스가 어느 순간 힘을 탁 풀었다. 그녀를 내려다보는 호박색 동공이 사정없이 떨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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