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꿇어앉은 사내의 손에 뜨거운 무언가가 떨어졌으나 차가운 방 안 공기 때문에 금세 식었다. 그것이 이즈카엘에게 완전히 다가와 손가락으로 그의 눈과 가슴 부근을 차례로 가리켰다.
“애초에 네 여기, 그리고 여기가 문제야. 넌 네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믿었잖아. 네 감정에 매몰돼 허우적거리느라 그 외에는 신경도 안 썼지.”
“…….”
“의심 말고 네 아내를 믿었다면…… 그녀가 울며 아니라고 몇 번이고 네게 진실을 말했을 때, 그 저열하고 지저분한 감정들을 지우고 한 번만 고개를 끄덕여 줬다면…… 네가 징그럽다고 말하는 내 목소리보다 사랑해 어떻게든 차지한 그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으면…….”
“닥쳐.”
“……너희 세 식구는 지금쯤 웃으면서 함께 어울렸을 텐데. 이참에 이즈카엘 네가 망친 미래를 말해 줄까?”
“닥쳐! 닥치란 말이다!”
이즈카엘이 고함치며 벌떡 일어나 손을 휘둘렀다. 비틀거리긴 했으나 제법 매섭고 빠른 동작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이즈카엘의 주먹을 쉬이 피하며 말을 이었다.
“네 어리석은 의심과 헛짓거리만 아니었어도 에르젠은 이즈카엘 널 아빠라 부르며 따랐겠지. 한 식탁에서 밥을 먹고 한 침대에서 잠을 자고……. 넌 아내의 관심을 빼앗겨 서운해하면서도 에르젠을 안아 줬을 거야. 아내를 꼭 빼닮은 사랑스러운 아이니까.”
듣기 싫었으나 그것의 목소리는 어느 때보다 귀에 선명히 박혔다. 이즈카엘이 제 귀를 틀어막았다.
“에르젠이 자라 널 아버지라 부를 때면…… 넌 네 아내와 아이 문제로 소소하게 싸우기도 하고 화해도 했을 테지. 그때쯤이면 둘 사이에 아이가 더 생겼을지도 몰라. 가령 널 닮은 딸이라든가……. 그러다 에르젠이 자라 지금 네 나이쯤 되고 다른 아이들도 다 자라면 너와 네 아내는 둘만의 시간을 많이 가졌을 거고…….”
에르젠의 밝고 경쾌한 웃음소리가 이즈카엘의 후두부를 치고 나간다 싶더니 어느새 머릿속까지 침범했다. 상상하지 않으려 해도 계속해서 그려졌다. 자신이 망친 미래가.
“……네 아내는 늙어서도 망설임 없이 속삭여 줬을 거야. 사랑한다고. 당신이 있어 행복했노라고. 헤레이스……, 네가 망친 그녀는 다정하고 솔직한 여자니까. 분명 여러 번 그리 말했겠지.”
사랑한다며 제게 속삭이는 헤레이스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이즈카엘은 끔찍한 고통에 신음하면서도 아내의 상냥한 푸른 눈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이즈카엘, 사랑해요.’
눈앞에 닿을 듯 헤레이스의 인영이 가까워져 있었다. 이즈카엘은 저도 모르게 손을 떼고 시야에 어른거리는 환영에 손을 뻗었다.
그러나 손이 닿자마자 아내는 모래처럼 무너져 안개처럼 흩어졌다. 이즈카엘이 정신 나간 이처럼 그것을 잡으려 허우적거리다 양 무릎을 꿇었다.
“하지만 이제 불가능한 일이야. 가장 바랐던 미래를 제 손으로 망치다니…… 보는 것만으로도 안타까워.”
그것의 비웃음이 좁은 공간에 가득 참과 동시에 이즈카엘은 쇠를 긁어내리는 듯한 기괴한 울음소리를 냈다. 그의 눈에서는 어느새 눈물이 쉴 새 없이 떨어지고 있었다.
“……왜 나지.”
“…….”
“왜 하필 나한테 너 따위 것이 붙었냐 이 말이야! 왜! 왜!”
한참 눈물을 쏟은 이즈카엘이 그것의 어깨를 잡아 흔들며 소리쳤다. 작은 몸이 사내의 힘에 밀려 앞뒤로 달랑거렸다.
“내게 왜 이러나! 내가 뭘…… 네놈에게 대체 뭘 했다고…….”
이즈카엘이 할 수 있는 최소한의 발버둥이었다.
그는 인정하기 어려웠다. 제 손으로 모든 것을 망쳐 버렸다는 사실을. 누구든 탓해야 했다. 그렇지 않고는 제정신을 유지하기 어려웠다.
“내 탓 말라니까.”
울부짖는 사내를 보며 그것이 차갑게 속삭였다. 거칠게 움직이는 몸에도 움직이지 않던 노란 동공이 한 쌍에서 두 쌍으로 변했다. 네 개의 눈동자가 이즈카엘을 내려다봤다.
“이즈카엘, 네가 날 불렀잖아. 헤레이스 그녀를 가지고 싶다고. 샤를과 행복해질 수 있는 그녀를 차지하고 싶다고.”
이즈카엘은 그것의 눈동자에 담긴 제 모습에 몸을 굳혔다.
처음 그것의 목소리를 들었을 때가 기억났다. 붉은 잎이 쏟아지듯 떨어지던 나무, 그 아래서 자신은 곧 결혼할 그녀와 자신의 이복동생을…….
“저열한 열등감과 지저분한 질투로 네 속에 있는 내게 끊임없이 속삭였지. 도와 달라고. 그녀를 동생의 곁에서 떨어뜨려 네 옆에 세워 달라고.”
……끝없이 미워하고 저주했다. 그들이 행복해지지 않기를. 그녀의 곁에 설 유일한 이가 자신이 되기를 간절히 고대했다.
“난 메데아의 아이이자 내 형제인, 그리고 아비가 된 널, 나와 가장 가까운 널 도왔을 뿐이야.”
그리고 도와줄까 묻는 목소리에 답했다. 그리해 달라고.
“그 외 모든 일은 네가 시작했고 네가 선택했어. 그러니 원망 말고 너 스스로를 탓해. 지금 이 결과도, 망가진 네 그녀도, 죽은 아이도 모조리 네 탓이니까.”
지금껏 묻어 뒀던 죄악이 그를 좀먹기 시작했다. 이즈카엘은 무릎을 꿇은 채 고개를 조아렸다. 부끄러워 도저히 앞을 볼 수 없었다.
* * *
“에르젠!”
헤레이스가 비명을 지르며 손을 뻗었다. 그러나 잡히는 것이라고는 빈 공간과 지독하리만치 익숙한 풍경이었다. 헤레이스는 떨리는 눈으로 정처 없이 방 안을 둘러보다 양손에 얼굴을 묻었다.
눈물이 손바닥을 적셨다. 벗어나고 싶은데 현실은 점점 선명하게 그녀를 덮쳐 왔다. 끔찍할 정도로 뚜렷해지는 정신에 헤레이스가 눈물을 닦으며 고개를 거칠게 저었다.
“아니야. 에르젠은…… 에르젠은 죽지 않았어. 내 아들은 떨어져 있을 뿐이야. 그 사람이 데려간 것뿐이야.”
애써 부정하자 뿌옇게 변한 시야와 마찬가지로 정신도 멍해졌다. 헤레이스는 제 생각을 확신하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억지로 지어진 웃음 사이로 뜨거운 눈물이 소리 없이 줄줄 샜다.
“남, 남부에 보낸다 했잖아. 지금쯤 따뜻한 날씨 아래서 잘 지내고 있을 거야. 15년이 지나면 볼 수 있을 테니까 그때까지만 기다리면…….”
멀리 남부로 향했을 에르젠을 그리자 심장이 조여 왔다. 헤레이스는 이별이 버거워서 그런 것이라며 스스로를 다독였다. 하나 가슴을 쥐어뜯는 손에는 힘이 잔뜩 들어갔다.
‘엄마.’
끅끅대는, 숨넘어가는 소리가 목구멍을 억지로 비집고 나올 때였다. 바로 옆에서 에르젠의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숙인 채 눈물을 떨구던 헤레이스가 희번덕거리는 눈으로 옆을 돌아봤다.
“에르젠?”
분명 소리가 났건만 옆에는 아무도 없었다. 헤레이스가 이불을 걷어 내고 침대 아래로 허겁지겁 내려가 방을 서성였다. 방 안을 살피는 그녀의 급박한 몸짓에 몇몇 물건이 덜그럭 소리를 내더니 바닥으로 추락했다.
유리병 하나가 화장대에서 떨어졌다. 쨍그랑 소리가 제법 날카로웠건만 방구석 의자에 앉아 잠이 든 하녀는 눈을 뜨지 않았다. 숨소리조차 내지 않고 수마에 빠진 하녀의 얼굴에는 고단함이 한껏 내려앉아 있었다.
끼익.
가만있던 방문이 소름 끼치는 소리를 내며 손가락 두 마디만큼 열렸다. 헤레이스가 문으로 시선을 돌리자 틈 사이로 아이가 훅 지나갔다. 저와 똑같은 검은 머리에 헤레이스가 망설임 없이 문을 열었다.
“에, 에르젠? 에르젠이니?”
하얀 맨발이 차가운 복도 바닥에 닿았다. 아이는 그새 복도 끝까지 달아난 채였다. 헤레이스가 기쁨에 허덕이며 달리기 시작했다.
그녀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작은 몸은 토끼처럼 가볍고 재빨랐다. 아들을 따라잡진 못하지만 그조차 헤레이스는 기뻤다. 에르젠은 그녀의 눈앞에 있었다. 생생히 살아 움직여 그녀에게 희망을 주고 있었다.
“에르젠! 내 아가…….”
헤레이스는 어느새 복도를 지나 계단에 닿았다. 에르젠이 통통 튀는 몸짓으로 계단을 내려갔다. 헤레이스가 난간 틈으로 아들을 보고 휘청이면서도 따라갔다.
“에르젠? 어디 있어? 엄마는 여기 있는데 어디 있니? 에르젠!”
그녀가 모퉁이를 돌았으나 에르젠은 사라져 있었다. 헤레이스가 두리번거리며 아들을 찾았다. 층계참에서 비틀거리는 모양새가 불안정했다.
미친 듯이 아들을 찾아 헤매던 헤레이스가 발끝을 적시는 감촉에 멈춰서 아래를 봤다. 검은 액체가 꾸물거리며 그녀의 발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놀란 헤레이스가 발을 뺐다.
눈을 한 번 깜빡이자 검은 액체는 자취를 감추었다. 등 뒤를 오싹하게 만드는 감각에 헤레이스가 머뭇거리다 제가 위치한 곳을 깨닫고 신음을 뱉었다.
“아…….”
지금 헤레이스가 서 있는 곳은 샬럿이 죽어 간 장소였으며, 에르젠이 떨어진 위치였다.
헤레이스는 샬럿이 이 자리에서 에르젠을 밀치는 그때, 홀에 있지 않았다. 하지만 아들을 보는 순간 기이하게도 그때의 상황이 그녀의 눈앞에 선명히 그려졌다. 꼭 직접 목격한 것처럼.
멍하니 있던 헤레이스가 물끄러미 바닥을 봤다. 반질반질 잘 닦인 바닥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깨끗했다.
그녀는 다시금 고개를 들었고, 그녀의 시선이 천천히 앞으로 흘렀다. 푸른 눈이 수십 개의 계단을 지나 이즈카엘이 에르젠을 안고 있던 곳에 머물렀다. 계단 바로 아래서 아이는 사내에게 안겨 있었다. 아무런 미동도 없이. 고요하게.
“에르젠…….”
눈을 감고 있던 아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애써 지우고 있었던 현실이 생경하게 다가왔다.
헤레이스는 걸음을 움직여 계단에 발을 반쯤 걸쳤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혹시나 하는 마음에 뒤를 돌아봤다.
어두컴컴한 공간에는 그녀를 제외하고 그 누구도 없었다. 다시 앞을 본 헤레이스가 아무 망설임 없이 몸을 기울였다.
아찔한 높이의 계단에서 여린 여체가 낙하했다. 조금 전까지 발을 딛고 있었던 층계참이 한 번의 깜빡임에 멀어졌다. 헤레이스가 웃으며 눈을 감았다. 캄캄한 시야 사이로 에르젠이 그녀를 향해 웃고 있었다.
쿵.
찰나였으나 머리에 아찔한 충격이 가해졌다. 헤레이스가 멀어지는 의식을 편히 놓았다. 스르르 감긴 눈과 올라간 입꼬리에는 안식이 가득했다.
검은 머리카락 뒤로 붉은 피가 비치자 계단 바로 옆에 있던 그림자에서 뱀 같은 것이 스르륵 기어 나오더니 아이 형상으로 변했다.
미겔이 헤레이스의 머리맡에 한쪽 무릎을 구부리더니 붉은 피를 손가락으로 찍어 입가로 가져갔다. 그리고 입매를 굳힌 채 엄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러면 안 돼요.”
아이가 제 손가락을 물어뜯더니 헤레이스의 입가로 가져갔다. 붉은 피 대신 검은 액체가 꿈틀거리며 흐르더니 헤레이스의 입술 사이를 비집고 들어갔다.
그 모습을 모두 지켜본 아이가 고개를 숙여 헤레이스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그리고 못마땅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당신이 죽으면 아버지 꼴이 볼만하겠지만…… 이건 싫어.”
팍, 찡그려진 인상에는 혼란이 가득했다. 아이가 물끄러미 헤레이스를 바라보다 다시 손을 뻗었다. 그러나 헤레이스에게 닿기 전 소란이 위쪽에서 시작됐다.
“부인! 어디 계세요! 부인!”
멀리서 헤레이스를 찾는 하녀의 목소리가 들리더니 여럿의 발걸음 소리가 성내를 울렸다. 위를 올려다본 그것이 서늘한 얼굴로 일어섰다. 그리고 어두컴컴한 그림자로 다시 숨어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