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화.
쿵.
문이 닫히자마자 이즈카엘의 얼굴이 무너졌다. 다른 이들과 헤레이스의 앞에서는 보이지 않았지만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그가 얼음을 쥔 채 몸을 파들파들 떨었다.
‘아저씨가 내 아빠예요?’
제 자식이라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아이였다. 하지만 이리, 이곳에 있을 거라고는 감히 상상도 하지 않았다. 아이가 있어야 할 곳은 이런 얼음덩어리 위가 아니었다. 푸릇한 잔디, 푹신한 침대. 부드러운 카펫……. 아이와 어울리는 단어는 그러한 것들이었다.
무릎을 꺾은 이즈카엘이 이상한 소리를 냈다. 낮고 울리는, 단장을 쥐어짜는 듯한 소리가 목구멍 밖으로 나왔다.
“이제 와 무슨 소용이야.”
이즈카엘이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을, 혼자만의 애도를 할 때였다. 문이 열리지도 않았건만 어디서 경쾌한 아이 목소리가 들렸다.
꿇어앉은 사내의 옆으로 작은 구두가 삐죽 튀어나온다 싶더니 반으로 쪼개진 눈송이가 바닥을 굴렀다. 목소리의 주인을 알아본 이즈카엘이 망설임 없이 손을 뻗었다.
쾅!
에르젠이 누워 있는 바로 옆 얼음 위로 작은 몸이 처박혔다. 둔탁한 소리가 제법 생경했지만 얼음 위에 누운 아이는 히죽 웃을 뿐이었다. 그것이 살기 가득한 이즈카엘의 얼굴을 비웃으며 말했다.
“너 때문에 온갖 개고생에 뼈마디가 부서지고 피가 터지는 고통을 느꼈는데 또 이 꼴이야?”
“……죽어.”
이즈카엘이 검을 뽑았다. 긴 검신이 드러나더니 순식간에 칼날이 아래로 내리 찍혔다. 검이 그것의 입을 관통하고 두꺼운 얼음까지 여러 갈래로 쪼갰다. 쩌적 소리가 나더니 순식간에 얼음덩어리가 잘게 조각났다.
“싫은데. 네 그런 얼굴 구경하는 재미가 얼마나 쏠쏠한데.”
쪼개진 얼음덩어리 사이에, 검에 찔려 있던 얼굴이 검은 액체로 녹아내렸다. 굳건히 박혀 있을 것 같던 검은 균형을 잃은 채 옆으로 쓰러졌고, 그것이 순식간에 얼굴을 되찾았다.
“나한테서 돌려받은 기억은 별로인가 봐? 언제는 가져간 게 뭐냐 그리 다그치더니…… 너와 비교하기 미안할 정도로 선한 동생을 두 번 죽인 기분이라 그래?”
다시 검을 집어 들고 그것의 위에 선 이즈카엘이 순간 멈칫했다. 검날에 비친 그의 얼굴이 죄책감에 일그러졌다. 그것이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그런 이즈카엘을 구경했다.
“불쌍한 샤를……. 이즈카엘 너 때문에 그리 죽고 유해조차 수습하지 못했지.”
샤를의 시신은 그날 죽은 야만인들 무리와 뒤섞여 유실됐다. 죽다 살아난 이즈카엘은 헤레이스를 부르며 제정신이 아닌 상태로 말을 몰았다. 이복동생의 죽음에 대한 기억조차 잃었으니 지금쯤 샤를의 시체는 사라졌으리라.
검을 든 이즈카엘의 손은 스스로에 대한 경멸로 떨렸다. 그러나 그는 곧 이를 악문 채 다시 한번 검을 내리찍었다.
그것이 픽 웃더니 몸을 굴려 칼날을 피했다. 검이 목적을 잃고 돌바닥에 부딪쳤다.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이즈카엘의 손에 충격이 닿았다.
“그러고 보니 여기 너 때문에 죽은 이가 하나 더 있네.”
몸을 굴린 그것이 에르젠의 머리맡으로 가 섰다. 그리고 눈을 감은 아이의 검은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슬픈 목소리를 지어 냈다.
“에르젠, 가여운 내 동생. 제대로 크기도 전에 져 버렸어. 귀엽고 사랑스러운 아이였는데. 이즈카엘, 네 그녀에게는 세상 전부에 가까운 아이였지.”
에르젠의 위로는 차마 검을 휘두르지 못한 이즈카엘이 그것을 노려봤다. 그것은 이즈카엘의 살기 어린 시선에도 여전히 에르젠을 쓰다듬었다. 부드러운 손길과 다르게 아이를 내려다보는 그것의 눈은 무감했다.
“그래도 생각보다 멀쩡하네. 난 또 네가 동생을 죽였을 때처럼 난동이라도 부릴 줄 알았는데.”
“손 치워.”
“네 아이가 아니기 때문인가? 그래서 미치기 직전인 네 아내와 다르게 괜찮은 거야? 네 동생의 아이니까?”
그것은 이즈카엘의 가장 밑바닥에 깔린 죄책감을 낱낱이 건드렸다.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이즈카엘을 후벼 팠다. 귀에 박히는 죄악에 이즈카엘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떨렸다.
괴로움에 구겨지는 이즈카엘의 얼굴과 달리, 그것의 얼굴엔 기쁨이 잔뜩 피었다. 그것이 걸음을 옮겨 이번에는 에르젠의 옆쪽에 섰다. 작은 손이 하얀 수의를 입고 있는 에르젠의 심장 부근으로 기어 들어가더니 옷을 살짝 올렸다.
그것이 드러난 피부 아래의 무언가를 뚫어져라 보다가 이즈카엘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즈카엘과 같은 금안이 가느스름해졌다.
“정말인가 보네. 그런데 이거 어째. 아버지, 에르젠 이 아이는…….”
간악한 웃음이 얼굴을 타고 흐르다 발밑으로 떨어졌다. 그것이 평생의 원수를 지옥의 수렁에 넣은 듯 희열이 한가득 섞인 목소리로, 몸을 떨며 말했다.
“……나와 같은 아비를 둔 게 맞는데.”
쿵.
한 톨의 의심도 없이 거짓이라 믿었던 진실에 이즈카엘의 심장이 떨어졌다.
“뭐?”
아니라 생각하면서도 반사적으로 물음이 나왔다. 이즈카엘은 그 자리에 우뚝 선 채 그대로 굳어 버렸다.
“잔인한 일이야. 아비가 제 피도 못 알아보는 건.”
“……알아듣게 말해.”
크지 않은 목소리였으나 미세한 떨림이 있었다. 하나 그것은 어느새 감정을 갈무리한 채 여유를 찾았다.
그것이 에르젠의 옷을 끌어 내리고 주름을 폈다. 그리고 에르젠의 옆구리에 손을 살짝 올린 채 살살 쓰다듬으며 말했다.
“에르젠이 태어난 날, 여기를 보고 확신했지? 네 아이가 아니라고.”
이즈카엘이 얼굴을 굳혔다. 사실이었다. 그는 에르젠의 옆구리 뒤에 있는 붉은 점을 보고 제 의심을 확신으로 바꿨다. 특이한 모양의, 피부 위 유일한 결점. 제게도, 아비에게도 없고 샤를에게만 있는 동생만의 특징인…….
“네게는 없는 게 아내를 껴안고 있었던 동생에게는 있었으니 의심이 갈 법하지. 그런데 이즈카엘, 이게 네 동생만이 가진 게 아니라면? 네 아비에게도 있다면? 그럼 어떨 거 같아?”
“거짓말! 그자에게는 없었어. 내 눈으로 보았다. 내 아비에게는…….”
“네가 봤을 때는 없었겠지. 하지만 난 봤는데.”
이즈카엘의 말이 싹둑 잘렸다. 조롱 섞인 말투가 순진무구한 아이의 얼굴과 어울리지 않았다. 이즈카엘이 끝내 믿지 못하겠다는 얼굴을 하자 그것이 한숨을 푹 쉬더니 팔짱을 끼고 동화책을 읽는 것처럼 과장된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태어나기도 전의 일이야. 눈이 아주 많이 내리는 날이었던가. 네 아비는 늑대에게 물린 채로 눈밭을 기어 다니고 있었지. 그대로 죽었으면 좋았을 텐데…….”
하얗게 번쩍이는 빛이 금안에 맴돌았다. 아주 잠깐이지만 얼굴을 굳힌 그것이 짓씹듯 말끝을 흐리며 눈을 가늘게 떴다.
“……운이 좋았어. 네 어미를, 메데아를 만났거든. 네 어미가 네 아비에게 숨을 불어 넣어 주고 피를 닦아 줬지. 바늘도 잡아 본 적 없으면서 구멍이 뚫린 사내의 옆구리를 잘도 꿰맸어. 하지만 그날 네 아비의 일부는 늑대 배 속으로 영영 사라졌지.”
“…….”
“네 어미가 흔적조차 없이 네 아비를 치료했을 때는 쓸데없다 여겼는데…… 그게 일을 이렇게 만들 줄은 나조차 몰랐어.”
이즈카엘의 손에 힘이 빠졌다. 검이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졌다.
그것이 이번에는 에르젠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헤레이스를 닮은 검은 머리카락이 생전과 다름없이 부드러웠다.
“세르펜스의 붉은 머리카락이나 네 금안처럼 대다수가 타고났으면 가문의 피를 가리는 법이 다 치켜세워졌을 텐데. 인간들은 그런 거 중요하게 생각하잖아.”
“…….”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러지 못했지. 당연한 일이야. 공작들만 살펴봐도…… 네 조부와 조부의 아비는 이 점이 없었지만 그 위는 이 점을 타고났지. 그런데 또 그 위는 없었어. 세르펜스의 피를 이어받은 이 중 대략 반의반에 반 정도만 타고났나?”
“…….”
“아주 제멋대로인 대물림이야. 네 아비와 동생처럼 부자가 함께 타고나는 건 드문 일이지. 하지만 확실한 건 제멋대로인 만큼 네 조상 대부분은 이걸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는 거야. 이게 병을 가져오는 것도 아니고, 침대에서 제 반려나 정부와 뒹굴 때 장난치며 언급하는 정도였지.”
이즈카엘의 눈동자에 금이 감과 동시에, 귓가에 그날 절벽에서 들었던, 얼음에 금이 가던 소리가 났다. 이즈카엘이 거칠게 숨을 내쉬었다. 머리가 어지러워 제대로 생각을 할 수 없었다.
“그런데 이즈카엘, 넌 네 조상 중 그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던 걸로 아내의 간통을 확신했고…… 그걸 빌미 삼아 그녀를 모욕하고 학대했지. 게다가 네 자식조차 알아보지 못한 채 어미와 떨어뜨려 놓고 증오를 정당화했어.”
그것이 허덕이는 이즈카엘을 보고 빙그레 미소를 짓더니 말을 이었다. 아예 끝장을 보겠다는 듯 거침없는 태도였다.
“가해자가 피해자 행세를 하며 복수를 운운하다니. 얼마나 우스운 일이야. 조금만 생각하고 조사했어도 네 눈을 가린 것이 얼마나 허술한지 알았을 텐데…….”
견딜 수 없어진 이즈카엘이 주저앉았다. 평정을 잃은 시야는 이제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저 괴물이 거짓을 지껄이고 있다고 믿고 싶었지만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저것은 잔인하리만치 진실만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이즈카엘이 하얗게 질린 손으로 제 얼굴을 감쌌다. 그러자 그것이 이즈카엘에게 가까이 다가가 물었다.
“왜 그런 얼굴이야? 이제 와 네 아이라 생각되니 와닿아? 후회돼? 아이에게 아내를 빼앗겼다며 시답잖고 열등한 질투를 한 주제에?”
이즈카엘은 고개를 떨군 채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러니 그의 표정이 보일 리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꼭 이즈카엘의 얼굴을 안다는 듯 여유로운 태도를 보였다. 이즈카엘이 울분 섞인 얼굴을 들었다. 그의 눈은 그새 충혈된 채 번들거리고 있었다.
“내게 속았다 생각하는 모양인데, 내 탓을 하면 곤란해. 난 단 한 번도 거짓말한 적 없어. 내가 에르젠이 네 아이가 아니라고 네게 말한 적 있어?”
“네놈이…… 분명 그때 네놈이…….”
귓가에 수도 없이 속살거리며 자신을 갉아먹던 목소리. 그 소리가 자신의 이지를 망가뜨렸다. 그것은 의심에 불을 질렀고 종국에는 확신하게 했다.
“난 항상 네게 묻기만 했지. 답을 내린 건 너야.”
하지만 억울하다 생각하려 해도 차마 할 수 없었다. 저것의 말이 옳았다. 아내의 목을 틀어쥔 채 그녀를 절망에 몰아넣은 것도, 아이를 저 차가운 얼음에 올려놓은 것도 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