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화.
9장. 얼음 조각
천둥과 번개를 요란하게 몰고 온 폭풍이 물러나자 언제 그랬냐는 듯 날씨가 맑아졌다. 헤레이스는 따갑게 쏟아지는 아침 볕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아들의 옆을 지켰다.
“에르젠, 춥지 않니? 손이 차가운데…….”
에르젠의 손을 꼭 붙잡고 있는 그녀의 얼굴은 미소가 한가득하였으나 어딘가 불안정했다. 금이 간 유리잔을 보듯 아슬아슬한 위태로움이 모자 주변을 떠돌아다녔다.
“……많이 피곤했나 봐. 늦잠을 잘 모양이네.”
남은 손으로 에르젠의 얼굴을 쓸던 헤레이스가 아들의 코 가까이에서 손을 멈췄다. 파리한 손이 어색하게 방향을 틀더니 뺨만을 건드렸다. 햇빛을 받아서일까. 미동 없는 에르젠의 뺨은 제법 따뜻했다. 하지만 그것은 생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온기에 불과했다.
“그래도 걱정하지 마, 에르젠. 일어날 때까지 엄마가 옆에 있을게. 우리 아들이 일어나면 뽀뽀해 달라 해야지.”
헤레이스가 아들의 마른 입술을 손가락으로 살살 문지르며 작게 웃었다. 부끄러움 많은 아들은 먼저 하는 입맞춤에는 인색한 편이었지만 그녀의 부탁에는 항상 너그러웠다.
헤레이스는 아들의 말랑한 입술 촉감을 그리며 눈을 천천히 감았다. 부드러운 바람이 머리카락을 간지럽히고 따스한 볕이 딱 기분 좋게 몸을 데웠다. 안락하고 행복한 기분에 헤레이스가 미소를 지었다.
“부인…….”
그러나 헤레이스의 평화는 오래가지 못했다. 헬렌이 안절부절못한 채 방에 들어서더니 곧 이즈카엘과 노집사, 그리고 하녀 몇이 들이닥쳤다.
방 안을 꽉 채운 사람들의 인기척에 헤레이스가 눈을 뜨고 자리에서 일어나 침대 앞에 섰다. 몸으로 아들을 숨기는 그녀의 얼굴에는 경계심이 가득했다.
이즈카엘은 그런 헤레이스를 보다 손을 떨었다. 그는 피가 날 정도로 입술을 물더니 노집사에게 눈짓을 했다. 노집사가 안타까운 얼굴로 헤레이스를 바라보다 고개를 떨구고는 하녀들에게 명했다.
“도련님을 모셔라.”
하녀들이 다가오자 헤레이스가 바짝 얼어붙은 채 팔을 넓게 벌렸다. 흡사 어미 짐승이 새끼를 지키겠다고 털을 세운 모습이었다.
푸른 눈에 비친 독기에 하녀들이 움찔거렸다. 그녀들은 차마 에르젠에게 다가서지 못하고 서로 눈치만 보다 한참 만에 걸음을 뗐다. 그러나 하녀들이 다가오자 헤레이스가 비명을 질렀다.
“물러나!”
“부인…….”
“물러나라 했어! 다가오지 마!”
헤레이스는 알았다. 그들이 그녀에게서 에르젠을 빼앗아 가려는 것을. 헤레이스의 강한 적대에 하녀들이 노집사를 돌아봤다. 노집사가 단호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녀들이 내키지 않은 얼굴로 다시 움직이려 하자 가만 보고 있던 이즈카엘이 발걸음을 옮겼다. 그는 자신을 죽일 듯이 노려보는 헤레이스를 일그러진 낯으로 보다 팔을 뻗어 낚아채듯 그녀의 허리를 붙잡았다.
“놔! 놓아!”
헤레이스는 끌려가지 않으려 손톱을 세웠다. 그러나 사내는 언제나 그랬듯 그녀를 쉬이 제압했다. 작은 여체를 제 품에 욱여넣은 그가 하녀들에게 눈빛으로 명령했다.
“……준비한 곳으로 데려가.”
“에르젠!”
하녀들이 이불째로 에르젠을 안아 들었다. 힘없이 들린 아이의 손이 달랑거렸다. 헤레이스는 다른 이에 품에 안겨 있는 에르젠을 보며 미친 듯이 소리를 질렀다.
“에르젠을 어디로 데려가는 거야! 에르젠! 에르젠!”
날카로운 비명이 끔찍했지만 누구도 인상을 찌푸리지 않았다. 헤레이스만 울부짖는 방, 헬렌을 제외한 하녀들은 숙연한 얼굴로 이곳에서 벗어났다. 이즈카엘과 눈빛을 교환한 노집사도 떨리는 발걸음으로 그들을 따랐다.
“놔! 놓으란 말이야! 놔아! 에르젠!”
“……밖에서 대기하도록.”
이즈카엘이 홀로 남은 헬렌에게 명했다. 헬렌이 고개를 꾸벅 숙이더니 참지 못하고 눈물을 훔치며 방을 나섰다.
“에르젠! 내 아들! 내 아들을 돌려줘! 돌려 달란 말이야!”
헤레이스는 닫힌 문 쪽을 향해 계속해서 비명을 지르고 악을 썼다. 작은 몸에서 어찌 이런 힘이 나는지. 이즈카엘은 들썩이는 아내의 몸에 참담한 얼굴을 했다.
“아…….”
한참 난동을 부려도 에르젠이 돌아오지 않자 어느 순간 헤레이스가 온몸에 힘을 탁 풀었다. 이즈카엘이 아내를 옥죄고 있는 팔을 조금 느슨히 했다.
“이, 이즈카엘!”
거친 숨을 내쉬며 헐떡이던 헤레이스가 멍한 눈으로 문을 보다 갑자기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자신을 안고 있는 이즈카엘을 향해 몸을 틀어 그의 옷자락을 쥐었다.
“내, 내가 잘못했어요. 내가 다 잘, 잘못했어요.”
옷을 잡고 있던 손이 떨어진다 싶더니 헤레이스의 몸이 아래로 추락했다. 이즈카엘의 앞에 무릎을 꿇은 그녀가 손을 모아 빌기 시작했다.
“정, 정부답게 굴라면 굴게요. 잘할 거야. 나 정말 잘할 수 있어요.”
“…….”
“당신 말대로 예쁘게 웃을게요. 사근사근하게 말하고 당신 말에 뭐든 순종할게요. 아양을 떨라면 떨고 침대에 오르라면 오를게요.”
애끓는 목소리가 어찌나 처절한지. 헤레이스는 이즈카엘이 신이라도 되는 것처럼 자신을 한껏 낮춘 채 매달렸다. 고개를 조아리다가도 주인을 기다리는 개처럼 그를 올려다보는 눈빛이 가련했다.
그런 헤레이스의 모습에 이즈카엘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참담했다. 아니, 참담하다는 단어로 설명조차 할 수 없었다. 자신이 망쳐 놓은 결과가 매분 매초 그를 찔렀다. 이즈카엘은 당장 제 목을 찌르고 싶은 충동을 가까스로 누른 채 몸을 숙여 헤레이스와 시선을 마주했다.
“……헤레이스.”
“아! 거기서 나오지 말라면 나오지 않을게요.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을 거야. 당, 당신이 원하는 대로 얌전히 있을 테니까…….”
“헤레이스.”
“……아니, 아니야. 거기 있으면 3년을 기다려야 하잖아.”
“헤레이스, 제발…….”
“그건 안 돼. 에르젠은 나 없이 하루도 못 견디는 아이란 말이야. 아직 어려서 내가 없으면 울다가 잠들 거야. 얼마나 여린데 그건 안 돼.”
“헤레이스!”
시야가 수평을 이루었으나 시선은 부딪치지 않았다. 초점 없이 떨리는 헤레이스의 눈은 바로 앞에 있는 이즈카엘을 담지 않았다. 그녀의 눈에 선명히 박힌 것은 오로지 하나. 아들 에르젠이었다.
이즈카엘이 그녀의 어깨를 쥐고 흔들었다. 하지만 헤레이스는 끝내 아들만 바라보며 그에게 애원했다.
“아, 아이를 가지라 했죠. 당신 아이를 낳으면 에르젠을 돌려준다고 그랬잖아요. 내 아들을 보게 해 준다고 분명히 그랬어.”
“제발…… 헤레이스…….”
“가질게요. 지금 당장 아이를 가질게요. 약속해요, 그러니까 에르젠을 데려와 줘요. 이즈카엘, 내, 내가 아이를 가질 테니까…… 내 아들을 돌려줘. 내 품에 에르젠을 안겨 줘. 응? 제발…….”
그런 이유로 아이를 가질 수 없다며 단호히 말하던 여자였다. 아들을 보고 싶어 울면서도 끝내 그럴 수 없다고 고개를 젓던 이였다. 그런데 지금은…….
이즈카엘은 아이를 가지겠다며 저를 붙드는 손을 봤다. 달달, 위태롭게 떨리고 있는 모든 것이 아내를 대변했다.
그는 어떻게든 절망을 피하려 발버둥 치는 아내를 더는 두고 볼 수 없었다. 이대로면 아내는 손쓸 수 없을 만큼 망가질 터였다. 이승을 떠난 아이를 붙들고 매달리다 절망하고 또 절망하겠지. 그리고 종국에는 아이를 따라가겠다고 할지도 몰랐다.
‘……그것만은 절대 안 돼.’
아내가 그리된다 생각하니 피가 식었다. 심장이 당장에라도 멈출 듯 아프게 쥐어짜지는 기분이었다. 이즈카엘이 헤레이스를 단단히 붙들었다.
“헤레이스, 여기에 두면 아이의 모습이…… 당신이 기억하는 모습이 아닐 거야. 그러니까…….”
목구멍 밖으로 겨우 말이 나왔다. 차마 아이가 죽었다고 아내에게 말할 수 없었던 그가 울컥하여 메는 목을 간신히 누른 채 에둘러 말을 전하려 했다. 하나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 헤레이스가 손을 들어 올렸다.
짝!
눈물로 엉망인 얼굴에 증오가 가득 찼다. 헤레이스의 눈에는 그새 초점이 돌아와 있었다. 그녀가 이즈카엘을 똑바로 노려보다 살기 어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따위 말로 내게서 에르젠을 앗아 가려고?”
“…….”
“에르젠을 돌려줘요. 당신이 끼고 도는 그 사생아와 달리 내 아들은 내가 전부인 아이란 말이야.”
“…….”
“내가 없으면 우는 아이야! 나만 찾는…… 나만 있으면 된다 했던 아이야!”
점점 커진 목소리는 비명으로 끝났다. 헤레이스의 가슴이 거칠게 오르락내리락했다. 그녀가 비굴하게 애원하던 자세를 버리고 양손으로 이즈카엘의 멱살을 틀어쥐었다. 옷깃을 붙든 손가락이 하얗다 못해 사라질 듯 창백한 빛을 띠었다.
“나도 마찬가지야! 나도 내 아들만 있으면 돼! 그러니까 에르젠을 다시 데려와! 당장!”
“…….”
“에르젠을! 내 아들을 돌려줘! 돌려 달란 말이…… 흐읍!”
비명이 다시 반복되려던 차, 헤레이스의 얼굴이 새파랗게 변했다.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하는 모습에 이즈카엘이 헤레이스를 품에 안았다.
“헤레이스?”
“하으…… 에, 에르…… 윽.”
“헤레이스! 정신 차려! 헤레이스!”
문이 거칠게 열리고 헬렌이 들어왔다. 이즈카엘은 당장에라도 숨이 넘어갈 듯 허덕이는 헤레이스를 들고 고함을 질렀다.
“의원! 의원을 불러와! 당장!”
사람들의 발걸음 소리가 여기저기서 났다. 헤레이스는 저를 흔드는 손길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천장만 봤다. 방 어딘가에서 에르젠의 웃음소리가 났다. 아이를 찾는 눈이 정처 없이 흔들렸다.
‘에르젠, 내 아들. 어디 있니?’
어디에도 없는 아들에 헤레이스의 눈에는 절망이 차올랐다. 까무룩 정신을 놓기 직전, 헤레이스의 눈에서 눈물이 툭 떨어졌다.
* * *
성 지하 한편에는 특별한 공간이 있었다. 1년 내내 서늘하고 눈과 얼음이 녹지 않는 곳.
제법 넓은 그곳에는 직사각형 모양의 커다란 얼음덩어리가 여러 개 있었다. 세르펜스 공작가의 직계 일원이 사망했을 때, 장례식 때까지 시체를 부패 없이 깨끗이 보관하는 곳. 사용인들은 이 차가운 방을 속된 말로 시체 보관소라 불렀다.
“각하.”
“…….”
“오래 계셨습니다.”
“…….”
“더 계셨다간 몸이 상할지 모릅니다.”
이즈카엘은 방 안 열 개의 얼음덩어리 중 세 번째 앞에 서 있었다. 서늘한 한기가 눈에 보일 정도로 차가운 얼음 위에는 에르젠이 있었다.
“나가 봐.”
이즈카엘이 에드가를 보지 않은 채 말했다. 그의 눈은 에르젠에게 고정돼 움직이지 않았다. 에드가가 무어라 하려다 이즈카엘의 표정에 입을 다물고 몸을 돌려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