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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목을 꺾는 악마여-69화 (69/108)

69화.

“…….”

샤를의 시선을 느낀 헤레이스가 복부에 얹은 손에 힘을 준 채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그녀의 긍정에 샤를이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그의 발걸음은 어딘가 불안했다.

“그래. 내게 조카가…… 조카가 생기는구나. 조금 놀라운걸.”

“…….”

“아…… 그보다 축하가 먼저지. 축하해, 헤레이스! 예쁜 네게서 태어날 아이이니 남자아이든 여자아이든 엄청 예쁠 거야. 기대된다, 내…… 조카의 얼굴.”

그의 목소리는 온실에 들어선 이래로 가장 밝았다. 그러나 샤를의 눈동자는 초점 없이 잘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가 떨리는 자신의 손을 뒤로 감춘 채 헤레이스에게 급히 작별을 고했다.

“그럼 난 이만 가 볼게.”

“샤, 샤를!”

헤레이스가 그를 붙잡으려 했으나 도망치듯 빠른 걸음의 그를 따라잡을 수는 없었다. 샤를이 뒤돌아보지 않은 채 문 앞까지 가더니 나가려다 말고 멈췄다.

“헤레이스.”

샤를은 여전히 그녀에게 등을 보이며 헤레이스의 이름을 불렀다. 헤레이스가 샤를 쪽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바깥의 시린 바람이 살짝 열린 문 사이로 들어오고 있었다. 헤레이스가 몇 발 남기지 않았을 때 샤를이 문을 완전히 열고 나가며 들릴 듯 말 듯 속삭였다.

“……형님과 행복하게 살아야 해.”

* * *

히이이잉.

눈이 덮인 절벽, 샤를이 타고 온 말은 주인을 버린 채 도망갔다. 아찔한 절벽에 선 샤를은 제 앞으로 은발을 가진 사내의 그림자에 잔뜩 긴장한 얼굴을 했다.

“형님…….”

이즈카엘은 샤를에게서 몇 발자국 떨어져 있었으나 그가 쥐고 있는 검은 샤를의 가슴에서 고작 한 발자국 떨어져 있었다. 날카로운 검날에 목울대를 움직인 샤를이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헤레이스와 저 사이에는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제가 그저 멋대로 그녀를 찾아가 마지막 인사를 했을 뿐입니다.”

샤를은 성을 나선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누군가가 자신을 뒤쫓고 있음을 알아챘다. 귀족의 신분도 잃은 채 완전히 몰락한 그를 누가 노릴까 싶었지만, 조심해서 나쁠 건 없었으므로 그는 필사적으로 도망쳤다. 하나 그를 쫓는 자는 말을 매우 익숙하게 몰았고, 샤를은 곧 따라잡혔다.

처음 샤를은 자신을 뒤밟은 이가 이즈카엘인 것에 놀랐으나, 그 감상은 오래가지 못했다.

이즈카엘은 다짜고짜 검을 뽑고 샤를에게 들이밀며 헤레이스와의 관계에 대해 물었다. 샤를은 눈치가 그리 빠른 편은 아니었으나, 그는 곧 이복형이 저와 헤레이스의 만남에 대해 알게 됐음을 눈치채고 오해를 풀기 위해 계속해서 변명하는 중이었다.

“아까도 말했지만 형님 허락도 없이 성에 침입해 그녀를 불러낸 것은 백번 사죄해야 마땅한 죄입니다. 하지만 오해하시는 상황은 없었습니다.”

“…….”

“정말입니다, 형님. 우리는 그냥…….”

우리라는 단어에 이즈카엘의 금안이 사납게 번뜩였다. 그가 이를 갈며 샤를에게 일갈했다.

“알고 있으니 입 닫아.”

“그, 그게 무슨…….”

샤를은 갑자기 험악해진 이즈카엘의 기세에 지레 겁을 먹고 뒤로 조금 물러섰다. 절벽 끝에 뭉쳐 있던 눈에 금이 살짝 가며 소리가 났다. 하지만 두 사람 중 누구도 그 낌새를 맡지 못했다.

“내 아내와 네가 아무 일도 벌이지 않았다는 것쯤은 알고…… 으윽! 젠장!”

이즈카엘이 검을 쥔 손을 부들부들 떤다 싶더니, 고개를 숙이고 다른 손으로 이마를 부여잡았다. 놀란 샤를이 앞으로 가려다 여전히 흉흉한 기세를 내뿜는 검에 멈춰 서서 걱정스러운 얼굴만 했다.

이즈카엘은 잠깐 신음을 흘리더니 고개를 천천히 들었다. 이복형이 나아졌다고 생각한 샤를은 다시 변명을 시작하려다 기이한 광기로 번들거리는 호박색 눈에 얼어붙었다.

“아니. 다시 생각해 보니 잘 모르겠어, 샤를.”

“형, 형님…….”

“헤레이스와 네가…… 간통하지 않았다 믿을 수 없어. 너희 둘은 결혼까지 준비한 사이잖나. 그리고 거기서 껴안고 있었지.”

직접 목격한 장면에 망상이 쓰였다. 이즈카엘의 머릿속엔 직접 듣지 못한 두 사람의 대화가 멋대로 그려졌다. 그가 샤를에게 반걸음 다가갔다.

“……사실은 네가 그녀에게 키스라도 하길 바랐다. 그럼 이리 고민할 필요 없으니까. 감히 내 아내에게 삿된 마음을 품었으니 편히 이걸 휘두를 수 있었겠지. 하지만 넌…… 그러지 않았어. 다행이라 해야 하나? 응?”

“형님! 정신 차리세요. 지금 형님은…… 윽!”

샤를은 이복형의 상태가 어딘가 이상함을 깨닫고 목소리를 높였으나 이즈카엘은 그를 무시한 채 검을 움직였다. 검이 이제 가슴 위로 올라와 샤를의 목가에 닿았다. 이즈카엘이 충혈된 눈으로 먼 곳을 응시하다 샤를의 목으로 서늘한 시선을 옮겼다.

“샤를, 난 내 귀에 울리는 이 목소리를 참을 수가 없어. 계속해서 들려. 그녀의 배 속에 아이가……, 그녀가 사랑하는 사람이 너라고 그리 말한다. 진정 그래? 내가 그녀에게 속고 있던 건가?”

“형님! 그 무슨…… 정신 차리세요! 이즈카엘 형님!”

“네가 살아 있는 한 난 언제나 이 불안감에 시달려야겠지. 언제고 그녀가 날 떠나 네게 갈 수 있다는 가능성에 밤새 떨어야 할 거야.”

이즈카엘의 고저 없는 목소리는 얼핏 들으면 무감해 보였지만 그 속에는 응축된 살기가 있었다. 샤를은 조금씩 다가오는 검을 피해 또 한 발 물러났다. 등 뒤로 바람이 휭 불며 몸이 위태로워졌다.

“형님, 일단 이 검 좀 치우시면 다 설명…….”

“……난 그걸 견딜 자신이 없어.”

“형님! 어?”

쿵! 쿵! 쿵!

무언가 떨어지는 소리가 여러 번 나더니 곧 쩌적, 하고 바닥이 갈라졌다. 기우는 바닥에 두 사람의 몸이 휘청였다. 샤를이 눈을 크게 뜬 채 이즈카엘 쪽으로 손을 뻗었다. 이즈카엘이 아주 잠시 주춤거리다 샤를을 향해 마주 손을 뻗었다.

하나 그 잠시, 찰나가 문제였다. 두 사람의 손은 닿지 못했다. 순식간에 샤를이 아래로 추락하고 균형을 잃은 이즈카엘은 검을 놓쳤다. 그리고 수 초도 지나지 않아 쾅 하는 소리가 지척에 울렸다.

공허했던 이즈카엘의 눈에 그제야 초점이 돌아왔다. 경악한 얼굴로 몸을 잠시 굳혔던 그가 아래를 보더니 떨어진 눈과 그 사이에 파묻힌 이복동생을 발견하고 절벽을 죽 내려갔다. 가파른 벽을 맨몸으로 헤쳐 나아가느라 손을 비롯한 오른팔 전체에 상처가 났지만 그를 신경 쓸 틈 따위 없었다.

“샤를! 샤를!”

“허억! 형, 형님…….”

샤를이 추락한 절벽은 그리 높지 않았다. 아래에 눈이 쌓여 있었으니 그대로 떨어졌다면 큰 부상 없이 살 수도 있었을 터였다.

그러나 샤를의 복부 한가운데는 이즈카엘이 놓친 검이 깊게 박혀 있었다. 이즈카엘은 검을 뽑으려다 쏟아지듯 흐르는 피에 손을 멈췄다.

“샤를! 정신 차려! 샤를!”

“형님…… 이즈카엘 형…… 윽!”

한 번 숨을 쉴 때마다 입에서 핏물이 튀어나왔다. 이미 가망이 없음을 이즈카엘도, 샤를도 알았다. 샤를이 자신을 일으켜 세우려는 이복형의 손을 꽉 잡고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숨을 헐떡이며 마지막 말을 힘겹게 뱉어 내기 시작했다.

“형…… 흐으. 형, 형님…….”

“샤를, 이쪽을 보거라. 나를 봐! 보라고!”

“헤, 헤레이스를…… 허윽! 의, 의심 마세요. 그, 그녀는…… 흐으…… 전, 전부터 형님을…… 형, 형님을 사, 사랑했어요. 아주 오, 오래 전…… 전부터요.”

샤를의 말이 이어질수록 이즈카엘의 얼굴이 형편없이 구겨졌다. 뜨거운 눈물이 시야를 가리고 샤를의 얼굴 위로 툭 떨어졌다.

“그러니까…… 흐으…… 제, 제발 그녀를…… 허윽!”

차가운 공기와 만난 숨 구름이 점차 빨리, 그러나 작게 생겼다. 샤를은 평생 갈망하던 푸른 눈을 시작으로 헤레이스를 그렸다. 그리고 입가에 부드러이 띤 미소까지 만들었을 때 그는 마지막 숨을 뱉었다.

“행, 행복하게…… 부탁…….”

드려요. 유언은 몇 글자를 남기고 끝맺음에 실패했다. 감지도 못한 채 반쯤 뜬 눈에 아쉬움과 슬픔, 그리고 이유 모를 기쁨이 비쳤다. 생기를 잃은 눈동자가 탁해졌다. 남은 이의 입에서 기이한 신음과 함께 망자의 이름이 새어 나왔다.

“샤를…….”

죄인이 피 묻은 손을 덜덜 떨며 들어 올렸다. 그새 식어 버린 이복동생의 얼굴에 툭 손바닥을 댄 이즈카엘이 감지 못한 눈을 간신히 감겨 줬다. 그리고 곧이어 넓은 황야에 깊은 죄책감이 가득한 목소리만이 울렸다.

“으아아아아아!”

팔에서 흐른 피가 눈밭에 뚝뚝 떨어졌다. 동시에 동생을 죽였다는 절망이 이즈카엘의 속을 파고들었다.

‘형님!’

언제든 그를 반갑게 맞아 주던 샤를의 목소리가 귀에 박혔다. 이즈카엘은 피가 잔뜩 묻은 제 손을 보다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어머니께는 죄송한 말이지만 전 형님이 좋아요. 누가 뭐라 해도 형님과 제가 형제인 건 사실이니까요.’

이복동생은 살아생전 그에게 싫은 소리 한번 한 적 없었다. 사생아인 그가 아비의 관심을 가져갔을 때도, 헤레이스와 좋지 못한 소문이 났을 때도, 심지어 그가 결국 헤레이스와 결혼하고 공작 위를 차지했을 때도.

‘피…….’

그런데, 이 손에 동생의 피를 묻혔다. 그것도 질투라는 저열한 감정을 빌미로……. 자신은 아무 죄 없는 핏줄을 죽음에 이르게 했다.

전장에서 수백의 목을 베면서도 느끼지 못했던 죄책감이 그를 집어삼켰다. 이즈카엘이 피로 범벅이 된 손에 제 얼굴을 묻었다. 바로 아래에 있는 동생의 시신을 볼 자신이 없었다. 하나 손가락 사이로 샤를의 모습은 확연히 박혔다.

“아…….”

이즈카엘은 무릎걸음으로 샤를에게서 물러났다. 그리고 이 자리에서 도망치기 위해 벌떡 일어났다.

“아아…….”

아무것도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제가 만들어 놓은 결과를 보고 싶지 않았다. 저를 짓누르는 이 죄악을 털어 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그 자리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가 절망에 빠져 있는 사이, 무기를 든 한 무리의 사내들이 이즈카엘의 주위를 감쌌다.

그 사내들은 이즈카엘이 이끄는 군대에게 패하고 도망치던 야만인 패잔병 무리였다. 다리를 다쳤는지 쩔뚝이는 앳된 얼굴의 사내가 이즈카엘을 노려보며 고함쳤다.

“이 살인마!”

“…….”

“네 목을 베 형제들의 넋을 기릴 테다. 이 살인마!”

가만있던 이즈카엘이 살인마라는 단어에 눈에 띄게 반응했다. 핏발 선 눈이 그 단어를 뱉은 사내에게 향했다.

그 시선을 받은 사내가 주춤거렸다. 그러자 무리 속 다른 야만인 사내 하나가 무리를 선동했다.

“겁먹지 마! 이 주변 어디에도 다른 놈들은 없었어!”

그 말에 무리 여기저기에서 살기 어린 고함이 터져 나오고 누군가 이즈카엘의 향해 화살을 쐈다. 날카롭게 바람을 가른 화살이 푹 하고 이즈카엘의 어깨에 박혔다.

“형제들의 원수를 갚아라!”

“제국의 개! 죽어!”

누가 보더라도 도망가야 할 상황이었다. 다쳤다고는 하나 수십이 되는, 그것도 검과 활 등으로 무장한 이를 혼자 상대하기는 어려웠다.

“차라리 여기서…….”

하지만 이즈카엘은 도망치지 않았다. 그가 무어라 중얼거리더니 샤를의 배에 박혀 있던 검에 손을 가져갔다. 피 묻은 검날이 번뜩이며 그의 눈 속에 숨어 있던 것이 기쁜 듯 입꼬리를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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