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목을 꺾는 악마여-68화 (68/108)

68화.

“프란시스 그 머저리는 애초에 헤레이스를 죽일 수 없어. 그 개자식은 헤레이스에게 손끝 하나 대지 않기로 나랑 약속했다고! 그런데 뭐? 그 앨! 그 귀중하고 예쁜 아이를 그 더러운 사생아 자식에게 보내?”

당장 황제를 모욕한 죄로 잡혀가도 할 말이 없었다. 샤를은 고함을 지르며 발작하는 어미를 간신히 붙잡아 침대에 눌렀다. 율리스가 거칠게 숨을 쉬며 팔다리를 허우적대다 아들의 멱살을 붙잡았다.

“샤를, 당장 헤레이스를 데리고 도망쳐라. 제국을 떠나! 이곳은 오지 않아도 좋으니 그 애를 데리고 외국으로 가! 그리고 영영 아나이스에 발을 딛지 마. 멀리 떠나서 너희 둘이 행복하게 살아. 응?”

처음 이곳으로 끌려왔을 때도 본 적 없는 어미의 모습이었다. 샤를은 눈물이 나오는 걸 꾹 참으며 말했다.

“어머니, 그럴 수는 없어요. 헤레이스는 이미…….”

울음기 가득한 목소리는 슬픔에 잠겨 있었다.

그도 원했다. 어미처럼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누구보다 그녀의 곁에 서길, 그리하여 영영 그녀를 보살피고 자신은 그녀의 보살핌을 받으며 사랑을 주고받다 같은 날 같은 시간 눈을 감길 누구보다 바랐다. 샤를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한 방울 툭 떨어졌다.

“……형과 결혼했잖아요. 형이 그녀를 행복하게 해 줄 거예요.”

“아아악! 아니야! 아니야! 아악!”

샤를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율리스가 소리를 내지르며 다시 몸부림을 쳤다. 그리고 때마침 자물쇠 열리는 소리가 나더니 기사가 들어왔다.

“시간이 다 되었습니다. 나오시죠.”

기사는 광인처럼 날뛰는 율리스를 보고도 침착한 얼굴을 유지했다. 그가 뒤로 살짝 눈짓하자 언제 왔는지 모를 여인 둘이 서 있었다. 그녀들은 샤를을 밀어내고 율리스 황녀의 팔다리를 잡아 눌렀다. 샤를이 기사의 재촉에 잠깐만 기다려 달라는 눈짓을 하고는 여인들에게 제압당한 어미의 곁에 가까이 붙었다.

“어머니, 당분간 못 볼 거예요. 하지만 어미니, 꼭 다시 올게요. 그러니까 제발…….”

“허억…… 다프네! 다프네! 아악!”

아들의 작별 인사에도 율리스는 천장을 보며 눈을 까뒤집은 채 부르짖기에 바빴다. 기사가 다시 한번 재촉하자 샤를이 슬픈 눈으로 어미를 보다 그 이마에 입맞춤했다.

“……몸 건강히 지내세요.”

* * *

‘몇 년 외국으로 나가 있거라. 일이 정리되고 율리스에 대한 말이 사그라들면 다시 부르마.’

‘예, 폐하.’

‘가여운 것.’

‘…….’

‘난 네 어미를 용서할 수 없다. 다른 이도 아니고 에드워드 그 사생아를 따라…… 쯧! 하지만 샤를 넌 가엾구나. 가여워.’

‘…….’

‘이즈카엘…… 공작의 요구만 아니었다면 너에 대한 짐을 좀 덜었을 텐데. 하나 어쩌겠느냐. 일이 이렇게 된 것을.’

‘…….’

‘준비되는 대로 빨리 떠나. 여행도 하고 돌아다니다 보면 너도 잊을 수 있을 테지.’

황제를 알현한 샤를은 아나이스를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세르펜스 성을 찾았다. 헤레이스. 이제는 형의 아내가 된 전 약혼녀를 한 번만 더 보기 위해.

‘차라리 잘됐어. 형과 함께 있었다면 미워하는 마음이 생겼을지 몰라.’

마침 이즈카엘은 토벌로 성을 비운 참이었다. 샤를은 평소보다 적은 기사와 병사를 쳐다보다가, 익숙하게 성내로 들어갔다가 나왔다. 그리고 며칠 망설이다 결국 헤레이스를 불러냈다.

“헤레이스.”

“미안해. 샤를. 정말 미안해. 네게는 정말…….”

하지만 사죄하는 헤레이스를 보자마자 샤를은 제 선택을 후회했다. 유리온실에서 본 헤레이스는 여전했다. 다정한 푸른 눈도, 항상 그의 시선을 앗아 갔던 붉은 입술도 여전히 아름다웠다. 그래서 샤를은 그녀가 밉고 또 자신이 싫어졌다.

‘내 생각보다 조금만 덜 예쁘지. 그랬으면 내가 실망이라도 했을 텐데. 넌 왜 여전히…….’

수도는 아직 한창 따뜻했건만 북부는 그의 마음처럼 추웠다. 샤를은 헤레이스를 빤히 보다 아려 오는 눈가에 일부러 고개를 돌렸다. 밖에는 눈이 소복소복 쌓이고 있었다. 그가 온실 유리 벽에 비친 헤레이스를 보며 간신히 입을 열었다.

“일이 이렇게 됐지만 너를 이해해. 나라도 그랬을 거야, 헤레이스.”

헤레이스의 눈이 순간 커졌다가 물기를 머금는 것이 보였다. 샤를은 헤레이스가 울먹이자 고개를 돌려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 조금 전보다 더 밝은 목소리로 위로하듯 말했다.

“형님은 좋은 사람이야. 형님은 나와 달리 널 지켜 줄 힘이 있어. 그러니 헤레이스, 내게 죄책감 가질 필요 없어.”

“샤를…….”

울지 마라 부러 목소리를 꾸몄건만 헤레이스는 뭐가 그리 서러운지 그의 이름을 부르며 눈물을 펑펑 쏟기 시작했다. 샤를이 헤레이스의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과 꾹 다문 입술을 보다가 천천히 팔을 올렸다. 그리고 작은 몸을 제 품에 안아 다독이기 시작했다.

“울지 마, 헤레이스. 네가 울면 내가 뭐가 돼. 여자나 울리는 한심한 놈이 되잖아.”

“난…… 나는, 샤를, 난…….”

샤를의 손이 쉴 새 없이 움직였다. 헤레이스의 검은 머리카락을 쓰다듬고 등을 토닥이는 손길이 다정했다.

“쉬이. 울지 마, 헤레이스. 웃는 얼굴로 봐 줘, 응?”

귓가에 울리는 목소리에 헤레이스가 간신히 입꼬리를 올렸다. 샤를이 헤레이스의 입술을 장난스레 툭 치고 엄지손가락을 올려 젖은 눈가를 닦아 줬다.

“역시 넌 웃는 게 더 어울려. 울면 눈이 처져서 인상이 별로야.”

샤를의 눈에 헤레이스는 어떤 얼굴을 해도 아름다울 터였다. 하지만 샤를은 헤레이스가 우는 걸 바라지 않았다. 그는 어릴 적부터 헤레이스가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너무 많이 봤다. 그리고 그녀가 울 때면 항상 마음이 저려 견디기 힘들었다.

“자, 이리 봐. 마저 닦아 줄게.”

“괜찮아, 샤를…….”

샤를이 어릴 적 습관대로 헤레이스의 얼굴을 부드러이 잡았다. 그러나 헤레이스는 고개를 저으며 뒤로 물러났다. 피하는 느낌이 아닌 미안해서, 도저히 얼굴을 볼 수 없다는 느낌이 강했다.

헤레이스가 고개를 젓자 샤를이 잠깐 주춤하다 곧바로 손을 거뒀다. 이 이상 했다가는 헤레이스에게 부담으로 다가갈 수 있다는 판단에서였다. 그러나 그가 손을 떼자마자 뒷걸음치던 헤레이스가 균형을 잃고 넘어갔다.

“아?”

“헤레이스!”

몸을 튕기듯 뛰쳐나간 샤를이 헤레이스의 허리를 붙잡고 훅 당겼다. 작게 한숨을 쉬는 그의 얼굴에는 안도감이 가득했다.

“헤레이스, 전부터 생각한 건데 네 발목은 너무 약해. 이래서 춤은 어떻게 췄는지 원…….”

“내 발목은 멀쩡해, 바닥이 고르지 않았을 뿐이지. 잊었어? 한때는 내가 샤를 너보다 달리기도 훨씬 잘했다고.”

두 사람의 머릿속에 어릴 적 함께였던 장면이 떠올랐다. 푸릇한 잔디 위에서 그들은 잔소리에도 아랑곳없이 맨발로 달리기 시합을 하고는 했다.

“그건 내가 일부러 져 준 거야. 난 신사고 넌 숙녀였으니까.”

“거짓말!”

생각만으로도 기분 좋은 추억에 헤레이스가 울었던 것도 잊은 채 소리 내 웃었다. 그리고 그 순간 샤를의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 그가 헤레이스의 얼굴에 담긴 미소를 물끄러미 보다 그녀를 훅 끌어당겼다. 놀란 헤레이스가 샤를을 올려다봤다.

“……미안. 헤레이스 너한테 너무 미안한데…… 말 안 하고는 못 배기겠어. 이게 마지막일 테니까.”

사내의 목소리에 울음기가 섞여 들었다. 헤레이스가 눈을 깜빡이다 샤를의 눈동자에 맺힌 눈물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샤를…….”

어느 정도 자라고 난 뒤 샤를은 그녀의 앞에서 좀처럼 울지 않았다. 그나마 기억에 있는 거라고는 그녀가 그의 청혼을 받아 줬을 때, 그때뿐이었다.

“헤레이스, 내가 널 많이 사랑해. 항상 좋아하고 있었어.”

청혼 때와 비슷한 고백이 이어졌다. 그러나 비슷한 말이라도 그때와는 감정이 완전히 달랐다. 기대와 행복에 젖어 울던 샤를은 체념과 슬픔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샤를 나는…….”

헤레이스가 입매를 일자로 굳힌 채 샤를에게서 한 걸음 물러났다. 그녀는 그의 마음을 받아 줄 수 없었다. 그녀에게는 이미 다른 이가 있었다.

“……미안해. 너한테 정말 미안한데 난 네 마음을 받을 수 없어. 나는…… 이즈카엘, 내 남편을 사랑해.”

헤레이스는 손을 달달 떨면서도 짐짓 단호하게 말했다. 그녀의 얼굴에도 괴로움이 가득했다. 하나 그녀는 울고 있는 샤를을 보며 침을 꿀꺽 삼키더니 잔인한 말을 담담히 이어 갔다.

“이제 와 하는 말이지만 샤를 너도 알고 있을 거야. 나 사실 오래 전부터…….”

“그만.”

참지 못한 샤를이 손을 들어 올렸다. 천천히 고개를 든 그가 젖은 낯으로 헤레이스의 눈동자를 보다 그녀에게 다가섰다. 그리고 찌푸려진 헤레이스의 미간을 손가락으로 꾹 눌러 펴 주며 말했다.

“무슨 말인지 알아. 그러니 그만해, 헤레이스.”

“미, 미안해. 샤를, 미안해…….”

입술을 물고 있던 헤레이스가 참지 못하고 와아앙 울음을 터뜨렸다. 일부러 차갑게 내뱉으려 했지만 샤를의 얼굴을 보니 미안하다는 말만 입에서 맴돌았다. 그녀가 다시 울자 샤를이 다시 그녀를 토닥였다. 그러나 아까와는 확연히 거리가 있는 행동이었다.

“……사실 나 곧 아나이스를 떠나. 오늘 온 건 작별 인사를 하기 위해서야.”

헤레이스의 울음이 어느 정도 잦아들자 샤를이 담담한 얼굴로 오늘 방문의 목적을 알렸다. 헤레이스는 그가 작별하러 왔음을 온실에 들어섰을 때부터 짐작했음에도 불구하고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어디로 가는데?”

“나도 아직 몰라. 일단 아나이스를 떠나기 전에 남부로 가서 여행 좀 하다가 배를 타려고. 맨 먼저 보이는 배를 탈 거야. 그럼 어디든 날 데려가 주겠지.”

“그래도 목적지는 정해야지. 혹시나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계획성 없는 말에 헤레이스가 걱정스러운 얼굴을 했다. 그러자 샤를이 허리를 굽혀 그녀와 높이를 맞추고 홀가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얼굴 마. 여행은 내 꿈 중 하나였잖아. 난 북부나 수도 말고는 어디 가 본 적도 없고……. 어디를 가든 돌아올 때 기념품을 잔뜩 사다 줄게. 어때? 기대되지?”

“응…….”

헤레이스가 마지못해 답했다. 샤를은 그런 그녀의 머리를 장난스레 흩트리다 작은 손이 배 위에 어색하게 올라가 있는 것을 보고 흠칫했다. 그가 설마 하는 표정으로 헤레이스의 얼굴과 배를 번갈아 봤다.

“헤레이스, 너 혹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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