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목을 꺾는 악마여-67화 (67/108)

67화.

8장. 죄악과 기억 (과거 외전)

가장 높은 곳에 있었던 자들은 대역죄를 짓고도 지하로 가지 않았다. 샤를은 높이 뻗어 있는 탑의 꼭대기를 보다 씁쓸한 얼굴을 했다.

“이리 오십시오.”

탑의 간수 역할을 하는 기사는 그가 죄인이 되었음에도 여전히 깍듯했다. 샤를은 고개를 꾸벅 숙이고 기사의 안내에 따라 탑 안으로 들어섰다.

1년 만에 들어온 탑 안은 여전했다. 구불구불한 나선형 계단은 끝없이 이어져 있었으며, 탑 내부의 잿빛 벽은 여기저기 금이 가 을씨년스러워 보였다.

“예전과 같습니다. 한 시간. 폐하께서 허락하신 시간입니다.”

탑의 끝에 위치한 방문 앞에서 기사가 말했다. 샤를이 알겠다며 고개를 살짝 끄덕이자 기사가 품에서 열쇠 꾸러미를 꺼내 문에 걸린 다섯 개의 무거운 자물쇠를 풀었다. 철컥이는 소리가 날 때마다 샤를이 고통스러운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철컹.

무거운 쇠문은 기사가 있는 힘껏 밀어야 열릴 정도였다. 샤를이 방 안으로 들어서자 다시 다섯 개의 자물쇠가 잠겼다. 차가운 문의 감촉을 뒤로한 채 샤를은 방 안을 살폈다.

내부에는 침대와 테이블 외에 가구가 없었다. 장식도 하나 없이 삭막한 방에 그나마 생기를 주는 것은 아주 작은 손바닥만 한 창이었다. 하지만 그조차 닫혀 있어 방 안의 공기는 바깥의 선선한 날씨에도 탁했다.

샤를이 막막한 눈으로 방을 한 번 둘러보다 침대 옆으로 가 무릎을 꿇었다.

“어머니 저 왔어요.”

침대에는 여인 하나가 모로 누워 있었다. 백발을 풀어 헤친 채 모로 누운 여인은 삐쩍 골아 뼈마디가 도드라졌다.

한때는 밖의 하늘만큼 맑았을 눈동자가 상한 생선 눈처럼 뿌연 빛을 발한 채 좌우로 굴렀다. 여인이 가까스로 몸을 일으켰다. 얼마나 움직이지 않았는지 그 평범한 동작에도 관절에서 우두둑 소리가 났다.

샤를은 어미를 도울까 하다 그만뒀다. 어미는 그 귀한 출신에 걸맞게 자신을 동정하는 것을 끔찍이 싫어했다.

“프란시스가 널 용케 보내 주는구나.”

“폐하께서는…….”

“그만. 그 개자식 이야기는 듣고 싶지 않구나.”

지고한 제국의 황제를 개자식이라 거침없이 말하는 목소리는 얇고 가늘었다. 샤를은 1년 만에 더 약해진 어미를 슬픈 눈으로 보다 입술을 물었다. 오늘 꼭 전해야 할 말이 있는데. 이런 모습을 보니 감히 꺼내기가 어려웠다.

“거기 끈을 다오.”

율리스 황녀. 아니, 이제는 죄인이 된 율리스가 탁자를 가리켰다. 샤를이 탁자 위 하얀 끈을 가져다주자 그녀가 부스스한 머리를 손으로 빗고 깔끔하게 모아 묶었다.

“알다시피 여기는 대접할 게 없단다. 이해하렴.”

“괜찮아요. 그보다 몸은 어떠세요?”

“보는 대로란다. 빠르게 늙고 빠르게 죽어 가고 있지. 이 탑의 망령들처럼 말이야.”

율리스가 제 손에 자글자글한 주름을 보며 말했다. 좁은 방에 갇혀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시간을 보내는 일은 끔찍한 고문이었다. 덕분에 햇빛을 보지도, 노동을 하지도 않았지만 그녀는 하루가 멀다 하고 노회해져 가고 있었다.

“……3년도 지나지 않았는데 이 꼴이니 5년이 가기 전에는 나도 미칠지 모르겠구나. 아니면 그 전에 죽든가.”

말은 그렇게 했으나 지난 100년 동안 이 탑에서 3년 가까이 제정신으로 버틴 이는 율리스가 유일했다. 보통 황족들은 이곳에 갇힌 뒤 1년이 채 되지 않아 자해하거나 미쳐 버렸으니.

이 공간이 그러했다. 그 어떤 오만한 황제도, 우아했던 황후도, 권좌를 차지할 뻔했던 황자도 오래 견디지 못했다.

그러나 율리스에게도 한계는 있었다. 샤를은 어미의 눈동자가 점차 흐려지며 쉴 새 없이 떨리는 것을 눈치챘다. 게다가 그에게 보이지 않으려 주먹을 쥐고 있었으나, 머리를 묶을 때 훔쳐본 어미의 손가락 끝은 피딱지가 가득했다.

“그런 말씀 마세요. 건강히 오래…….”

샤를이 말을 하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이곳에서 오래 건강히 살라는 말은 어찌 보면 저주였다. 율리스도 아들의 말이 우스운지 차갑게 코웃음을 쳤다.

1년 만에 만난 모자는 침묵했다. 한 시간밖에 되지 않는 짧은 시간이 너무나 아까웠지만 현실을 마주할 때면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누가 그들을 한때 세르펜스 공작가의 안주인과 후계자로 볼까. 죄인으로 떨어져 목숨만 부지하는 삶은 이 방처럼 비참했다.

“어머니.”

샤를이 한참 망설이다 어미의 손을 잡았다. 율리스는 아들의 눈에 동정이 어린 것을 보고 인상을 찌푸렸지만 아들의 손을 뿌리치지는 않았다. 샤를이 그런 어미를 향해 쓸쓸한 미소를 보이다 율리스의 손을 꼭 잡고 준비했던 말을 꺼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 지난해에요. 어머니께 찾아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요.”

아들의 말에 율리스의 볼이 살짝 씰룩였다. 그러나 그녀는 곧 오만하게 턱을 치켜든 채 입을 열었다.

“잘됐구나. 그 꼴로 괴로워하다 죽었을 테지? 마지막으로 봤을 때는 숨조차 제대로 쉬고 있지 못했으니까.”

율리스가 남편을 본 건 반역죄로 끌려가기 직전이었다. 그녀는 시체처럼 누워 악취를 풍기며 숨만 허덕이던 남편, 세르펜스 공작의 꼴을 한참 구경했다.

샤를은 어미의 반응에 입술을 질끈 물었다. 이제는 확신할 수 있었다. 아비의 죽음에는 어미가 있었다. 그가 물기 어린 목소리로 율리스에게 물었다.

“……늦었지만 물어요. 아버지께 독을 탄 이가 진정…… 어머니세요?”

“그래. 내가 한 짓이 맞단다.”

율리스는 일말의 부정도 않았다. 그녀가 아들의 손에서 제 손을 뺀 채 눈물을 흘리는 아들을 내려다봤다.

“아버지가 어머니께 상처 준 거 알아요. 견디기 힘든 상처였죠. 하지만 어머니…….”

샤를은 어미가 아비의 정부와 이복형의 존재 때문에 얼마나 괴로워했는지 잘 알았다. 나기를 황족으로, 그것도 황제가 가장 아끼는 동복동생으로 살아온 고귀한 어미였다. 그런데 남편이라는 작자가 정부와 사생아를 들였으니, 대단한 자존심에 얼마나 상처를 입었을까. 게다가 샤를이 알기로 어미는 처녀 적 아비를 열렬히 짝사랑했다.

“……아버지는 제 아버지세요. 그런데 어째서…… 어째서 그러셨어요. 아버지께서는 고통 속에서 가셨다 들었어요.”

샤를은 아비를 죽인 이가 어미라는 사실을 누구에게도 이야기할 생각은 없었다. 부모 중 그에게 정을 준 이는 어미 하나였다. 아비는 그를 후계자로 보기는 했으나 그 외에는 일절 관심을 두지 않았다.

하지만 아비도 그에게 피와 살을 준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때문에 비밀을 묻되 어미에게 물어야 했다. 왜 그리 잔인하게 남편을 죽여야 했는지.

“그가 네 아비라 거기까지만 한 거야. 아니었다면 진즉 독을 먹이고 찢어 버렸을 거란다. 내 아들인 네 아비라 내가 자비를 베푼 거야.”

“어머니!”

율리스는 아들의 붉은 머리를 보며 죽은 남편을 그렸다.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한 채 그리 갔다니. 진즉 알려 주지. 그랬다면 이 기쁨을 더 일찍 누렸을 텐데.

어미의 눈에 비친 감정에 샤를이 딱딱하게 굳었다. 하나 율리스는 그런 아들에게 다른 것을 물었다.

“네 아비 이야기는 그만두렴. 그보다 그 더러운 사생아 자식은 어찌 지내니? 네 자리를 빼앗고 떵떵거리며 그 성에서 살고 있니?”

비꼬는 목소리에는 분이 가득했다. 남편의 사생아가 공작 위는 물론이고, 그 성을 차지했다 생각하니 속에서 열불이 났다. 치솟는 광기를 간신히 누른 채 율리스가 아들에게 답하라 눈짓으로 종용했다.

“……네. 형이 공작이니까요. 성에 있어요.”

“공작은 무슨. 그건 영영 더러운 사생아야. 자리를 차지했다고 고귀해지는 건 아니지. 더러운 것!”

율리스의 눈에 핏발이 서며 살벌한 빛을 띠었다. 그녀는 죽는 순간까지 이즈카엘을 공작으로 인정하지 않을 터였다. 그녀에게 이즈카엘은 더러운 사생아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보다 헤레이스 그 아이는? 그 아이는 어찌 지내? 올해도 너랑 함께 있니? 프란시스가 걜 부르거나 하지는 않았지?”

이까지 갈며 이즈카엘에 대해 말하던 율리스가 돌연 얼굴을 바꿨다. 방에 들어서고 처음으로 어미의 얼굴에 진정한 미소가 비치자 샤를은 어미의 시선을 피했다. 그가 입술을 여러 번 달싹이다 한참 만에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어머니, 지금까지 말씀 못 드린 게 있어요.”

내년에 다시 올 수 있다면 올해도 이 사실을 숨겼을 것이다. 그러나 샤를은 1년 후 이곳에 올 수 없었다.

반역죄로 잡힌 어미와 그의 자식이 만나고 있다는 것이 알려지며, 황궁은 한바탕 소란이 일었다.

황제는 입을 다물어 본인의 뜻임을 은연중 내비쳤지만 신료들은 완고했다. 반역죄인들의 만남을 눈감아 주었다가는 새로운 반역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말까지 나오자 황제는 외종질에게 어미를 찾아오는 건 당분간 그만하라 말했다.

“말 못 한 거라니……. 설마 헤레이스에게 무슨 일이라도 있니?”

“헤레이스는 저와 함께 지내지 않았어요. 후작가가 몰락한 뒤에 그녀는…….”

“뭐? 프란시스가 헤레이스를 용서하지 않았어? 샤를! 제대로 말하렴. 너와 함께가 아니라면 헤레이스 그 아이는 지금 어디 있어? 설마 그 예쁜 아이를 노예로…….”

샤를의 말이 채 이어지기도 전 율리스가 고함을 질렀다. 창백한 얼굴로 샤를의 어깨를 잡은 그녀가 아들을 흔들었다. 샤를이 흥분하는 어미를 맞붙잡은 채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노예라니요. 헤레이스는 잘 지내고 있어요. 다만 헤레이스는…… 그녀는 형님과 결혼했어요. 어머니가 여기 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요. 늦게 말씀드려 죄송해요.”

가끔은 자식인 자신보다 헤레이스를 더 아끼던 제 어미였다. 샤를은 어미가 저와 헤레이스의 결합을 얼마나 원했는지 어릴 적부터 알았다.

‘샤를, 넌 헤레이스와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아야 해.’

어미는 시도 때도 없이 그에게 헤레이스와 결혼을 강요했다. 하도 많이 들어 질릴 수도 있는 말이었지만 샤를 또한 헤레이스가 항시 좋았기에 매번 고개를 끄덕이고는 했다.

“너, 너…… 너 지금 뭐라고…… 그게 무슨…….”

“…….”

“그게 무슨 말이야! 그 더러운 사생아 자식이랑 헤레이스가 왜 결혼을 해! 왜! 헤레이스는 네 짝이잖니. 내 아들인 네 짝! 샤를, 네 짝이잖아!”

“…….”

“오, 샤를…… 내 아들아, 그런 정신 나간 농담은 마렴. 농담이지? 응? 그렇다고 말해. 그렇다고 말하라고!”

“……사실이에요. 헤레이스는 형과 결혼하고 공작 부인이 됐어요. 하지만 어머니,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어요. 후작가가 그리되고 헤레이스도 지하로 끌려갔어요. 형은 그녀를 구하려고…….”

“아니야!”

율리스가 세차게 고개를 젓자 깔끔하게 묶여 있던 머리카락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녀가 마른 손가락을 들어 아들에게 삿대질했다. 흡사 광인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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