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화.
탁 하는 소리와 함께 그것이 의외로 쉽게 떨어져 나갔다. 에르젠은 침대에서 허겁지겁 내려와 다람쥐처럼 잽싸게 문으로 향했다. 아이가 달려가는 소리가 바닥을 울리고 곧이어 문 열리는 소리가 났다.
“……원망 마렴. 어차피 지금 그 목숨 내가 한 번 살려 준 거잖아.”
그것은 에르젠을 쫓지 않았다. 그저 도망가는 아이의 뒷모습을 빤히 보며 히죽거릴 뿐.
콰쾅.
열린 창문으로 비가 들이치기 시작하더니 천둥이 가까운 거리에서 큰 소리로 쳤다. 하얀 번개가 창밖에 내리 꽂히고 어둠을 잠깐 앗아 가더니 그것이 모습을 감췄다.
툭.
적막만 남은 방엔 책꽂이가 비바람에 흔들리고 책을 떨궜다. 펼쳐진 책 속에서 괴물이 꿈틀거리고 글자가 저들끼리 춤추더니 괴물을 무찌르던 소년이 사라졌다.
공허한 공간. 새로이 글자가 새겨졌다.
〈괴물이 잭을 한입에 꿀꺽 삼켜 버렸어요. 〉
* * *
거친 비바람이 창문을 세차게 쳤다. 간간이 들려오는 천둥소리가 귀를 때리고 번개가 눈을 아리게 했다.
이즈카엘은 시가를 문 채 눈앞의 시계를 노려보며 홀로 집무실에 앉아 있었다. 시계가 째깍째깍 규칙적인 소리를 내며 돌아갔다. 자정을 지나 오른쪽으로 꺾이기 시작한 분침에 이즈카엘이 연기를 뿜고 시가를 재떨이에 비벼 껐다.
“……헤레이스.”
아내는 몇 시간 동안 그에게 쉬지 못한 채 시달렸으니 지금쯤 수마에 빠져 있을 터였다. 일부러 그리했음에도 너무나 지쳐 정신을 잃었던 아내가 떠오르자 저절로 미간이 구겨졌다.
이즈카엘이 피가 날 정도로 입술을 물다 고개를 숙였다. 천둥 때문에 파르르 떨리는 책상이 그의 심정을 대변했다.
‘이대로는 안 된다고 생각한 지 얼마나 지났다고.’
제 미친 짓을 자책하던 이즈카엘은 책상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문뜩 누군가가 저를 보는 듯한 기시감에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마주친 인영에 저도 모르게 책상에서 벌떡 일어났다.
“너…….”
의자 끌리는 소리와 함께 호박색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이즈카엘은 그답지 않게 몸을 딱딱하게 굳히다 어느 때보다 서늘한 표정으로 제 앞에 선 이를 노려봤다.
이즈카엘의 앞에 나타난 이는 샤를이었다. 아비를 닮은 붉은 머리에, 율리스 황녀의 밝은 푸른 눈. 스쳐보면 여인으로 착각할 만큼 수려한 얼굴의 이복동생이 바로 코앞에 있었다.
“……제정신이 아니니 별걸 다 보는군.”
샤를이 아무 말 없자 이즈카엘이 자조하듯 내뱉었다. 이성이 말하고 있었다. 눈앞에 서 있는 남동생은 환상일 뿐이라고. 그림자조차 없이 불투명한 형체가 그를 증명했다.
“……그렇게 봐도 소용없어. 전에도 말했지만 난 네게 미안한 마음이 없다.”
허상임을 알았음에도 이즈카엘은 입을 열었다. 아내만큼이나 찾았던 이복동생, 찾게 된다면 그에게 꼭 할 말이 있었다.
“헤레이스는 이제 내 아내지 네 약혼자가 아니야. 그러니 어디에…… 윽.”
콰쾅.
순간 번개가 치며 머리가 쪼개질 듯 아파 왔다. 이즈카엘은 이마를 부여잡은 채 비틀거렸다. 샤를은 이복형의 고통에도 여전히 같은 얼굴이었다.
“……어디에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다시는 헤레이스 앞에 나타나지 마. 또 나타난다면…… 으윽!”
이즈카엘이 책상 모서리를 잡은 채 숨을 헐떡이며 겨우 말을 이었다. 하나 번쩍거리는 시야를 더는 참을 수 없었다. 그가 무릎을 구부리며 주저앉자 형을 내려다보던 샤를이 팔을 들어 손가락으로 어느 방향을 가리켰다.
“흐윽. 무슨…….”
이즈카엘은 머리를 부여잡으면서도 동생이 손가락으로 가리킨 방향을 봤다. 정물화 하나만이 덩그러니 있는 벽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얼핏 벽 너머가 생각났다. 저 벽 너머에 있는 방은 전에 헤레이스가 쓰던 방이었으며, 현재는 에르젠이 머무는 곳이었다.
콰쾅!
때마침 내리치는 번개와 함께 기이한 불안감이 이즈카엘을 삼켰다. 이즈카엘은 끔찍한 두통도 잊은 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문이 거칠게 열리는 소리가 났고, 샤를은 마지막으로 이복형의 등을 보다 어둠 속에 녹아들 듯 사라졌다.
* * *
“에르젠!”
밖에는 이제 앞이 보이지 않을 만치 많은 비가 내리고 있었다. 창백한 얼굴로 죽은 듯이 누워 있던 헤레이스는 천둥소리에 맞춰 아들의 이름을 부르며 악몽에서 깼다.
“에르젠. 에르젠…….”
얇은 침의 하나만을 입은 그녀의 가슴께가 위아래로 빠르게 허덕였다. 아들의 이름을 외며 제 손 여기저기를 살피던 헤레이스는 손이 깨끗한 것을 확인하고 한숨을 쉬었다.
‘……끔찍한 악몽이야.’
헤레이스는 전에 꿨던 꿈과 비슷한 악몽 속에 있었다. 사방이 온통 피 웅덩이인 그곳에 잠긴 그녀를 이번에는 아들인 에르젠이 슬픈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들을 안아 주려 했지만 에르젠은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더니 환한 빛무리로 사라졌다.
조금 진정하자 몸이 으슬으슬 추워졌다. 헤레이스는 식은땀에 젖어 이마와 목가에 붙은 머리카락을 떼어 내며 유리온실 쪽을 쳐다보았다. 세상은 쏟아지는 빗소리에 잠겨 오히려 고요했다.
콰르릉.
길게 끄는 천둥이 울리고 벼락이 유리온실 위로 쳤다. 헤레이스는 번쩍이는 빛 사이 누군가를 보고 눈을 크게 떴다.
“에르젠!”
잠깐 사라졌다 나타난 아들은 엉엉 울고 있었다. 다시금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고, 헤레이스는 침대에서 내려왔다.
‘엄마! 엄마!’
귓가에 에르젠의 울음소리가 계속해서 맺었다. 더는 참지 못한 헤레이스가 방문을 열어젖혔다.
습기 찬 공기와 함께 컴컴한 어둠이 그녀의 앞에 펼쳐졌다.
* * *
“괴물…… 흐윽. 형이 아니라 괴물이었어.”
에르젠은 계단에 앉아 훌쩍이고 있었다. 본래라면 조용한 밤인지라 아이의 울음소리가 성내에 다 울렸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연신 내리치는 번개와 천둥소리, 그리고 비바람은 세상 모든 소리를 저들 속에 감춰 버렸다.
“엄마…….”
에르젠은 헤레이스를 부르며 번개가 칠 때마다 두려움에 몸을 움찔거렸다. 앉아 있는 계단이 천둥이 우르릉거릴 때마다 흔들리는 느낌이었다.
‘……무서워.’
처음 형의 모습을 한 괴물을 봤을 때는 엄마를 찾아 밖으로 나가려 했다. 하지만 비바람과 천둥 번개는 에르젠을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가만히 앉아만 있자 주변 온도가 점차 낮아졌다. 에르젠은 몸을 말며 젖은 얼굴을 작은 손바닥으로 연신 닦았다. 그러다가 우연히 난간 사이로 바로 아래에 있는 계단을 봤다. 그곳에는 검은 머리의 여인이 서 있었다.
“엄마?”
놀란 에르젠이 고개를 들어 유심히 살피자 검은 머리의 여인이 고개를 살짝 들어 위를 보려다 말았다. 하지만 찰나의 순간, 에르젠은 자신의 것과 똑같은 푸른 눈동자를 봤다.
“엄마!”
귀를 울리는 천둥소리에도 아이는 망설임 없이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에르젠이 따라오자 긴 머리를 늘어뜨린 여인은 뒤를 돌아볼 듯하더니 아래로, 또 아래로 향했다.
“엄마! 같이 가!”
에르젠은 어미를 따라잡기 위해 빠르게 뛰었다. 그러나 어찌 된 영문인지 어미를 붙잡기는 쉽지 않았다.
탁탁탁, 뛰는 소리와 함께 에르젠이 계단을 몇 번이고 꺾어 내려갔다. 아이는 1층과 2층 사이 층계참에 이르러서야 어미와 가까워졌다.
층계참 아래로 1층 홀이 펼쳐졌다. 본래라면 아무리 늦은 시간이라고 한들 사용인이 몇 명은 있어야 했지만 홀에는 적막만이 흘렀다.
“하아…… 엄, 엄마.”
에르젠이 헐떡이며 겨우 따라잡은 어미의 드레스 자락을 쥐었다. 손에 잡히는 감촉과 살랑이는 검은 머리카락에 천둥 번개에 대한 두려움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어?’
하지만 안도감도 잠시, 에르젠은 어미에게서 기이한 기시감을 느꼈다.
어미의 머리카락은 본디 부드럽게 곡선을 그렸지만 이리 구불거리지는 않았다. 게다가 눈앞 어미에게서는 익숙한 포근함 대신 아주 차가운, 온몸을 쭈뼛거리게 하는 냉기만 흘렀다.
우르릉.
바닥을 긁는 듯한 천둥소리가 낮게 지나가고 여인의 머리카락은 끝부터 색이 빠졌다. 밤하늘 같았던 검은 머리가 점차 연해져 차가운 황금색으로 변하자, 에르젠이 여인의 옷자락을 툭 놓고 뒷걸음쳤다. 그리고 순간…….
콰콰쾅!
어느 때보다 크게 천둥이 친다 싶더니, 번쩍이는 불꽃 아래에서 금발의 여인이 히죽거리며 에르젠에게 인사했다.
“잘 가렴.”
작은 파랑새는 그렇게 추락했다.
* * *
짧은 시간 천둥과 번개가 멀어지고 창문을 거칠게 때리던 바람도 사라졌다. 남은 것이라고는 세상을 잠기게 할 듯 끝없이 내리는 비뿐이었다.
이즈카엘은 층계참에 서서 1층 홀에서 펼쳐진 광경을 보다가 미친 듯이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그가 스쳐 지나가자 계단 끝에 아슬아슬하게 서 있던 샬럿이 깔깔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당신 같은 사람도 그런 얼굴을 해?”
귀가 찢길 듯 듣기 싫은 목소리였지만 이즈카엘에게는 들리지 않았다. 그는 그저 계단 아래 쓰러져 있는 아이를 들어 올릴 뿐이었다.
품 안의 작은 몸은 아직 따뜻했다. 꼭 감긴 눈과 파리한 안색을 제외하면 자고 있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였다. 하나 아이의 심장은 멎어 버렸으며 숨소리는 사라져 버렸다.
이즈카엘이 미동도 없는 아이를 흔들다가 큰 소리로 의원을 찾았다.
“누구 없나! 당장 의원을 불러! 의원을 데려와!”
빗소리에도 이즈카엘의 고함은 감춰지지 않았다. 여기저기서 사용인들과 기사들이 튀어나왔다. 관객이 많아지자 샬럿의 웃음소리는 점차 높아졌다. 그러나 기사들이 검을 빼 드는 순간 그녀는 울컥 검은 피를 토하며 앞으로 꼬꾸라졌다.
“아악!”
하녀 몇이 비명을 질렀다. 샬럿이 토해 낸 검은 피가 웅덩이를 만들고 계단 아래로 흐르기 시작했다. 샬럿은 죽어 가면서도 끝까지 웃어 젖혔다. 그녀가 마지막으로 부들거리며 팔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금발 사이로 섬뜩한 웃음을 보이며 문을 가리켰다.
이즈카엘을 비롯한 사람들의 시선이 정문으로 향했다. 어느새 활짝 열린 문에는 어쩔 줄 몰라 하는 기사 둘과, 비에 푹 젖은 여인이 있었다. 여인의 검은 머리카락 끝에서 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에르젠!”
침의 차림에 맨발로 홀에 들어선 헤레이스가 이즈카엘의 품에 안긴 아들을 보다 찢어질 듯한 높은 목소리로 아들을 부르며 바닥을 박찼다. 창백한 낯이 에르젠 못지않게 파리했다.
물방울이 사방으로 튀고 아내의 파란 눈동자가 박혀 들었다. 그리고 이즈카엘의 귀에 그것이 속삭였다.
「……메데아의 아이야, 내가 가져간 것을 돌려주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