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숨마저 내쉬기 어려웠다. 샬럿은 허덕이며 겨우 몇 걸음을 내딛었으나, 결국 참지 못하고 앞으로 꼬꾸라졌다.
“허윽…….”
털썩. 제법 큰 소리와 함께 마른 땅에 먼지가 일었다. 하지만 쓰러진 이는 고통을 비명으로 내지를 수조차 없었다.
“으…….”
목 전체가 바짝 말랐다. 입 안은 이미 감각이 없었으며, 목구멍은 모래와 사포로 문지르는 듯 따갑다 못해 아렸다.
한때는 결 좋게 관리됐을 샬럿의 금발이 지나가는 바람에 아무렇게나 날렸다. 먼지가 뒤섞인 메마른 금발은 예전의 색을 잃은 지 오래였다.
‘이대로 죽는 거야?’
흐리멍덩한 녹안에 절망이 드리웠다. 샬럿은 온몸에 힘을 빼고 자신을 버리고 간 이들을 떠올렸다.
마차와 황금만을 두고 사라진 기사들. 그들은 이 황량한 들판이 얼마나 위험한지 알고 있었으리라. 그러나 그럼에도 그들은 그녀를 홀로 내버려 뒀다.
‘……애초에 날 죽이려 한 거야.’
죽일 작정으로 자신을 버렸다 생각하자 분노가 차올랐고, 약간의 힘이 났다. 그냥 목을 쳐 죽이는 것도 아니요, 이따위로……. 눈을 홉뜬 샬럿이 이틀 전을 떠올리며 이를 갈았다.
‘망할 새끼들! 미겔이 나중에 공작이 되면 두고 봐! 너희 목을 잘라 새들에게 쪼아 먹히게 둘 거야!’
에드가와 그 아래 기사들이 사라지고서 처음 홀로 남겨졌을 때, 샬럿은 황금 궤짝을 감싸 안은 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무거운 황금은 길고 큰 덩어리로 이루어져 있어 한 덩어리조차 제대로 들기 힘들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황금을 버리고 갈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샬럿은 날이 어두워지고 목이 말라 초조해짐에도 그 자리에서 벗어나지 않은 채 저를 이 상황에 몰아넣었다고 생각하는 이들을 계속해서 저주했다.
그리고 그런 행동은 그러잖아도 찾아오고 있었던 샬럿의 불행을 앞당겼다.
‘그 여자도, 그 여자 애새끼도 진즉 죽여 없애 버렸어야 했는데! 내 걸 차지한 주제에! 한번 나갔으면 영영 돌아오지 말았어야지.’
샬럿이 버려진 황야는 아나이스 제국 북부와 야만인들의 땅 경계로, 제국이 야만인들을 토벌할 때면 잔혹한 전장으로 변하는 곳이었다. 하지만 토벌이 없을 때의 황야는 제국에서 추방당한 범법자들과 야만인, 혹은 용병들이 어슬렁거리는 무법지가 되곤 했다.
‘난 후계자를 낳은 여자인데! 날 그따위 눈들로 봐? 날 이딴 곳에 버려둬? 미겔이 공작만 되어 봐, 내가 당장…… 당, 당신들 누구야!’
샬럿의 욕지거리와 고함은 황야에 있는 이들의 주의를 가져왔다. 그들은 멀리서 화려한 마차를 보며 경계만 하다 한참 시간이 지난 후 서서히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차와 샬럿을 지키는 이가 없다고 판단한 순간 도적 떼로 돌변했다.
마차를 노리던 도적 떼가 황금을 발견하고 눈을 휘둥그레 뜨는 것은 당연한 순서였다. 그들은 우연히 얻게 된 황금에 샬럿을 겁박하려던 것도 잊고 달려들었다.
‘안 돼! 그건 내 거야! 내 거라고! 이 지저분한 머저리들아, 손 떼! 손 떼란 말이야아아!’
처음 샬럿은 제 황금을 빼앗긴다는 생각에 겁도 없이 그들을 막아섰다. 그러나 사내들은 샬럿은 쉽사리 제압했으며, 황금에 대한 흥분을 어느 정도 가라앉힌 후에는 희번덕거리며 그녀를 훑어봤다.
‘다, 다가오지 마! 오지 마! 이 천것들이!’
먼지투성이긴 했으나 샬럿은 아름다웠고, 그들은 여인을 납치해 팔아넘기는 일도 서슴지 않고 벌이는, 황야에서도 가장 질 낮은 이들이었다. 샬럿은 그들에게 잡혀 손발이 묶인 후에야 공포를 되찾고 황금에 대한 욕망을 어느 정도 떨칠 수 있었다.
‘난…… 공, 공작 부인이야. 이딴 곳에서 이, 이렇게 죽을 수는…….’
샬럿이 그들에게서 도망칠 수 있던 것은 순전히 운이었다. 샬럿을 착취하기 직전, 도적 떼들은 황금을 나눠 갖는 일로 서로 싸우기 시작했다. 여기저기서 칼이 부딪치고 주먹이 오가며 피가 낭자할 때 샬럿은 가까스로 줄을 풀고 그 자리를 벗어났다.
그러나 그것을 과연 운이 좋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도적 떼에게 벗어난 샬럿에게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커다란 상자 안 가득한 황금도, 화려한 마차도, 심지어 그녀는 신발마저도 없었다.
그래도 무엇보다 목숨이 중요했기에 샬럿은 뛰고 또 걸었다. 당장에라도 사내들이 저를 잡으러 올까 덜컥 겁이 났다. 하지만 무언가를 먹지도, 마시지도 못한 채 시작한 도망은 그녀의 체력을 급격하게 갉아먹었다.
샬럿은 황야에 버려진 지 이틀 만에 쓰러졌다. 그리고 이제 죽어 가고 있었다.
“사, 살려…….”
엉킨 머리카락 아래 갈퀴 같은 손이 느릿하게 나와 바로 앞에 있는 풀을 쥐어뜯었다. 황량하고 건조한 땅에서 자란 풀은 바짝 말라 쉽사리 뽑혔건만 샬럿의 손은 그조차 할 수 없었다.
눈앞이 가물거리며 마지막이라는 듯 눈물 한 방울이 뺨을 적셨다. 샬럿은 제 가여운 인생을 떠올리며 바짝 마른 입술을 물었다.
‘난 안 가! 가기 싫어요, 아버지!’
태어나서부터 착취만 당한 삶이었다. 어미는 저를 버렸고 아비는 겨우 여덟이던 저를 팔았다. 세상 누구도 그녀를 보듬어 주기는커녕 그녀에게서 무언가 가져가려고만 들었다.
‘그 반지 셀리 거 아니야?’
‘이제 내 거야.’
‘야! 셀리 머리가 깨졌다던데 설마 너…….’
그리하여 샬럿은 제가 한 모든 행동과 생각이 정당하다고 보았다. 남들도 빼앗으니 그녀도 빼앗아야 했다. 손에 들어온 것은 쥐고 놓으면 안 됐고, 남의 손에 들린 것은 빼앗아 쟁취한 뒤 제 것처럼 누려야 했다. 그게 그녀가 아는 정의요, 세상을 사는 방법이었다.
‘난 잘못한 게 없어. 그 여자가! 그 여자 아들이 내 것을 빼앗아 간 거야. 내가 가져야 마땅한 것들인데 그자가 빼앗아 준 거야.’
샬럿은 거칠게 숨을 쉬며 헤레이스와 에르젠, 그리고 이즈카엘을 향해 속으로 온갖 저주를 퍼부었다. 자신은 모든 걸 잃고 이 꼴로 죽어 가고 있는데, 그 여자와 그 여자의 아들은 저와 제 아들의 자리를 차지한 채 웃고 있을 걸 생각하니 미칠 것 같았다.
‘억울해. 억울해 미칠 것 같아. 억울해. 억울해. 억울해. 난 이 꼴이 됐는데 그것들은 지금쯤…….’
억울함이 극에 치달았다. 샬럿은 움직이지 않는 몸 대신 눈을 크게 떴다. 핏발 선 눈이 한계까지 커졌다. 이대로 숨이 다한다면 지금 표정 그대로 굳어 황야에 남겨지리라.
하지만 죽음 대신 다른 손님이 샬럿을 찾아왔다. 기이한 황금색 눈을 가진 벌레는 샬럿의 바로 앞에 내려앉아 그녀와 눈을 마주했다.
「……어머니, 가여운 어머니.」
익숙한 목소리에 샬럿의 눈동자가 떨린다 싶더니, 무언가 들은 듯 그녀의 입술이 길게 올라갔다. 샬럿이 메마른 입을 열어 그것에게 답했다.
“조, 좋아. 이 망할 괴물아.”
그녀의 쇠 긁는 목소리를 벌레는 알아듣기라도 한 듯 날개를 몇 차례 퍼덕였다. 그리고 벌레가 황야를 뒤로한 채 날아갔을 때…….
샬럿도 사라지고 없었다.
* * *
에르젠은 어두컴컴한 하늘에 잔뜩 낀 구름을 보다가 시무룩한 얼굴로 침대에 올라갔다. 그러자 옆에 있던 유모가 호들갑을 떨며 아이에게 이불을 덮어 줬다.
“곧 여름이 온다지만 아직 밤은 쌀쌀하지요. 이불 잘 덮고 주무셔야 한답니다.”
아이는 대강 고개만 끄덕이고 고개를 돌려 버렸다. 아직 어렸으나 바로 옆 유모라는 중년 여인은 물론이고, 성내 어른들의 태도가 어느 순간 바뀐 것이 자신을 아껴서가 아닌 것쯤은 어렴풋이 알았다.
“이, 이만 주무세요. 무슨 일이 있으면 꼭 부르시고요.”
에르젠이 저를 별로 달가워하지 않음을 눈치챈 유모가 약간 실망한 얼굴로 주춤거리다 물러났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나자 에르젠은 이불을 꼭 말아 안았다.
“엄마…….”
헤레이스는 끝내 오지 않았다. 오후부터 늦은 밤까지 어미를 기다렸던 에르젠은 실망감에 훌쩍이기 시작했다.
당분간 또 못 보는 걸까? 엄마는 또 그 구멍 너머 이상한 집에 있는 걸까? 아니면 내가 많이 울어서 가 버린 걸까? 별별 생각이 아이의 작은 머릿속을 휘젓고 다녔다.
‘많이 울면 와 주지 않을까? 엄마는 항상 내가 울면 언젠가는 와 줬잖아.’
에르젠은 지금이라도 울음을 터뜨릴까 하다가 고개를 작게 저었다.
‘안 돼. 그럼 엄마가 우는걸.’
아이는 알고 있었다. 제가 울면 어미도 운다는 것을. 어미가 보고 싶었으나 슬퍼하는 어미를 바라지는 않았다. 에르젠이 몸을 동그랗게 말며 찔끔 새어 나오는 눈물을 재빨리 닦았다.
억지로 잠들기 위해 몸을 바로 하자 멀리서 우르릉하는 무섭고 둔탁한 소리가 났다. 맹수의 울림과도 비슷한 소리에 에르젠이 목을 움츠리자 순간 빛이 번쩍였다.
“어, 엄마…….”
몇 번의 경험 덕에 아이는 천둥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곧 있으면 멀리서 들리는 저 소리는 가까워질 것이고 번개는 더 자주 번쩍거릴 터였다.
하지만 안다고 해서 두렵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에르젠은 몇 번 더 헤레이스를 부르다가 어미가 오지 않을 것을 깨닫고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눈앞을 가리기가 무섭게 천둥소리가 한발 가까이서 들렸다. 에르젠은 귀를 막고 눈을 꼭 감았다.
한참 어둠에 적응해 갈 때였다. 창문이 덜컹거리는가 싶더니 바람이 발끝에 살랑였다. 그리고 동시에 귓가로 익숙한 목소리가 스르르 기어들었다.
“에르젠.”
“형? 미겔 형이야?”
낯익은 목소리에 에르젠이 반색하며 이불을 내렸다. 반짝 떠진 아이의 눈동자에는 반가움이 가득했다.
“안녕?”
예상대로 침대 바로 옆에 미겔이 앉아 있었다. 하지만 에르젠의 표정은 미겔을 보자마자 창백히 질렸다.
푸른 눈이 두려움에 잘게 떨렸다. 에르젠이 자신을 보고 온몸이 굳어 버렸는데도 미겔은 태연했다.
번쩍. 황금색 눈이 번개에 더욱 기이한 색을 발했다. 그것이 긴 손톱으로 제 턱을 받치며 날카로운 이빨을 쩍 드러내 보였다. 붉고 긴 혀가 날름거리며 에르젠의 시야를 어지럽히더니 상냥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전에 하다 만 부탁 하러 왔어, 에르젠.”
“아…… 아…….”
그것이 눈을 초승달처럼 휘며 세로로 찢어진 네 개의 동공을 일그러뜨렸다. 에르젠이 몸을 덜덜 떨며 손가락으로 그것을 가리키자 그것이 비늘 돋은 징그러운 손으로 에르젠의 팔목을 확 낚아챘다.
“그때 말한 대로 한 가지만 양보해 줄래? 응?”
감미로웠으나 재촉하는 낌새도 있었다. 에르젠의 팔목을 죄어 오는 힘이 점점 강해지고, 아이의 손이 하얗게 질렸다. 에르젠은 공포에 질려 아무 말도 못 한 채 덜덜 떨다 비명을 지르듯 고함쳤다.
“싫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