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헬렌이 들고 있는 쟁반이 좌우로 사정없이 떨렸다. 그 덕에 쟁반 위 유리잔과 쿠키를 담은 접시가 달그락 소리를 냈다. 그러나 불안정하게 흔들리는 쟁반에도 헬렌은 아무런 조치를 할 수 없었다.
아주 작게 열린 문, 헬렌의 앞에 선 이 성의 주인은 뒷모습만 보임에도 사람을 두려움에 질식하게 했다.
‘대체 이게 무슨…….’
헬렌은 미동 없는 이즈카엘의 등을 힐끗 보다 온몸을 점령하는 소름에 입술을 꽉 물고 간신히 버텼다. 팔을 넘어 몸까지 발발 떨렸지만 숨소리조차 내기 무서웠다. 주인의 몸에서 나오는 기세가 한 움큼이라도 자신을 향한다면…… 도무지 견딜 자신이 없었다.
다행히 이즈카엘은 얼마 지나지 않아 문가에서 떨어진다 싶더니 몸을 돌렸다. 헬렌은 주인의 얼굴을 볼 자신이 없어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가 발걸음 소리가 없어지고 나서야 고개를 들었다.
침을 꿀꺽 삼킨 헬렌이 한참 동안 문을 바라보며 걱정스러운 얼굴을 했다. 그러다가 불안감을 떨쳐 버리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간식을 기다리고 있을 모자를 위해 문을 두드렸다.
똑똑.
문이 열리고 서로 꼭 붙어 있던 두 사람이 그녀를 쳐다봤다. 보기만 해도 따뜻해지는 모습에 헬렌이 쟁반을 상냥하게 들어 올렸다.
“간식을 가져왔습니다. 드시고 하세요.”
* * *
“아…….”
눈송이에 작은 금이 갔다. 동시에 끝없는 고통에 발악하던 작은 몸이 무언가를 느낀 듯 퍼드덕거리다가 우뚝 멈췄다.
꺾어졌던 관절이 제자리를 찾고 부러졌던 손톱이 다시 자라났다. 온 바닥을 적셨던 피가 스멀스멀 기어 검은 비늘 사이로 스르륵 빨려 들어가더니 마지막 핏방울마저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자 방은 적막에 휩싸였다.
그것이 긴 숨을 내쉬며 네 개의 동공을 사방으로 굴렸다.
퍽.
아무것도 모른 채 지나가던 검은 벌레가 그것의 손톱에 차여 몸통을 관통당했다. 배가 잔뜩 나온 남성의 손가락만 한 벌레는 괴로움에 여섯 개의 다리를 버둥거렸다. 하나 포식자로부터 도망치게 해 주던 날개도, 단단한 등갑도 지금은 다 소용없었다.
그것의 길고 검은 손톱 끝에서 검은 것이 흘러나왔다.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꾸물거리는 검은 액체는 단번에 벌레를 집어삼키더니 두 눈을 파먹고 그 사이로 스르륵 빨려 들어갔다. 곧 벌레가 모든 저항을 멈추고 다리 하나만 툭툭 움직이자 연기처럼 뿌연 목소리가 방 안을 메웠다.
「아, 이즈카엘……, 으윽. 메데아의 아이. 아버지. 나의 형제야.」
여전히 괴로운 듯 고통에 허덕대는 목소리였지만 그 너머에는 감출 수 없는 기쁨이 있었다. 그것이 새빨간 혀를 길게 내밀며 입꼬리를 귀까지 올리다가 벌레를 관통한 손톱을 천천히 뗐다.
파먹힌 눈을 시작으로 벌레의 찌부러진 몸통과 꺾인 날개, 부서진 등갑이 다시 재생됐다. 벌레가 전과 다르게 금색으로 변한 눈을 번쩍이며 여섯 개의 다리를 발발거렸다. 그리고 기분 나쁜 소리를 내며 바닥을 빠르게 기기 시작했다.
검고 징그러운 생명체는 벽 모서리를 몇 번 훑으며 지나가다 벽 틈 사이를 파고들었다. 여섯 개의 다리가 모두 사라지자 그것이 소름 끼치는 목소리로 낄낄거리며 말했다.
「넌 항상 어쩜 그리 멍청하고 어리석은지…….」
* * *
“이게 무슨 짓이에요!”
늦은 오후 해가 막 기울기 시작할 무렵, 성내에서 들려서는 안 될 고함이 터져 나왔다. 목소리의 주인을 아는 사용인들은 깜짝 놀라 달려오다가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이즈카엘!”
“…….”
“이즈카엘! 갑자기 왜…… 악!”
가는 여체가 순식간에 공중으로 떴다. 이즈카엘은 가지 않겠다고 버티며 질질 끌려오는 헤레이스를 짐짝처럼 어깨에 둘러메고 발을 움직였다. 사내가 순식간에 계단을 내려오고 문을 빠져나온 뒤 본채 뒤쪽으로 향했다.
“내려 줘요! 이즈카엘!”
헤레이스가 날카롭게 소리치며 주먹으로 이즈카엘의 등을 쳤다. 하지만 있는 힘껏 내리쳤음에도 이즈카엘은 눈썹 하나 움직이지 않은 채 앞만 봤다. 당황한 헤레이스가 다리를 버둥거려 봤지만 드레스 채로 결박당한 다리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즈카엘이 순식간에 본채 뒤에 있는 정원을 지나갔다. 헤레이스는 그가 본채와 가까운 별채를 지나치는 것을 보고 얼굴을 굳혔다. 지금 가고 있는 길로 쭉 나아가면 나오는 곳이라고는…….
“싫어! 내려 줘요! 당장 내려 달라고요!”
어느새 익숙해진, 하나 머물고 싶지 않은 건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헤레이스는 며칠 전까지 제가 머물렀던 구석 별채를 알아보고 하얗게 질린 채 고함쳤다.
이즈카엘은 그녀의 절박한 외침을 무시한 채 건물로 들어서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별채 안 가장 깊은 방에 당도했다. 방 너머 유리온실이 보이자 헤레이스가 악을 쓰며 다시 주먹을 내리쳤다. 그럼에도 이즈카엘은 그녀를 들어 올릴 때와 마찬가지로 그녀를 쉬이 제압하고 침대에 내려놨다.
“약속을 지켜.”
헤레이스의 몸이 푹신한 침대로 떨어지기가 무섭게 이즈카엘이 서늘한 얼굴로 말했다. 동굴 속에서 울리듯 낮고 음울한 목소리였다.
“그, 그게 무슨…… 알아듣게 말해요!”
그 기세에 눌린 헤레이스가 저도 모르게 말을 더듬다 눈을 위로 치켜떴다. 푸른 눈에 비친 분노가 선명했지만 이즈카엘은 변함없는 얼굴로 침대에 쓰러져 있는 헤레이스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말을 반복했다.
“말한 대로야. 약속을 지켜. 헤레이스 당신은 여기서 3년을 있어야 하잖아.”
이즈카엘이 말하는 바를 그제야 알아들은 헤레이스가 혼란스러운 얼굴을 했다. 무슨 황당한 소리를 하냐는 듯 그녀가 눈가를 찌푸리며 소리를 높였다.
“말했잖아요! 난 에르젠과 함께…….”
“아니. 헤레이스 당신은 여기 혼자 있어야 해. 그게 규칙이었잖나.”
당연하다는 것처럼 말하는 이즈카엘의 금안은 벽이 쳐진 듯 단단히 닫혀 있었다. 헤레이스는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이즈카엘의 표정에 울컥하여 몸을 벌떡 일으켜 세웠다. 높게 들린 턱과 발갛게 달아오른 뺨이 그녀의 울분을 보여 주고 있었다.
“갑자기 왜 이러는 거예요. 왜! 며칠 동안 우리를 그냥 뒀잖아요. 그런데 왜…….”
“우리?”
여태 고저 없이 말하던 이즈카엘의 눈에서 불꽃이 번쩍 튀었다. 허리를 숙인 그가 헤레이스를 비스듬히 노려봤다. 맞닿을 듯 가까워진 거리에 헤레이스가 몸을 뒤로 빼자 커다란 사내의 손이 그녀의 뺨을 누르고 얼굴을 꽉 쥐었다.
“……당신은 당신 아들하고 둘만 세상을 살고 있어. 그렇지?”
한쪽만 올라간 입꼬리에, 낯빛은 얼음장 같았다. 헤레이스가 등골을 타고 올라오는 소름에 몸을 움츠렸다. 그 모습에 사내가 차게 웃더니 한순간에 웃음을 뚝 그치며 비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당신하고 당신 아들을 며칠 동안 붙여 놓은 건 생일 때 한 약속 때문이야. 아이의 생일 선물로 어미인 당신과의 만남을 허락했지.”
“…….”
“본래라면 당신네 모자의 만남은 반나절이 전부였겠지만 아이가 겪은 일도 있고 해서 그동안 자비를 베풀었어. 하지만 헤레이스, 그걸 권리라 생각하면 안 되지. 응?”
사내에게 잡힌 채 그가 하는 말을 가만 듣고 있던 헤레이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래. 그는 이따위 사내였다. 잠시 잊고 있었지만 이런 사내였다. 그녀에게 태어난 지 백일 된 아들을 데리고 도망치는 선택을 하게끔 만든 잔인하고 비열한 인간이었다.
“그런 얼굴 마. 당신이 내 자비를 착각했을 뿐이잖아. 본래 당신의 자리로 돌아왔을 뿐인데 그따위 얼굴은 안 되지. 얼굴 펴. 내게 종속된 정부답게 어여쁘게 웃어 보란 말이야, 헤레이스.”
“미친놈! 내게 손 떼!”
헤레이스가 이즈카엘에게서 빠져나오려 고개를 젓고 손톱을 세웠다. 사내의 손에 붉은 줄이 그어졌다. 그러나 그녀가 거칠게 굴면 굴수록 이즈카엘의 얼굴에는 진한 미소가 드리워졌다.
“……당신은 이리 앙칼지게 굴어도 어여뻐. 한시도 눈을 뗄 수가 없어. 하지만 주제를 모르고 떼쓰는 버릇은 고쳐야겠지.”
“버릇은 당신이나 고쳐요! 제멋대로에 제정신이 아닌 사람처럼 구는 거, 그거나 고치란 말이에요! 그리고 규칙? 내가 그따위 것을 왜 지켜요. 비켜요! 난 에르젠한테 갈 거예요!”
그녀의 머릿속에 엉엉 울며 저밖에 없다 말하던 에르젠이 떠올랐다. 헤레이스가 고함을 치며 끝까지 버둥거리다 가까스로 사내에게서 벗어났다.
“아윽…….”
바닥에 두 발을 내딛자마자 몸이 뒤로 기울었다. 헤레이스가 상황을 제대로 인지하기도 전에 등이 다시 침대에 닿았다.
“규칙이 싫다면 마음대로 해. 하지만 헤레이스, 당신이 또 한 번 이 방 밖으로 나온다면…….”
수려한 콧날 아래 사내의 입술이 헤레이스의 입술에 잠깐 닿았다가 멀어졌다. 그가 징그러운 벌레 보듯 자신을 바라보는 아내를 내려다보더니 말을 이었다.
“……당신 아들은 교육을 위해 다른 곳으로 가야 할 거야. 몸이 약하다 했으니 따뜻한 바라셰로 가는 게 좋겠군. 한 15년 햇볕을 쬐며 지내다 보면 당신 얼굴은 잊을지도 모르겠어.”
남부에 위치한 도시 바라셰는 남부에서도 가장 끝에 있는 휴양 도시였다. 귀족들이 머무르는 고급 휴양지인 데다, 외국과의 교역 또한 활발한 도시라 문화가 잘 발달해 있었으며 날씨 또한 1년 내내 따뜻했다. 그러나 그곳은 세르펜스 성에서 여섯 달간 마차를 타고 달려가야 할 정도로 먼 곳이었다.
“물론 그렇게 되더라도 걱정은 마. 당신 아들은 세르펜스의 일원이자 내 자식이니 편히 지낼 수 있게 모든 조치를 다 하지.”
아들을 그리 먼 곳으로 보낸다는 말에 헤레이스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하더니 푸른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그녀가 입술을 달달 떨며 이즈카엘을 노려보다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저열한 인간.”
“…….”
“당신은 내가 본 사람 중 가장 저열한 인간이야! 세상에서 제일 더럽고 나쁜 놈이야! 퉷!”
헤레이스는 살아생전 누군가에게 침 뱉을 일이 있을 거라 상상도 해 본 적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여러 번이고 거리낌 없이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내의 타액이 자신의 뺨을 타고 흐르자 이즈카엘이 피식 웃었다. 그가 손을 뻗어 침대 커튼을 묶은 리본을 끌었다. 그리고 그것으로 제 뺨을 닦고 바닥으로 팽개쳤다. 그리고 헤레이스에게 좀 더 가까이 붙어 속삭였다.
“당신 말이 맞아, 헤레이스. 난 저열하고 더러운 놈이야. 태생부터가 글러 먹었는데 어쩌겠어? 고귀한 태생의 당신이 감내해야지. 물론 싫다 해도 지금은 입장이 반대라 어쩔 도리도 없겠지만.”
더는 들어 주기도 싫은 말에 헤레이스가 그를 밀쳐 내려 했으나 이즈카엘이 한발 빨랐다. 그는 헤레이스를 꼭 붙든 채 그녀의 입술을 삼켰다. 곧 방 안에 습기 찬 공기가 부유했다.
방 너머 유리온실 안 새장에서는 파랑새가 거칠게 날갯짓하며 목 놓아 울었다. 새의 거친 몸부림에 새장이 이리저리 흔들렸다. 하나 얼마 지나지 않아 지친 새는 다시 횃대에 내려앉아 까만 눈으로 새장 너머 먼 곳을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