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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목을 꺾는 악마여-63화 (63/108)

63화.

“내 아들은 죽, 죽을 뻔 했는데 난……, 흐윽.”

아이 앞에서 간신히 누르고 있던 감정이 터져 나왔다. 헤레이스는 에르젠을 잃을 뻔했다는 두려움과 자책감에 숨조차 쉬기 힘들었지만 아이 앞이라 꾹 참고 있었다. 그녀가 잘 쉬어지지 않는 숨에 제 가슴을 쥐어뜯다 이즈카엘의 상의 앞자락을 꽉 틀어쥐었다.

“나, 난 에르젠 옆에 있을 거예요.”

“…….”

“내 아들 옆에 있을 거라고.”

이즈카엘은 제 옷을 잡은 채 헐떡이는 헤레이스를 물끄러미 보기만 했다. 그는 말을 하지도, 그녀에게 손을 대지도 않았다. 그저 힘겹게 감정을 쏟아 내고 있는 그녀를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눈으로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무감한 얼굴에 구경하듯 동떨어진 시선. 자칫 기분이 나쁠 수도 있는 상황이었지만 헤레이스는 이즈카엘의 눈만 마주할 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즈카엘 또한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녀에게 뺨을 얻어맞아 그런 걸까. 아무것도 담고 있지 않은 그의 눈동자는 울고 있는 그녀보다 서글퍼 보였다.

당황한 헤레이스는 잡고 있던 이즈카엘의 옷을 스르륵 놓았다. 그러나 그 순간 이즈카엘의 표정이 무너지더니 그가 손을 재빠르게 움직였다.

“아…….”

“헤레이스.”

이즈카엘이 자신에게서 멀어진 헤레이스의 손을 다시 제 가슴팍에 놓은 채 꼭 잡았다. 그리고 힘 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난 내게 당신이 유일하듯 당신에게도 내가 유일하길 바랐어.”

* * *

벤이 죽었다. 누구도 모르게.

구석진 창고에 쓰러져 있던 그를 발견한 건 물건을 가지러 간 정원사였다. 나이 많은 정원사는 벤의 머리 주변에 굳어 있는 피와 미동 없는 몸에 호들갑을 떠는 대신, 벤의 코에 손을 한 번 대 보고는 노집사에게 그의 죽음을 알렸다.

죽은 벤의 옆에는 지나치게 많은 술병과 피 묻은 상자가 있었다. 노집사는 그가 구석에 숨어 술을 마시다 발을 헛디디어 상자에 머리를 박고 죽은 것이라 결론을 내렸다. 반나절이 채 지나기도 전 벤의 사인은 사고사로 종결됐다.

‘벤이라고, 성에서 일하던 하인 하나가 죽었습니다.’

헤레이스 또한 헬렌을 통해 벤이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하나 조금 불편해할지언정 그녀는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하지는 않았다. 몇 년 전 사용인의 작은 사고에도 가슴 아파하며 눈물 짓던 것과는 사뭇 다른 태도였다.

‘……그렇구나. 알려 줘서 고마워.’

헤레이스는 벤의 죽음에 조그마한 동정조차 가지지 않는 자신이 혐오스러웠다. 하지만 벤이라는 사내는 그녀는 물론이고 에르젠에게까지 강한 적대감을 가지고 있지 않았던가.

그녀는 혹시나 벤의 적대감이 이번 독살 미수 건처럼 에르젠을 향해 표출되면 어쩌나 걱정하고 있었다. 실제로 그는 에르젠이 죽지 않아 안타깝다며 그녀의 면전에 대고 말했다. 에르젠이 독살당할 뻔했다는 걸 알게 된 헤레이스로서는 아들의 죽음을 입에 담는 그를 도무지 동정해 줄 수 없었다.

‘내가 에르젠을 보호해야 해.’

미수에 그치긴 했으나 어린 아들이 죽음의 문턱에 닿을 뻔했다는 사실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헤레이스는 올라오는 토악질을 간신히 누른 채 감히 제 아들을 해치려 했던 여인을 떠올렸다.

‘……쫓겨났다고.’

헤레이스의 푸른 눈이 서늘한 빛을 띠었다. 헤레이스의 입장에서 샬럿의 추방은 당연한 일이었다. 만일 샬럿이 여전히 성에 있었다면 헤레이스는 에르젠을 빼돌려 또 한 번 도망갈 방도를 찾았으리라.

‘그래도 의외였어. 제 자식의…… 어미잖아. 사랑하는 여인이고. 당연히 쫓겨나야 마땅했지만 그이가 정말로 그 여자를 쫓아낼 줄은……, 아?’

생각을 하다 말고 헤레이스는 깜짝 놀랐다. 그이라니. 그녀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그이는 무슨……. 그 사람은 에르젠을 아껴 그리한 게 아니야. 그냥 원칙대로…… 아니지. 본래라면 죽어 마땅한 죄야. 아껴서 그 정도로 끝낸 거겠지. 혹 몰라. 쫓아냈다 하고 어디 뒀을지도.’

도망친 3년 동안 헤레이스는 별꼴을 다 봤다. 그리고 개중에는 부인의 강한 집안을 두려워해 정부를 조금 떨어진 지역에 두는 사내들도 있었다. 그녀에게도 그런 더러운 제의가 몇 번 들어왔으니 의외로 빈번하게 일어나는 일일지도 몰랐다.

‘……난 내게 당신이 유일하듯 당신에게도 내가 유일하길 바랐어.’

하지만 부정적인 생각을 비집고 며칠 전 이즈카엘이 그녀에게 한 말이 계속 떠올랐다. 우습고 멍청한 생각이었지만 헤레이스는 그가 꼭 그녀에게 사랑을 갈구하는 것 같다고 느꼈다.

말도 안 되는 생각이라며 고개를 젓자 이번에는 며칠 동안 그녀의 마음 한쪽을 불편하게 하는 아이가 생각났다.

‘그런데 미겔 그 아이는 정말 어디 있지? 아예 보이지 않는데…… 그 여인과 함께 나간 걸까? 헬렌도 모르는 눈치고…….’

미겔의 향한 헤레이스의 마음은 여전히 미묘했다. 헤레이스는 아이가 고마우면서도 미웠다. 도통 정리되지 않는 감정. 헤레이스는 제 좁은 마음을 원망하며 이리저리 치고 들어오는 생각에 이마를 짚었다.

“엄마.”

“…….”

“엄마!”

그렇게 얼마를 있었을까. 헤레이스가 앉아 있는 카우치 아래 바닥에서 목탄으로 그림을 그리고 있던 에르젠이 그녀를 불렀다. 헤레이스는 에르젠이 드레스 자락을 잡고 흔든 후에야 정신을 차리고 답했다.

“으, 응? 에르젠, 왜?”

“무슨 생각 해?”

“아무것도 아니야. 그보다 벌써 다 그린 거야?”

에르젠이 씩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헤레이스는 한결 밝아진 아들의 얼굴을 보며 미소를 짓다가 에르젠의 뺨에 묻은 숯검정을 보고 손수건을 꺼내 들었다.

“얼굴이 새까만 강아지가 됐네. 이리 와, 에르젠. 엄마가 닦아 줄게.”

“나중에! 일단 에르젠 그림부터 봐! 응?”

“그래. 그래. 알았어. 어디 우리 에르젠 그림 솜씨 좀 볼까?”

에르젠은 고개를 도리도리 젓더니 바닥에 흩어져 있던 그림 중 하나를 가져왔다. 아들의 그림을 본 헤레이스가 그을음이 묻는 것도 개의치 않은 채 에르젠을 안아 주며 칭찬했다.

“어머, 에르젠. 그림을 정말 잘 그리네.”

“나 그림 그리는 거 좋아. 재미있어!”

아들을 사랑해 나온 빈말은 아니었다. 에르젠은 자수에 뛰어난 헤레이스에게 섬세함을 물려받은 모양인지 배우지도 않은 그림을 제법 잘 그렸다. 익숙지 않은 목탄에 선이 삐뚤삐뚤한 부분이 있었으나 아이가 그린 것은 모두 사람의 형태가 또렷했다.

“그래? 그럼 선생님을 붙여 줘야겠는걸.”

“정말? 그럼 예절 스승님이랑 바꿀래. 예절 선생님 싫어!”

“예절 공부도 하고 그림 공부도 하면 되지. 일단 이건 엄마고…….”

종이의 가장 가운데는 헤레이스가 그려져 있었다. 허리 끝까지 오는 길고 구불구불한 머리에 헤레이스가 자신을 단번에 알아봤다.

“맞아! 이거 엄마야. 예쁘지? 똑같이 그렸지?”

“엄마 예쁘게 그려 줘서 고마워. 우리 에르젠, 쪽.”

“엄마, 쪽.”

헤레이스가 입술에 장난스레 손가락을 가져다 대자 에르젠이 배시시 웃으며 가볍게 입을 맞췄다. 아이의 순수한 온기가 그대로 느껴져 헤레이스의 얼굴이 더욱더 환하게 빛났다. 그녀가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그림 속 자신의 옆에 있는 인물을 가리켰다.

“이건 에르젠이지?”

“응! 그건 나야.”

“우리 에르젠이 이렇게 잘생겼던가?”

“엄마!”

모자는 서툰 그림 한 장으로 퍽 재미있게 놀았다. 창밖 햇살도 오랜만에 행복을 만끽하고 있는 모자를 축복하듯 따뜻하게 방을 데웠다.

헤레이스는 몇 번이고 잘했다 칭찬하며 그림 속 아들과 저를 보다 종이 구석에 있는 작은 사람의 형체에 고개를 갸웃했다. 특징이 잘 두드러지게 그려진 헤레이스와 에르젠과는 달리 구석에 그려진 이들은 누군지 알아보기 힘들었다.

“여기 있는 사람들은 누구야?”

헤레이스의 질문에 에르젠이 왜 몰라보냐는 듯 질책 어린 눈을 하다 손가락으로 한 명 한 명 가리키며 설명했다.

“여기 안나랑 미겔 형이랑…… 아빠, 아니 아저씨!”

“……그렇구나.”

아저씨. 이즈카엘이 아이에게 어떻게 다가오는지가 빤히 보였다. 헤레이스는 아빠라 불러야지 하고 타이르려다 가장 작게 그려진 형체를 보고 그만뒀다. 그는 에르젠에게 아비라 불릴 자격이 없는 사내였다.

“그런데 왜 구석에 그렸어? 여기 자리도 많은데. 에르젠이랑 엄마 옆에 그려 주지.”

“……싫어.”

“응?”

헤레이스가 구석에 위치한 이들을 가리키며 묻자 에르젠이 어두운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제법 단호한 아이의 모습에 헤레이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에르젠은 엄마가 제일 좋아. 엄마만 있으면 돼. 그러니까 엄마도 에르젠하고만 놀았으면 좋겠어.”

에르젠이 그림 속 헤레이스와 자신의 주변으로 동그라미를 그렸다. 아이의 폐쇄적인 모습에 충격받은 헤레이스가 에르젠을 고쳐 안았다.

“에르젠, 그럼 안 돼. 엄마도 에르젠이 제일 좋지만 세상은 엄마랑 에르젠 둘이서는 살 수 없는걸. 안나랑 형이랑 스승님들 그리고…… 이 아저씨랑도 살아야지.”

“하지만…….”

에르젠의 축 처진 어깨에 서러움이 가득했다.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 우물쭈물하며 헤레이스의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던 아이가 한참 만에 고개를 들었다. 푸른 눈망울에는 그새 눈물이 차올랐다.

“……에르젠은 안나도 좋아하고 미겔 형도 좋아해. 엄마가 좋아하라 하면 아저씨도 좋아할 수 있어. 하지만 엄마가 제일 좋아. 다른 사람들 다 합쳐도 엄마만큼 좋지 않아. 그러니까 에르젠은 엄마만 있으면 된다 한 거야. 그런데 엄마는 아니야?”

“…….”

“엄마는 에르젠만 있으면 안 돼? 다른 사람도 있어야 해? 그래서 계속 에르젠하고 같이 안 있는 거야? 이번에도 에르젠만 두고 갈 거야? 에르젠이 여러 번 울어야 와 줄 거야?”

끝없이 쏟아 내는 물음에는 걱정과 불안이 한가득하였다. 헤레이스는 둔기로 머리를 얻어맞은 듯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헤레이스가 딱딱하게 굳은 채 아무 말 않자 그런 어미의 얼굴에 지레 겁을 먹은 아이가 매달리기 시작했다.

“어, 엄마. 에르젠이 잘못했어. 다른 사람들하고도 있을 거야. 고집 안 부려. 그러니까 엄마…….”

“…….”

“가지 마. 에르젠만 두고 가지 마. 응?”

헤레이스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에르젠을 꼭 안고 아들의 뺨에 얼굴을 비볐다. 에르젠의 얼굴에 묻어 있던 숯검정이 헤레이스에게로 옮겨 갔다. 하지만 헤레이스는 자신의 드레스가 더러워지는 것도, 얼굴이 더러워지는 것도 상관 않고 에르젠을 꼭 안고 있었다.

“아니야, 에르젠. 엄마가 틀렸어. 엄마도…….”

어미의 목소리에 울음이 섞여 들자 아이가 고사리 같은 손으로 제 눈가를 닦고 어미의 등을 토닥였다. 그 어른스러운, 너무 빨리 찾아와 버린 배려에 헤레이스가 가까스로 밝은 목소리를 지어내 말을 이었다.

“……다른 사람 없어도 돼. 우리 예쁜 에르젠만 있으면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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