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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목을 꺾는 악마여-61화 (61/108)

61화.

샬럿이 구겨지듯 화려한 마차 안으로 사라지자 몇몇이 가여운 얼굴로 어미와 떨어진 미겔을 바라봤다. 하나 이즈카엘은 미겔의 입가에 자리한 비소를 똑똑히 보고는 몸을 돌렸다. 그가 손짓으로 노집사를 불렀다.

“……내가 말한 곳에 가둬 놔.”

이즈카엘의 명에 노집사가 얼굴을 굳히더니 미겔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그새 미겔에게 붙은 유모를 떼어 낸 후 아이를 끌어당겼다. 미겔에게 붙어 있던 중년의 여인이 이즈카엘의 앞에 몸을 던졌다.

“아이고, 주인님. 안 됩니다. 미겔 도련님은 아직 어리십니다.”

“…….”

“제, 제가 같이 가겠습니다. 저라도 같이 있어야…….”

누가 보더라도 충심이 가득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이즈카엘은 여인의 눈 속이 어딘가 멍한 것을 확인하고는 냉정히 말했다.

“성 밖으로 내보내. 그리고 다시는 이곳에 발 들이지 못하도록 해.”

이에 노집사가 하인들에게 눈짓하자 하인들이 이번에는 미겔의 유모를 질질 끌었다. 여인은 미겔의 이름을 부르며 끌려 나갔다.

이즈카엘이 노집사에게 잡혀 있는 미겔을 힐끗 보고는 기사들 가장 앞에 있는 에드가를 불러 무언가를 말했다.

“……그렇게 처리하도록.”

“예.”

이즈카엘의 앞에 고개 숙인 에드가가 말에 올랐다. 곧 에드가를 필두로 한 기사 무리와 샬럿을 태운 마차가 흙먼지를 일으킨 채 성문 밖으로 나섰다. 미겔이 점점 작아지는 그들을 보다 작게 인사했다.

“잘 가, 어머니.”

* * *

에드가 일행이 도착한 곳은 북부와 야만인들 영토의 경계였다. 에드가는 황량하기 그지없는 땅을 둘러보다 말을 멈추고 내렸다. 날은 이미 어둑해져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 완전히 캄캄해질 터였다.

“꺼내.”

물건을 대하는 듯 매정한 말이었다. 기사 하나가 화려한 마차 안에 있던 샬럿을 끄집어 내렸다. 샬럿이 악, 하는 소리와 함께 바닥으로 던져지다시피 했다.

“여, 여기는……?”

샬럿의 물음에 에드가가 마차와 마구를 연결하고 있던 물추리막대와 봇줄을 끊어 내 말들을 마차와 분리했다. 그리고 기사들을 시켜 마차 안에서 상자 하나를 꺼내 오게 했다.

쿵.

기사 여럿이 힘들게 옮긴 상자는 무게에 걸맞게 무거운 소리를 내며 바닥에 안착했다. 에드가가 발로 상자를 열었다.

철컥하는 소리와 함께 뚜껑이 열린 상자 안에는 황금이 가득했다. 보는 것만으로도 눈부신 황금에 샬럿의 눈이 순간 커졌다.

“공작님께서 네게 약속한 황금이다. 네 몸의 몇 배는 되는 무게지. 모두 네 것이야.”

그 말에 샬럿이 독기 어린 눈을 하면서도 상자를 끌어안았다. 이미 쫓겨난 이상 이것이라도 챙겨야지. 이걸로 먹고 살다 미겔이 공작이 되면 그때 성으로 돌아가는 거야.

상자 안 가득 담긴 황금을 매만진 그녀가 충혈된 눈으로 히죽거리기 시작했다. 에드가가 미간을 좁혀 그 모습을 보다 몸을 돌렸다.

“돌아간다.”

에드가가 마차에서 분리된 말을 다른 기사들에게 넘겼다. 기사들이 말을 각자의 말 뒤에 묶고 에드가를 따라 방향을 틀었다. 황금을 보며 웃고 있던 샬럿이 그제야 이상함을 느끼고 고함을 쳤다.

“이게 무슨! 거기서! 당장 거기 서지 못해!”

에드가가 제자리에 우뚝 섰다. 샬럿이 황금을 담은 상자 뚜껑을 닫고 그에게 주춤거리며 다가갔다. 그녀의 눈에는 그새 희열 대신 불안감이 자리했다.

“이, 이대로 가면 나더러 이걸 어떻게 들고 가라고…… 이걸 옮겨 줘야지. 당장 내가 살 곳으로 안내해, 이 천것아.”

“……내가 받은 명은 너와 이 황금, 그리고 이 마차를 여기 두는 것뿐이야. 각하께서 말씀하셨다. 말을 모조리 회수해 돌아오라고.”

샬럿이 눈이 경악으로 커졌다. 이런 황무지에 여인인 저와 황금, 그리고 말도 없는 마차만 두고 떠난다고? 제정신인가. 하지만 저를 바라보는 기사의 눈은 너무도 덤덤했다. 샬럿은 부들부들 떨리는 손가락으로 에드가를 가리켰다.

“날…… 날 죽일 셈이지? 그렇지 않고서는…….”

“…….”

“똑바로 말해! 날 죽일 셈이지? 네 주인이 날 죽이라 말했지? 그렇지 않고서는 어떻게!”

“그러게 욕심을 적당히 부리지 그랬나.”

“뭐?”

“주제넘게 구는 것도 모자라 에르젠 도련님과 부인을 독살하려 들었으니 이 정도는 마땅하지.”

그 말을 끝으로 에드가는 말에 올랐다. 그리고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말 옆구리를 찼다. 에드가를 태운 말이 길게 울며 달리기 시작했고, 이어 다른 기사들도 빠르게 사라졌다.

“거기서! 거기 서란 말이야아! 아아아악!”

흙먼지 뒤로 샬럿이 악을 썼다. 하지만 위험한 땅, 그녀의 비명에 답해 줄 이는 없었다.

* * *

헤레이스는 에르젠을 볼 생각에 한껏 들떠 있었다. 온실 분수 앞에 앉아 아들에게 줄 셔츠를 펼쳐 보는 그녀의 눈에는 애정만이 가득했다.

셔츠에는 파랑새가 예쁘게 자리해 있었다. 헤레이스가 직접 수놓은 파랑새를 쓰다듬자 바로 옆 새장에 갇힌 파랑새가 지저귀었다.

“답답하니? 나올래?”

헤레이스가 새장 문을 열고 파랑새 쪽으로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작은 새가 헤레이스의 손가락에 앉아 머리를 이리저리 움직이다 다시 새장 안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날아가도 좋을 텐데…….”

사람 손을 많이 타서 그런지 새는 새장을 열어 놔도 밖으로 날아가지 않았다. 헤레이스가 가여운 눈으로 새를 바라보다 새장 문을 닫고 의자에 올려 둔 셔츠를 집어 들었다. 조금 있으면 연회가 끝날 테고, 그러면 에르젠에게 이걸 입혀 볼 수 있으리라.

“아직 끝나지 않았나…….”

하지만 그녀의 기다림은 해가 저물고 하늘이 어둑해질 때까지 계속됐다. 헤레이스는 싸늘해진 날씨에 방 안으로 자리를 옮겨 초조히 문을 바라봤다. 그리고 마침내 똑똑 하고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에르젠!”

헤레이스가 아들이 서 있을 것을 기대하며 활짝 웃었다. 그러나 문이 열리고 들어온 것은 식사를 가져다주는 하녀 중 하나였다. 실망이 역력한 얼굴이 그대로 드러나자 하녀가 고개를 푹 숙였다.

“저기…… 아직 연회가 끝나지 않았니?”

“…….”

하녀는 헤레이스의 질문에 답하지 않았다. 언뜻 보면 평소와 같은 모습이었지만 헤레이스는 손을 덜덜 떨며 불안한 눈으로 바닥만 보는 하녀에게서 이상한 낌새를 느꼈다. 헤레이스가 목소리를 깔고 싸늘하게 말했다.

“……밖에 무슨 일이 있구나. 그것도 내 아들과 관련된.”

“앗!”

혹여나 싶어 떠본 말이었건만 헤레이스의 말에 하녀가 지레 놀라 접시를 놓쳤다. 그릇이 깨지지는 않았으나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탁자 위에 엎어졌다. 테이블보를 타고 바닥으로 붉은 소스가 뚝뚝 떨어졌다.

헤레이스가 지체 없이 문가로 갔다. 그리고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문을 벌컥 열었다.

* * *

“부인, 돌아가셔야 합니다. 이렇게 나오시면 안 됩니다.”

“…….”

“부인, 제발…….”

하녀와 복도를 지키고 있던 기사가 헤레이스에게 붙어 곤란한 목소리로 애원했다. 하지만 헤레이스는 그들의 목소리를 못 들은 척 걸음을 옮겼다.

‘아니, 난 당신을 가두지 않아. 원한다면 자유롭게 나다녀도 좋아. 하지만 당신이 규칙을 어긴다면 내가 무슨 일을 벌일지 장담하지는 못하겠군.’

협박에 가까운 이즈카엘의 말이 두려웠다. 하지만 지금 당장 에르젠에게 무슨 일이 생겼는지도 모르는데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헤레이스가 더욱더 빠르게 정원을 가로질렀다.

그러나 본채가 저 멀리 보이기 시작했을 때 웬 사내 하나가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정확히는 급히 모퉁이를 돌던 헤레이스와 사내가 부딪칠 뻔했다.

“에이씨, 뭐야?”

“…….”

“딸꾹. 어? 공작 부인 아니신가.”

사내는 술에 잔뜩 취해 있었다. 얼굴은 물론이요, 너저분하게 풀어 헤쳐진 셔츠 사이로 보이는 목과 가슴에도 벌겋게 열이 올라 있었다. 헤레이스의 뒤를 따르던 기사와 하녀가 그녀를 뒤로 보내고 막아섰다.

“벤! 미쳤어? 당장 비켜!”

하녀가 사내를 알아본 듯 작은 목소리로 일갈했다. 하나 사내는 히죽거리며 웃더니, 들고 있던 술병을 내던지고 큰 소리로 낄낄거리며 헤레이스를 훑어보기 시작했다.

“귀하신 몸께서 무슨 바람이 불어 나오셨을까? 날갯죽지 잘린 새처럼 얌전히 들어앉아 있기나 하지.”

헤레이스를 향한 사내의 적대는 명백했다. 하녀의 일갈에도 사내가 무례한 언사를 내뱉자 기사가 얼굴을 와락 구기더니 남자를 향해 손을 뻗었다.

“가만히 앉아 있어도 모든 걸 해결해 주는 사람이 있는 주제…… 으아악!”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사내가 바닥에 강제로 엎어져 제압당했다. 기사가 사내의 팔을 꺾더니 헤레이스를 향해 말했다.

“듣지 마십시오.”

“흐으…… 폴, 그 여자한테 고개 숙여 봤자 소용없어. 네 여자도 저 여자 때문에 성에서 쫓겨났잖아? 안나? 그래. 저 여자 시녀 말이야.”

그러나 벤이라는 사내는 고통에 허우적대면서도 입을 놀렸다. 갑작스레 벌어진 상황에 몸을 굳히고 있던 헤레이스가 사내의 입에서 나오는 아는 이름에 눈을 크게 떴다.

‘안나, 너 좋다고 하는 아이 이름이 뭐지? 폴이라 했던가? 어때? 잘해 줘?’

‘그런 애를 어떻게 저한테 붙이세요! 폴은 저보다 세 살이나 어리다고요! 완전 어린애예요.’

헤레이스의 시선이 기사의 얼굴에 닿았다. 몇 년 전 앳된 모습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물론이요, 순수해 보였던 표정조차 이제는 없었다. 건장한 기사로 자란 소년의 얼굴에는 지독한 씁쓸함과 우울만이 자리했다.

“좋다고 따라다니는 너 이용해 저 여자랑 도망가더니 붙잡혀 와서 매를 맞고 쫓겨났지. 주인이나 그 아랫것이나 사내를 홀려 이용하는 재주만 있다니까.”

“……더 입을 놀렸다간 목을 베겠다.”

“그만. 그냥 둬요.”

헤레이스를 모욕하는 말이 이어지자 폴이 검을 뽑아 들었다. 헤레이스가 그를 만류하고는 걸음을 옮겼다. 저런 주정뱅이와 입씨름할 시간 따위 없었다. 하지만 그녀가 몇 발 떼기가 무섭게 뒤에서 벤이 다 들리도록 큰 소리로 주절댔다.

“이걸로 당신이 망친 인생이 몇인지……. 오늘만 해도 릴리가 죽고 미겔 도련님을 낳은 여자가 쫓겨났지. 가여운 미겔 도련님. 하루아침에 어미를 잃고 말이야. 당신을 닮은 재수 없는 애새끼 하나가 없어지는 게 무에 대수라고…….”

에르젠의 이름을 듣자마자 헤레이스의 발이 딱 얼어붙었다. 그녀가 되돌아와 여전히 엎어져 있는 벤의 멱살을 잡았다.

“똑바로 말해. 에르젠이 없어져? 무슨 말이야.”

멱살이 잡힌 벤은 당연하고, 하녀와 폴도 갑자기 변한 헤레이스의 모습에 놀란 얼굴을 했다. 하지만 벤은 곧 그녀를 비웃으며 히죽거렸다.

“표정하고는……. 어미는 어미라 이 말인가? 그래. 아무도 당신한테 말해 주지 않았을 테니 내 친히 알려 주지. 당신 아들 말이야 오늘…….”

“벤! 그 입 닫아!”

폴이 고함을 지르며 벤의 말을 끊으려 했다. 하지만 증오 어린 눈으로 헤레이스를 바라보던 벤은 독한 술 냄새와 함께 끝끝내 말을 뱉었다.

“……독 먹고 뒈질 뻔했어. 진짜 죽어 버렸으면 좋았을 텐데. 아깝게 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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