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목을 꺾는 악마여-59화 (59/108)

59화.

미겔은 진심으로 절 가엾게 보는 에르젠의 푸른 눈을 보다 고개를 깊이 숙였다. 갑자기 가까워진 거리에 에르젠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나 천진난만한 얼굴에는 여전히 호감만 존재할 뿐, 경계나 두려움 등은 없었다. 미겔이 어딘가 싸늘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에르젠, 내가 불쌍해? 정말?”

“응. 생일 때 케이크 못 먹는 건 불쌍해. 그래도 걱정 마, 미겔 형. 내가 내일 케이크 나눠 줄게. 난 형이 좋으니까 빨간 열매도 반 나눠 줄 거야.”

에르젠의 답에 미겔의 얼굴에 고인 미소가 짙어졌다. 아이가 동생의 눈을 뚫어져라 보며 천천히 말했다.

“케이크나 로즈베리 열매는 주지 않아도 괜찮아. 대신 에르젠, 다른 걸 하나만 양보해 줄래?”

에르젠이 고개를 끄덕이려던 차 스산한 바람이 불어왔다. 에르젠은 그 냉기에 창가로 시선을 돌렸다. 예상과 달리 창가 커튼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대신 달이 만든 빛에 날카로운 이빨을 가진 기이한 그림자가 맺혔다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에르젠은 눈을 깜빡인 사이 사라진 그림자에 몸을 잔뜩 움츠렸다. 잘못 봤다 생각하면서도 조금 전 미겔이 읽어 준 동화책 속 괴물이 떠올랐다. 오들오들 떠는 에르젠을 보며 미겔이 눈매를 좁혔다.

“네가 가진 것 중 딱 하나만 양보해 주면 되는데…….”

겁에 질린 에르젠이 미겔의 재촉하는 목소리에 고개를 끄떡이려다 말고 저었다. 만약에라도 줄 수 없는 것이라면?

“들어 보고……. 내가 못 주는 거일 수도 있잖아.”

미겔의 얼굴에 조금 놀란 기색이 스쳤다. 그러나 미겔은 곧 재빠르게 표정을 갈무리하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가기 전 마지막으로 에르젠에게 물었다.

“그래? 그럼 다음에 말할게. 그보다 에르젠, 너 로즈베리……, 아니 빨간 열매 좋아하니?”

* * *

성은 오랜만에 새벽부터 눈코 뜰 새 없이 분주했다. 사용인들은 작은 연회장을 청소하고 꾸미느라 정신이 없었고, 주방에서는 아이들이 좋아할 법한 알록달록한 디저트와 여러 음식을 만드느라 요리사들의 손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바쁜 와중에도 사용인들의 입은 그들의 손발만큼이나 빠르게 움직였다. 주방 잡일을 맡은 벨라와 잔느도 그중 하나로, 그들은 식기를 열심히 닦으면서도 수다 떨기를 멈추지 않았다. 주방장의 아내이자 주방 하녀들을 관리하는 메리 부인이 드문드문 그녀들을 노려봤지만 호기심 많은 어린 하녀들의 입을 막기란 쉽지 않았다.

“이게 한 번에 뒤바뀔 일이야? 아무렴 나라 이름도 하루아침에 바뀐다고는 하지만 막상 이렇게 되니 참…….”

메리 부인이 스쳐 지나가기가 무섭게 포크를 닦고 있던 벨라가 잔느에게 속삭거렸다.

그녀는 지금껏 미겔이 이즈카엘의 후계자가 될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아비의 외관을 쏙 빼닮은 미겔은 태어날 적부터 에르젠보다 대우받았고, 어미의 출신이 미천하다고는 하나 누구나 느낄 수 있을 만큼 영리했다.

그러나 최근 미겔의 어미인 샬럿이 곧 쫓겨난다는 소문이 성내 파다하게 퍼졌으며, 그를 증명하듯 샬럿 모자는 성의 3층에서 1층으로 방을 옮겼다. 그리고 같은 날 에르젠은 성내 구석방에서 공작 부인의 방으로 거처를 옮겼다.

바뀐 방의 위치와 에르젠만을 위한 생일 연회. 주인의 마음이 어디로 기울었는가는 뻔했다. 잔느가 접시를 내려놓으며 고소하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흥! 그동안 오래 견딘 거지. 출신도 천한 게 매번 나보고 바닥이나 닦는 버러지라 할 때 내가 얼마나 분했는데!”

“맞아. 이제라도 쫓겨나서 다행이지. 설마 정말 공작 부인이라도 되면 어쩌나 했는데. 미겔 도련님이 태어날 때쯤에는 주인님께서 엄청나게 끼고 도셨잖아.”

“그것도 한때지. 사내 마음 바뀌는 거 한순간이야. 애지중지 품고 있던 정부를 내치는 게 여기만의 일도 아니고. 분위기를 보아하니 미겔 도련님도 쫓겨날 거 같은데……. 그 왜, 에르젠 도련님께서 공작 부인의 방에 머무신다잖아.”

“에이, 설마…… 그래도 꽤나 닮은 아드님이신데 그렇게까지 하겠어?”

급작스러운 주인의 변덕에도 대부분의 사용인들은 벨라와 잔느처럼 샬럿을 동정하기는커녕 그녀의 몰락을 반기며 조롱했다. 그들은 샬럿이 자신들을 천하다 모욕하며 괴롭힘을 일삼았던 것을 잊지 않았다.

“하기야 작고하신 선황제 폐하께서도 끼고 돌던 정부 목은 단번에 쳤지만 그 아들은 곁에 두셨지. 맞아! 그 아들이 반역죄 때문에…….”

“조용해! 그 일에는 공작 부인의 집안도……. 주인님께서 에르젠 도련님 대우하는 거 안 보여? 공작 부인께 조금이라도 해되는 말을 했다가는 전처럼 야단이 날걸?”

잔느가 피바람을 일으켰던 페가토 후작의 반역을 입에 올리자, 벨라가 기겁하며 친우의 입을 막았다. 주인인 이즈카엘의 심중이 명확한 바, 헤레이스를 폄하하는 말은 하지 않는 게 좋았다. 잔느 또한 친우의 반응에 제 실수를 깨닫고 목소리를 죽였다.

“참! 그렇지. 이 입이 방정이야.”

“조심해. 너랑 이야기하다가 나까지 쫓겨나겠어.”

“알았어. 알았다고. 그보다 이대로 가면 벤 패거리들이 밤에 잠을 못 자겠네. 안 그래?”

벨라에게 미안한 표정을 지어 보인 잔느가 말을 돌렸다. 벨라는 친우를 잠시 흘기다 다시 식기를 닦으며 어쩔 수 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그것들은 매번 공작 부인이 죄인의 딸이니 쫓겨나야 한다며 속닥거리고 다녔으니……. 벤은 아직도 정신 못 차리고 공작 부인이 별채에서 대우도 못 받는다고 큰소리치는 모양이지만, 그러다 큰일 나지.”

“에이미 일로 아직도 심사가 뒤틀려 있는 거지, 뭐. 왜, 벤이 에이미한테 죽고 못 살았잖아.”

“욕실에 몰래 숨어 들어가 공작님 꾀려던 발칙한 계집애가 무에 그리 좋다고……. 그렇게 좋으면 에이미가 팔이 부러져 쫓겨날 때 따라가든가.”

“그 일로 부인을 미워하는 것도 우스워. 에이미를 쫓아낸 건 공작님이신데 왜 부인을 탓하냔 말이야. 공작님 앞에서는 고개도 못 들면서…… 쯧!”

“됐어. 그러는 것도 이제 끝일 텐데. 그 더러운 여자가 쫓겨나기만 해 봐. 벤도 그렇지만, 릴리 걘 성에 발이라도 붙일 수 있겠어?”

“이참에 아예 다 같이 나가 버리라지. 릴리, 걔는 쫓겨날 때 곱게 갈 수 있는지 두고 봐. 그 머리를 죄 뜯어 놓을 거야.”

샬럿이 쫓겨난 뒤를 상상하던 두 사람의 입담이 서서히 거칠어졌다. 그녀들은 샬럿도 그렇지만, 샬럿의 옆에서 저들을 괴롭혔던 또래 릴리를 떠올리며 이를 갈았다.

“머리만 뜯을 줄 알아? 난 그 얼굴을 이 손으로…….”

“잔느! 벨라! 그만 떠들고 빨리빨리 못 움직여? 둘 다 혼이 크게 나야 정신을 차리지!”

하지만 그녀들의 수다는 그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그새 주방을 한 바퀴 돈 메리 부인이 두 사람 뒤에서 고함을 버럭 지른 탓이었다.

잔느와 벨라가 고개를 푹 수그린 채 다시 손을 재게 놀렸다. 메리 부인이 못 미덥다는 듯 그들의 뒤편에서 팔짱을 낀 채 버티고 서 있었으므로 더는 요령껏 떠들 수도 없었다.

“거기 조심해! 쏟기라도 했다가는 큰일이야!”

“리본이 왼쪽으로 기울어졌잖니. 다시 달아. 빨리!”

그렇게 에르젠의 생일 준비는 차근차근 진행됐다. 어느새 잘 꾸며진 홀에는 귀한 로즈베리를 잔뜩 올린 케이크가 놓였으며, 그 주변은 먹음직스러운 여러 음식으로 차례차례 채워졌다.

사용인들은 마지막으로 식기를 놓고 들뜬 얼굴을 했다. 오늘 연회는 귀하신 분들 대신 성내 기사들과 그들이 초대객으로 자리할 예정이었다.

“준비는 끝났나?”

마침내 모든 준비가 마무리되고 연회장 문이 열리며 이즈카엘이 홀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그의 오른편에는 오늘 연회의 주인공인 에르젠이 자리해 있었다.

“예, 준비가 끝났습니다, 주인님.”

노집사의 얼굴에는 오랜만에 웃음이 한가득했다. 그는 아기자기하게 장식된 홀을 자랑스럽게 내보이며 에르젠을 향해 기대감이 충만한 얼굴을 했다. 아이가 좋아해 주길 바라는 순수한 마음이었다.

평소답지 않은 노집사의 즐거운 목소리에도 이즈카엘은 홀 내부를 무덤덤한 눈으로 훑어봤다. 아이의 취향에 맞춰 꾸미라 명해서 그런지 그의 눈에 홀은 지나치게 알록달록했다.

하지만 주인공인 에르젠은 홀이 제법 마음에 든 모양새였다. 아이는 입을 벌린 채 홀 여기저기를 구경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좋아하면 그만이지.’

에르젠의 표정에 기분이 퍽 좋아진 이즈카엘이 몸을 숙여 홀 구경에 한창인 에르젠을 안아 들었다. 그리고 중앙에 마련된 케이크 바로 앞자리로 향했다.

“괜찮군.”

로즈베리가 가득 올라간 삼단 케이크 또한 훌륭했다. 로즈베리는 한 알 한 알 싱그러운 표면을 자랑했으며, 두껍게 깔린 크림은 당장에라도 손가락을 가져다 대고픈 욕망을 불러일으켰다.

작은 칭찬에 주방장이 감격에 겨운 얼굴을 했다. 이즈카엘은 주방장의 표정을 뒤로한 채 어릴 적 정원에 숨어 창 너머로 훔쳐본 샤를의 생일 연회를 떠올렸다. 당시 그의 눈길을 사로잡았던 케이크 못지않게 지금의 케이크도 반짝반짝 빛이 났다. 그때 입 안을 맴돌던 쓴맛이 기억나자 이즈카엘이 에르젠을 고쳐 안고는 아이의 표정을 살폈다.

기대감만이 자리할 거라 생각했던 것과 달리 에르젠의 얼굴은 하얗다 못해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게다가 몸을 어찌나 벌벌 떠는지, 그 떨림이 아이를 안고 있는 이즈카엘의 손은 물론이고 팔과 몸까지 전해졌다.

누가 보더라도 생일을 맞이한 아이가 취할 행동은 아니었다. 이즈카엘은 뭐가 문제인가 미간을 좁히며 고민하다 에르젠이 아래쪽을 힐끔거리며 살피는 것을 눈치챘다. 아이가 높은 높이에 겁을 먹었다 생각한 이즈카엘이 케이크 바로 앞에 주인공을 위해 마련된 의자에 에르젠을 앉혔다.

하나 에르젠의 표정은 여전히 어두웠고, 그는 잔뜩 겁에 질려 있었다. 어깨를 뒤로 확 젖힌 아이는 케이크를 보지 않겠다는 듯 눈을 꼭 감고 있었다. 이즈카엘은 물론이요, 주변 사람들도 그제야 아이가 케이크를 꺼린다는 사실을 눈치채고 입매를 굳혔다.

“왜 그러지? 케이크가 마음에 들지 않는 건가?”

이즈카엘이 에르젠에게 묻자 주방장의 얼굴이 곧 울 것처럼 변했다. 그도 그럴 것이 밤낮 잠을 줄여 가며 구상하고 온 힘을 다해 구워 낸 케이크였다.

“먹, 먹으면 안 된다 했어요.”

에르젠이 슬며시 눈을 뜨고는 기어가는 목소리로 답했다.

아이의 답은 쉽사리 이해하기 어려웠다. 먹으면 안 된다고 했다니. 이건 분명 에르젠에게 누군가가 케이크를 먹지 말라 협박했다는 것이 아닌가. 사방으로 떨리는 에르젠의 푸른 눈에 이즈카엘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