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마님께서 나가시면 도련님이 절 좀 도와주세요. 이대로 쫓겨날 수 없어요.”
집사조차 릴리를 탐탁지 않아 했다. 이대로 샬럿이 쫓겨난다면 그녀 또한 머지않은 시일에 이곳에서 강제로 나가야 할 것이다. 주방이나 빨래방으로 가는 선택지가 있을 수도 있겠지만, 가능하다 해도 원치 않았다. 애초 샬럿의 편에서 다른 이들을 괴롭힌 이유가 무엇인데. 릴리에게는 돈이 절실했다.
“저한테는 도련님만 한 남동생과 아픈 어머니가 계세요.”
어미가 쫓겨나는 판국에 사생아인 아이에게 무슨 힘이 있을까 싶지만 성내 사용인들은 미겔을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아이에게는 아비처럼 감히 거스르기 힘든 분위기가 있었다.
미겔이 릴리를 보다 눈을 반으로 접어 보였다. 아이가 손을 뻗어 릴리의 이마에 손가락을 가볍게 댔다.
“좋아, 릴리. 쫓겨나지 않게 해 줄게. 대신 약속 하나 할래?”
“뭐, 뭐든지요.”
“이대로는 재미없으니 네가…….”
릴리의 눈빛이 서서히 흐려졌다. 미겔이 그녀를 지나치며 스치듯 말했다.
“……어머니를 성심성의껏 도와줘. 뭐든 그녀가 시키는 대로 해 주는 거야. 알았지?”
* * *
헤레이스는 밖에 나와 서성거리다 초조한 눈으로 관목을 바라봤다. 에르젠을 보기는커녕, 에르젠의 소식도 듣지 못한 지 며칠이 지났다.
간혹이지만 식사를 가져다주며 에르젠의 소식을 전해 주던 헬렌이 요 며칠 아예 모습을 보이지 않았으며, 에르젠 없이도 종종 오던 미겔 또한 찾아오지 않았다. 혹 에르젠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닐까 싶어 헤레이스는 그 자리를 뜨지 못한 채 계속해서 바라봤다.
“거기서 뭐 하지?”
그렇게 얼마를 서성였을까. 수풀에 숨어 있던 맹수가 튀어나오듯 뒤에서 갑작스레 사내의 목소리가 들렸다. 헤레이스가 나쁜 짓을 하다 들킨 아이처럼 몸을 움찔거리다 가슴께에 손을 모아 꼭 쥐었다.
“……오랜만이에요.”
헤레이스가 손을 편 후 천천히 몸을 돌렸다. 목소리의 주인은 듣기만 해도 누군지 알 수 있었다. 떨리는 손을 간신히 숨긴 헤레이스가 고개를 숙여 이즈카엘의 시선을 피했다. 그러자 사내의 구두가 가까워진다 싶더니 커다란 그림자가 그녀를 완전히 가렸다.
곧 이즈카엘이 손을 뻗어 헤레이스의 얼굴을 잡아 천천히 올렸다. 긴장감 가득한 푸른 눈이 번뜩이는 금안과 똑바로 마주쳤다.
“……여기에 자주 있다고 들었어.”
“그나마 제대로 하늘을 볼 수 있는 곳이니까요.”
에르젠에 대한 걱정이 뾰족한 말로 나왔다. 헤레이스의 비난 가득한 어투에 이즈카엘의 미간이 구겨졌다. 그가 손아귀에 힘을 한층 강하게 줘 아내의 얼굴을 자신의 쪽으로 당겼다.
“그렇게 말해도 변하는 건 없어. 당신이 선택했잖아. 아이를 가지는 대신 여기 있겠다고.”
“선택? 그런 걸 선택이라고 하나요?”
“난 당신한테 기회를 줬어. 그리고 지금이라도 나갈 테면 나가.”
헤레이스가 황당함을 숨기지 못한 채 이즈카엘을 노려봤다. 하지만 이즈카엘은 담담한 얼굴로 헤레이스를 마주 보다 손을 천천히 뗐다. 싸늘한 침묵이 두 사람 사이의 거리를 메웠다. 잠시 주저하던 이즈카엘은 이내 눈을 내리깔고 말했다.
“……언제든 마음이 바뀌면 말해. 그보다 일주일 뒤면 당신 아들 생일이야. 알고는 있겠지?”
헤레이스의 눈동자에 놀라움이 번졌다. 저는 잊을 리 없지만 눈앞의 사내는 에르젠에게 일말의 애정도 없지 않은가. 그런데 먼저 에르젠의 생일을 입에 올리다니. 헤레이스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이즈카엘을 살피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어요.”
“그날 조촐하게 연회를 열까 해. 나와 기사단, 그리고 성내 사용인들만 불러서.”
“…….”
“선물도 준비해야 할 거 같은데…… 아이가 가장 원하는 건 당신이더군. 당신은 규칙을 지켜야 하니 연회에 초대받지는 못할 거야. 하지만 연회가 끝나고 아이가 이리 와 반나절쯤 당신과 시간을 보낼 수는 있겠지.”
헤레이스의 눈이 이번에는 한계까지 커졌다. 놀란 그녀는 시간이 멈춘 듯 몸을 굳히다 이즈카엘에게 눈빛으로 답을 요구했다. 왜 갑자기 이러냐고.
이즈카엘이 헤레이스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옆으로 틀었다. 그가 바짝 마른 입술을 축이다 한참 만에 답했다.
“당신 아들이…… 나더러 내가 제 아비냐 묻더군.”
“…….”
“그렇다 했어.”
거칠게 숨을 내쉬던 헤레이스가 헉하고 숨을 참았다. 이즈카엘은 헤레이스의 얼굴을 볼까 하다가 용기가 나지 않아 관두고 예정에 없던 날 선 변명을 쏟아 냈다.
“……쓸데없는 착각은 마. 당신의 말을 믿어 그러는 게 아니니까. 세르펜스의 핏줄로 키운다 했잖아. 그러니 당연한 일이야.”
하나 내뱉고 나니 후회가 밀려왔다. 그가 주먹을 세게 쥔 채 눈동자만 굴려 아내를 살폈다. 아니나 다를까, 어느새 푸른 눈에는 눈물과 함께 미움, 원망, 슬픔 등 부정적인 감정이 가득 차 있었다.
왜 그런 눈이야?
예상했음에도 울컥하는 감정을 주체 못 한 이즈카엘이 헤레이스 쪽으로 얼굴을 돌리고 그녀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아니라 말하고 싶은 모양인데, 헤레이스 당신이 부정을 저지른 사실은 명확해.”
어깨가 많이 아플 텐데도 헤레이스는 신음 한번 흘리지 않았다. 다만 그녀는 이즈카엘을 공허한 시선으로 뚫어져라 바라보며 꾹 다문 입술을 파르르 떨 뿐이었다.
“그런 얼굴 마.”
이즈카엘이 긴 한숨을 내쉬더니 헤레이스의 어깨를 놓고 그녀에게 바짝 붙었다. 사내의 손바닥이 그녀의 서늘한 뺨에 닿는다 싶더니, 그는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 줬다.
“……난 날 기만한 당신을 쉽게 용서할 수가 없어. 하지만 이대로는 안 되겠지. 언제까지 이러고 살 수는 없잖아. 당신도, 나도…… 그리고 에르젠도 말이야.”
지난 시간 이즈카엘은 많은 생각을 했다. 하지만 어떤 감정을 떠올리든 헤레이스와 관계를 이대로 둘 수 없음만은 자명했다.
게다가 에르젠 그 아이는……, 아내가 저지른 부정의 산물이라고만 생각했던 아이는 아내를 빼닮아 그런 건지 아니면 저에게 아비냐 물어봐서 그런 건지, 죽일 듯 밉기보다 애틋한 구석이 있었다. 설명할 수는 없었지만 아이에게 묘한 감정과 죄책감을 느낀 그는 자신이 모든 일을 잊고 아내를 용서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난 모든 일을 덮을 생각이야. 당신의 부정도, 도망도 모조리 다. 이른 시일 내 예전처럼 지낼 수 있도록 노력하지. 에르젠도 내 아들처럼 대하겠어. 하지만 대신…….”
“…….”
“……당신도 노력해. 내가 노력하는 것의 반이라도…….”
날 사랑해 줘.
하지 못한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가 흩어졌다.
하지만 그래도 이즈카엘은 괜찮았다. 아내에게 자비를 베풀고 나니 답답함이 반쯤 가셨다. 이대로면 되었다. 어차피 처음부터 제가 끼워 맞춘 관계가 아닌가. 마음의 크기에 있어 그는 자신이 항상 약자였노라고, 그리하여 져 주는 것이 맞다고 속으로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한결 느슨해진 눈매의 이즈카엘과 다르게 헤레이스의 눈은 그새 더 빨갛게 변해 있었다. 당장에라도 떨어질 듯 위태로운 눈물에 이즈카엘의 콧잔등에 주름이 깊게 졌다. 헤레이스가 이즈카엘의 가슴께에 있는 옷깃을 꽉 쥐었다. 그리고 음절마다 힘을 줘 천천히 말했다.
“이제 더는 긴말 않겠어요. 어차피…… 소용없는 걸 말해서 뭐 하겠어요. 하지만 하나만은 꼭 말해야겠어요. 아니면 내가 견디지 못하고 미쳐 버릴 테니까.”
“…….”
“난 이즈카엘 당신이 지금껏 내게 한 말, 행동 하나하나 잊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아니, 영영 기억했으면 해요, 그리고 언젠가는 당신이 꼭…….”
“…….”
“……지금을 부끄러워하고 후회하길 바라요.”
말을 마친 헤레이스가 손에 힘을 풀었다. 그녀의 양 뺨은 그새 눈물로 흥건해져 있었다. 잔뜩 젖은 아내의 얼굴에 이즈카엘이 인상을 구기다, 자신에게서 한 발 뒤로 물러나려는 헤레이스를 붙들었다.
반항할 거라 생각했던 아내는 순순히 그의 손길에 따랐다. 이즈카엘이 헤레이스를 품 안에 끌어안고 하얀 이마를 제 가슴에 기대게 했다. 억눌린 흐느낌과 함께 상의가 축축해짐이 느껴졌다. 그가 아내의 긴 머리채 사이로 손을 집어넣으며 입을 열었다.
“……제길. 울지 마.”
“…….”
“제발…… 울지 마, 헤레이스.”
울음소리는 점차 희미해졌다. 하지만 여인의 들썩이는 몸과 사내의 떨리는 손은 오래도록 제자리였다.
* * *
“괴물이 잭의 엄마를 단번에 삼키려 했어요. 그러자 용감한 잭이 괴물의 앞으로 나와…… 에르젠, 졸려?”
“응, 미겔 형. 나 이제 잘래. 졸려.”
“그래. 그만 자. 이불 덮어 줄게.”
에르젠이 눈을 비비며 침대에 누웠다. 미겔이 이불을 덮어 주고는 머리맡에 앉아 에르젠을 내려다보다가 물었다.
“내일 생일이네. 좋아?”
“응. 한 살 더 먹는 거잖아. 나도 빨리 커서 용감한 잭처럼 괴물을 무찌를 거야.”
말을 그렇게 했지만 에르젠은 무서운 듯 이불을 코 아래까지 끌어당겼다. 그리고 괴물에 대해 잊으려는 듯 미겔에게 되물었다.
“그런데 형은 생일이 언제야?”
“나? 음…… 에르젠 너보다는 빨라.”
“난 형이 케이크 촛불 부는 거 못 봤는데. 나 만나기 전에 한 거야?”
에르젠에게 생일은 케이크를 먹으며 촛불을 부는 날이었다. 에르젠의 질문에 미겔은 곤란한 듯 눈썹을 찌푸리다 비밀을 말해 주는 것처럼 조용히 속삭였다.
“난 올해 생일 때 촛불을 불 수 없어. 너랑 달리 난 사생아거든. 적자가 돌아왔으니 사생아는 조용히 있는 게 관례야.”
“사생아?”
“에르젠, 넌 아직 몰라도 되는 단어야.”
형이나 나나 비슷하면서! 왜 나만 아기 취급이야. 미겔의 말에 에르젠이 순간 울컥해서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런 이유로 생일 때 촛불도 불지 못한다니. 에르젠은 미겔이 불쌍하다고 생각했다.
“사생아……. 그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생일 때 촛불을 불 수 없는 건 불쌍해. 그래도 케이크는 먹을 수 있지?”
“아니. 난 케이크도 먹을 수 없어. 날 위해 준비된 건 없거든.”
“케이크도 못 먹어? 난 항상 엄마가 동그란 케이크에 빨간 열매를 올려 줬는데……. 생일 때는 그걸 먹어야 악마가 물러난다고 그랬어.”
“음…… 그건 거짓말이야, 에르젠.”
“아니야! 엄마가 그랬어. 빨간 열매를 먹으면 악마가 도망간다고.”
에르젠이 말하는 빨간 열매는 로즈베리로, 애초 나무 한 그루당 호두알만 한 열매가 열댓 개밖에 열리지 않았으며, 한 해에 수확 가능한 시기가 늦봄 한 달뿐인 귀한 열매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아니이스 제국에서는 생일날 설탕이나 꿀에 절여 보관한 로즈베리 열매를 먹었다. 생일에 로즈베리 열매를 먹으면 악마를 쫓아낼 수 있고 건강을 가져다준다는 속설이 예전부터 있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