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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목을 꺾는 악마여-57화 (57/108)

57화.

눈물을 꾹 참은 헤레이스가 에르젠을 한참 안고 있을 때였다. 누군가 그녀의 어깨를 톡 쳤다. 눈을 감고 있던 헤레이스가 눈을 떠 상대를 바라봤다.

커다란 금안이 코앞에 있었다. 헤레이스는 기척도 없이 가까이 다가온 아이 때문에 놀라 몸을 움찔거리다 묘한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아이의 호박색 눈은 순수하게 빛났지만 너무도 맑은 그 눈빛은 오히려 기괴한 느낌을 줬다.

‘내가 도와줄까?’

성에 돌아온 날 들었던 목소리가 또 한 번 생각났다. 헤레이스는 뱀을 본 듯 소름 끼치는 감각에 미겔의 눈을 피했다. 그런 헤레이스를 본 미겔이 작게 미소 짓더니 미묘하게 낮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이만 돌아가 봐야겠어요. 스승님께서 일어나실 시간이거든요.”

다가온 이별에 순간 느꼈던 두려움이 흩어졌다. 아쉬움을 숨기지 못한 헤레이스가 신음을 뱉으며 에르젠을 더욱 세게 안았다. 하지만 그녀는 곧 에르젠을 안고 있던 팔에 힘을 풀었다.

에르젠을 만났다는 사실에 기뻐 잊고 있었지만 헤레이스 또한 감시당하는 처지였다.

이즈카엘의 방문이 끊어진 뒤 하녀들은 식사 시간 외에도 하루에도 몇 번씩 티타임이니 간식이니 하는 이유로 그녀의 방에 들어오고는 했다. 헤레이스는 헬렌을 제외하고는 자신에게 어떠한 대꾸도 않는 하녀들의 눈빛 속에 숨겨진 진정한 목적을 알고 있었다.

‘혹여나 들키면 이렇게 만나는 것도 끝이야.’

헤레이스가 미련을 가까스로 떨친 채 에르젠을 떼어 냈다. 아이의 팔을 부드럽게 쥔 그녀가 작별 인사를 위해 아들의 이름을 불렀다.

“에르젠.”

“싫어!”

어미의 표정에 이별을 직감한 에르젠이 날카롭게 외쳤다. 다시금 차오르는 눈물에 눈가가 발갛게 짓무르기 시작했다.

“난 엄마랑 있을래. 에르젠도 여기서 살래. 돌아가기 싫어!”

“…….”

“착하게 있을게. 엄마 말도 잘 듣고 울지도 않을 거야. 얌전히 있으면 되잖아. 그러니까 엄마…… 흑. 에, 에르젠 보내지 마, 응?”

발을 동동 구르며 투정을 부리는 아이의 표정에는 어미와 또다시 떨어진다는 두려움과 절박함이 뭉쳐 있었다. 헤레이스가 자신에게 다가와 안기려는 에르젠을 붙든 채 다정하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착한 우리 에르젠, 오늘은 이만 돌아가고 다음에 엄마랑 또 보자. 응?”

“싫어. 난 엄마랑 있을 거야. 엄마, 에르젠 버리지 마. 엄마. 엄마…….”

전이라면 헤레이스의 단언에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을 아이가 오늘따라 고집을 피웠다. 제게 안기기도 못한 채 눈물을 뚝뚝 흘리는 에르젠이 마음 아파 헤레이스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헤레이스 모자를 뚫어져라 보던 미겔이 팔짱을 풀고 에르젠의 뒤로 가 동생의 허리를 잡았다. 강한 힘도 아니었건만 에르젠은 너무도 쉽게 끌려갔다. 헤레이스는 그 찰나에 에르젠을 빼앗기는 기분이라 저도 모르게 손을 힘을 줄 뻔했다.

“에르젠, 형이랑 뭐라고 약속했지?”

“고, 고집부리면 엄마 못 본다고…….”

미겔에게 잡힌 에르젠이 우물쭈물하다 고개를 푹 숙였다. 미겔은 그런 에르젠의 머리를 쓰다듬더니 손을 잡고 헤레이스에게 바짝 붙었다.

“자, 그럼 인사드리고 가자. 다음에 또 올게요, 부인.”

“엄마, 다음에 또 봐.”

아이의 얼굴에 떠오른 실망감은 그대로였으나 에르젠은 미겔의 말에 순순히 따랐다. 헤레이스가 일부러 더욱더 환하게 웃으며 손 인사를 했다.

“그래, 에르젠. 어서 가.”

에르젠이 통로 구멍 앞에서 마지막으로 주춤거렸다. 헤레이스가 에르젠의 이마에 작별 입맞춤을 하며 아이를 달랬다.

“엄마는 여기 있을 테니까 형 말대로 다음에 또 오면 되는 거야. 알았지? 그리고 미겔…….”

“네, 부인.”

“……형인 네가 에르젠을 잘 돌봐 주렴. 부탁한단다.”

미겔을 에르젠의 형이라 지칭하는 것은 헤레이스로서도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가 아들을 부탁할 수 있는 이는 많지 않았다. 헤레이스는 이기적인 제 마음에 부끄러워하면서도 부탁한다는 듯이 미겔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게 바라는 일이에요?”

미겔이 헤레이스가 내민 손을 빤히 보다 힘주어 꽉 잡았다. 에르젠보다 조금 더 큰 아이의 손에서 어른보다 더한 힘이 나왔다.

손을 서서히 조여 오는 아픔에 헤레이스가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자 미겔이 입꼬리를 길게 올려 미소를 짓더니 손을 한 번에 탁 놓고 몸을 숙였다.

“가자, 에르젠.”

미겔의 재촉에 에르젠이 구멍을 먼저 빠져나가고 미겔도 뒤를 이었다. 헤레이스는 아까와 같이 기이한 기분에 사로잡혔다가, 떠나간 에르젠을 떠올리고는 벽에 손을 가져다 댔다. 벽 너머 아이들이 관목을 헤치고 탁탁 뛰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이 너머에 있겠지.’

헤레이스는 아이들이 사라진 후에도 한참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해가 지고 저녁 식사를 가지고 온 하녀가 그녀를 찾을 때까지.

* * *

방 안은 너무나 컴컴해서 사물들의 형체만 겨우 분간할 수 있을 정도였다. 조금 더 밝았으면 아름다웠을 화려한 가구들과 온갖 사치품들이 어둠에 잠겨 기괴하게 보였다.

미겔은 나이답지 않게 어둠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는 사방을 살피다 침대 밑에 앉아 있는 여인을 발견하고는 천천히 다가갔다.

무릎에 얼굴을 파묻고 있던 여인이 가까운 곳에서 인기척이 나자 고개를 들었다. 긴 금발이 양옆으로 갈라지며 수척해진 얼굴이 드러났다. 샬럿이 자신을 내려다보는 미겔을 보고 물었다.

“……어디 갔다 왔니?”

“…….”

“내가 이 꼴이 되었는데 넌…… 내 아들인 넌 어디 갔다 왔어.”

힘없는 목소리에는 절망이 가득했다. 전처럼 노기조차 드러내지 못하는 모습에 미겔이 픽 웃더니 여인의 앞에 쭈그리고 앉아 시선을 마주했다. 아이의 빨간 입술이 얄밉게 올라갔다.

“에르젠과 공작 부인을 만나고 왔어요.”

샬럿의 멍한 눈에 서서히 초점이 돌아왔다. 그녀가 공작 부인이라는 말을 여러 번 중얼거리다 무언가 깨달은 듯 손가락에서 반지 하나를 뺐다.

“미, 미겔, 넌 그 여자랑 그 여자 아들을 볼 수 있는 거야?”

“…….”

“오, 세상에 내 아가. 내 아들. 그러면 내 부탁 하나만 들어주렴, 응?”

그녀는 갈퀴 같은 왼손으로 아이의 여린 팔을 쥐어뜯듯 붙잡았다. 그러더니 오른쪽 손바닥 위에 있는 반지를 내밀었다. 반지에 박혀 있는 검은 보석이 어두운 방 창백한 손바닥 위에서 반짝였다.

“이걸 가져가서 그 여자하고 그 애새끼한테 먹여! 그것들이 피를 토하고 지금 나처럼 괴로워하다 몸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고통 속에서 죽게 해 줘.”

미겔이 웃으며 반지를 들어 올려 이리저리 흔들었다. 그러자 검은 보석 안의 액체가 찰랑이는 것이 느껴졌다.

신기하다는 듯 반지를 두어 번 더 흔들어 본 미겔은 곧 흥미를 잃었다는 듯 시큰둥한 표정을 지었다. 아이의 손에 들려 있던 반지가 다시 샬럿의 손바닥으로 떨어졌다. 미겔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싫어요.”

“뭐?”

“싫다고요.”

아들의 담백한 거절에 샬럿의 눈앞이 캄캄해졌다. 그럼 누가 그것들을 죽여 줘? 네가 아니면 누가? 나는 별채에 있는 그 여자는커녕, 같은 건물 안에 있는 그 여자 아들을 보지도 못하는데!

샬럿은 자신이 에르젠을 바라보기만 해도 어디선가 나타나는 기사들을 기억했다. 그들의 눈빛은 차가웠고 경계심이 가득했다. 그녀는 그 눈들을 견디기 힘들어했다. 꼭 자신이 전처럼 천한 여자가 돼 경멸받는 기분이었다.

“너! 지금 상황이 파악이 안 돼? 나와 네 자리가 위험해! 그것들이 우리 자리를 차지할 거란 말이야!”

샬럿이 미겔을 거칠게 흔들었다. 아이의 작은 몸이 어미의 손짓에 따라 맥없이 흔들리다 뒤로 무너졌다. 덕분에 엉덩방아를 찧고 주저앉은 아이가 샬럿을 올려다봤다. 제가 저지른 일이건만 당황한 샬럿이 무릎걸음으로 미겔에게 다가가 목소리를 낮췄다.

“이, 이대로 빼앗길 수는 없잖니.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데…….”

“…….”

“그런 얼굴 하지 마. 내가 쫓겨나면 넌 어찌 되겠어? 귀족들은 사생아에게 자비롭지 않아. 그래서 내가 이러는 거야. 널 위해서! 아들인 너를 공작으로 만들어 주려고!”

“…….”

“그러니 미겔, 이 어미 말을 들으렴. 이것들을 가지고 가서…….”

미겔이 제게 내밀어진 샬럿의 손을 살짝 밀치며 몸을 일으켰다. 샬럿을 내려다보는 아이의 눈은 이미 흥미를 잃은 장난감을 보듯 서늘했다.

“조금 전에도 말했지만 싫어요. 어머니 부탁은 들어줄 수 없어요.”

그가 자신의 부탁을 절대 들어주지 않을 것을 깨달은 샬럿의 녹안에 억울함이 넘실거렸다. 낙담한 그녀가 아들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내게 왜 이러냐는 듯 말없이 물었다. 미겔이 어미의 물음에 순순히 답해 줬다.

“공작 부인이 제게 친히 부탁했거든요. 에르젠을 잘 돌봐 주라고. 그리고 전 어머니보다 공작 부인이 더 마음에 들어요. 그래서 그분 부탁을 우선시하고 싶어요.”

답을 들은 샬럿의 눈이 커질 대로 커졌다. 믿을 수 없는 사실을 마주한 그녀가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제가 왜 어머니가 아닌 그녀 편을 드냐고요?”

샬럿의 표정을 본 미겔이 예쁘게 미소를 지었다. 아이가 억울한 어미의 눈동자를 보다가 천진난만하게 말을 이었다.

“공작 부인은 모든 면에서 어머니보다 훨씬 낫잖아요. 외모도, 성품도……. 그녀는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고귀한 여성이에요. 누구와 다르게. 어머니는 이런 옷을 입어도, 저런 물건을 써도 그녀처럼 될 수 없어요.”

다정한 말씨와 다르게 나오는 단어 하나하나가 샬럿의 가장 밑바닥을 찔렀다. 샬럿이 고개를 저으며 제 머리를 쥐어뜯었다.

“……아니야.”

“…….”

“아니라고! 아니야!”

“……전 착한 아이라 이만 잠자리에 들어야겠어요. 그러니 어머니도 이만 주무세요.”

미겔은 발작하는 어미를 보다 가볍게 몸을 돌렸다. 그런 아이의 등 뒤에서는 계속해서 비명에 가까운 고함이 터져 나왔다.

“도, 도련님…….”

문을 열고 나온 미겔의 앞에는 샬럿의 하녀 릴리가 나타났다. 그녀가 방문을 두려운 눈으로 바라보다 미겔의 앞에 무릎을 털썩 꿇었다.

“마, 마님께서 그러니까…….”

샬럿이 쫓겨난다는 소문은 이미 기정사실이 되어 성 곳곳에 퍼져 있었다. 그동안 샬럿에게 시달렸던 성안 사용인들은 그녀의 추방을 내심 기뻐하며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사용인들이 벼르고 있는 상대는 하나 더 있었으니. 바로 릴리였다. 그녀는 샬럿의 앞잡이 노릇을 하며 성내 많은 이들에게 미움을 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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