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샬럿은 후들거리는 다리를 간신히 지탱한 채 양손을 입으로 가져가 손톱을 뜯었다. 딱딱, 이 부딪치는 소리가 규칙적으로 난다 싶더니 피가 났다. 혀끝에 닿는 비릿한 맛에 샬럿이 몸을 떨다가 아니라는 듯 고개를 거칠게 내저었다. 그녀는 이내 고래고래 고함치기 시작했다.
“아냐. 틀렸어! 아니야! 난 미겔의 어미야!”
“…….”
“미겔은 내가 당신한테 씨를 받아 낳은 내 아들이란 말이야!”
“…….”
“공작님! 이즈카엘! 나를 봐요! 난 당신 아들의 어미라고요! 날 이렇게 내치면 미겔은 어찌 살아! 미겔을 봐서라도 제발…… 아이는 어미 없이 살 수 없는 거잖아!”
“……할 수 있으면 데리고 가. 그렇게만 된다면 더 바랄 게 없겠군.”
거의 절규하다시피 애원하는 샬럿에게 이즈카엘이 나지막이 읊조렸다. 말문이 막힌 샬럿이 턱을 파르르 떨며 말을 더듬었다.
“뭐, 뭐라고요? 지금 뭐라고…….”
“그렇게 애타면 황금과 그것을 챙겨 나가라 이 말이다. 네가 그렇게 할 수만 있다면 이 방을 채울 만큼, 아니 그 열 배가 되는 황금도 기꺼이 주지.”
“…….”
“하지만 못 할 테지. 애초 할 생각도 없을 테고.”
사실이었다. 이 성에 있지 못하면 아들이 무슨 소용일까. 돈이 많아 봤자 아비에게 내쳐져 후계자가 되지 못한 아들은 그녀를 공작 부인으로 만들어 주지 못했다.
“난 네가 무슨 망상을 하든 거기에 맞춰 줄 생각 따위 없다. 그러니 이만 조용히 나가.”
샬럿은 이즈카엘과의 거래에 응한 뒤 너무도 쉽게 그것의 속삭임에 넘어갔다. 처음에는 진정으로 그의 아이를 임신했다 착각하더니, 짧은 시일 사이에 망상이 커져 걷잡을 수 없었다.
이즈카엘 입장에서야 샬럿이 무슨 착각을 하든 크게 상관없었다. 하지만 그는 마지막 순간 그녀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줬다. 샬럿에게 무관심한 것과 별개로 그녀가 그것과 엮인 데에는 분명 그의 책임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까도 말했지만 약속대로 그동안의 노고에 대한 값은 충분히 치러 주마. 그리고…….”
“어, 어떻게…….”
“……이쯤에서 황금을 챙겨 멀리 떠나는 게 네게도 좋겠지.”
“내게 어떻게 이럴 수 있어! 당신이 날 어떻게 버릴 수 있어!”
샬럿은 이즈카엘이 처음으로 그녀에게 내민 호의를 걷어찼다. 날카로운 목소리가 점점 더 커졌다. 하지만 그녀가 악다구니를 쓸수록 그날의 기억은 더더욱 선명해졌다.
‘황금 외 어떤 것도 바라지 마. 그게 조건이야.’
‘그게 무슨…….’
‘내가 널 귀애한다거나 아낀다거나 할 일은 없다는 말이다. 널 안을 일도, 만질 일도 없을 거다. 넌 단지 연기를 하는 거야. 공작 부인도 무시할 만큼 내게 총애를 받는 정부를.’
‘그, 그럼 아이를 어떻게 가져요? 아까 분명 공작님 아들의 어미 노릇을…….’
‘……네 아들 노릇을 할 그것에 관해서도 설명하지.’
‘그것?’
‘네 아들 노릇을 하는 건 사람이 아니야. 보통은…… 악마나 괴물, 그런 것들로 불릴 만하지.’
묻어 뒀던 기억들이 머릿속에서 부유했지만 그녀가 생각하기에 그것들은 모조리 거짓이었다. 그녀는 눈앞에 있는 사내의 애정을 받아 이 자리까지 왔다. 사내의 후계자가 될 아이를 낳았고, 사내의 옆자리에 설 자격을 얻었다.
‘……이상이다. 내 설명은 여기서 끝이야. 선택은 네가 하도록 해.’
‘…….’
‘싫다 해도 상관없어. 네게도 하나뿐인 목숨일 테니까. 보통은 저런 것과 엮이고 싶지 않겠지.’
‘……하겠어요.’
‘…….’
‘한다고. 내가 할 거야. 황금을 준다며. 그리고 그게 뭐가 됐든 당신 아들의 어미 노릇을 하는 거잖아. 그럼 날 모시는 사람들도 생기겠지?’
계속해서 떠오르는 잔상에 샬럿이 이를 악물다 퍼뜩 한 사람을 떠올렸다. 그래. 지금 이 상황은 모조리 다…….
“그 여자 때문이지? 그 여자 때문에 나를! 죽여 버릴 거야! 당장 그 여자와 그 애새끼를 죽여 버릴 거라고! 두 것들 다 죽인 다음 씹어 삼켜 버릴 거야!”
샬럿이 말하는 이는 분명했다. 헤레이스가 언급되자마자 무료한 표정이었던 이즈카엘의 얼굴에 살기가 어렸다.
그가 의자를 밀고 일어났다. 거대한 사내가 주는 위압감이 분위기와 더해져 무시무시했다. 하지만 이성이 날아간 샬럿의 눈에 그런 것이 들어올 리 없었다. 그녀는 위험을 감지 못한 짐승처럼 이즈카엘에게 삿대질을 하며 고함을 질렀다.
“그게 얼마나 잘났어? 기껏 해 봤자 얼굴 좀 반반한 반역자의 여식이잖아! 그건 나보다도 천해! 지금쯤 감옥에서 죄수들에게 다리나 벌릴 계집이! 게다가 내 아들이 먼저 태어났고 당신을 훨씬 더 닮았어! 그러니 내가 그 여자보다 위야! 그런데 왜 그 여자는 공작 부인이고 난!”
제정신이었다면 샬럿은 진즉 멈췄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지금 반쯤 미쳐 있었다. 그녀가 말을 쏟아 낼 때마다 이즈카엘의 표정이 한층 더 음울해지더니 종국에 그가 허리춤에 손을 가져갔다.
“……신경 쓰기 싫어 그냥 뒀더니 실수였군. 하긴 예전부터 몇 번이고 시키지도 않은 짓을 하기는 했지. 주제도 모르고.”
날카로운 검이 예기를 뿌리며 모습을 드러냈다. 샬럿은 서늘한 검날을 마주한 후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이즈카엘의 손속에는 머뭇거림이 없었다. 하얀 검날이 순식간에 샬럿에게 훅 다가왔다.
“오, 오지 마! 다가오지 말라…… 아악!”
검을 피해 뒷걸음질 치던 그녀가 균형을 잃고 주저앉았다. 파랗게 질린 채 어깨를 잔뜩 움츠린 모습이 가여울 법도 했다. 그러나 이즈카엘은 조금의 주저 없이 샬럿의 목에 검 끝을 들이댔다.
“지금까지는 필요하다 싶어 봐줬지만 이 이상 내 아내를 모욕하면 당장 목을 베겠다. 목이 잘린 채 황금관에 처박힐 테냐, 아니면 조용히 나갈 테냐.”
목에 바짝 닿은 검이 피부를 얇게 가르고 붉은 선을 만들어 냈다. 코앞에 닥친 죽음에 샬럿이 동전 뒤집듯 태도를 바꿨다. 그녀는 제 거친 숨결에 혹여나 검이 닿을까 숨을 참으며 이즈카엘에게 빌기 시작했다.
“나, 나가…… 흐읍. 나가겠어요. 나간다고요. 나갈게요.”
“…….”
“일, 일주일 안에 떠, 떠날 테니까 제발 그 검 좀 치, 치워…….”
샬럿을 내려다본 이즈카엘이 성마른 눈으로 검을 거둬들였다. 검이 길게 원을 그리며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자 샬럿이 참고 있던 숨을 내쉬었다. 쉴 새 없이 떨리는 눈동자와 오르락내리락하는 상체가 그녀의 두려움을 잘 보여 줬다.
“이야기가 끝났으면 나가지. 준비가 끝나는 대로 여기 제임스에게 말하도록. 기왕이면 최대한 빨리 나갔으면 좋겠군.”
다시 책상에 앉아 펜을 집어 든 이즈카엘이 축객령을 내리며 문가에 서 있던 보좌관 쪽으로 손짓을 했다.
“일어나십시오.”
“…….”
방에서 발생한 일련의 일에도 눈썹 한번 움직이지 않던 제임스가 샬럿을 일으켜 세운 뒤 방문을 열고 내보냈다.
예의 없는 동작은 아니었으나 배려도 없는 사무적인 태도에 샬럿이 주먹을 꽉 쥐었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더는 난동을 부릴 힘도, 의지도 남아있지 않았다.
샬럿이 쫓겨나자 이즈카엘이 제임스를 향해 다시 손짓했다. 그는 가까이 다가온 보좌관을 쳐다보지도 않은 채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허튼짓 못 하게 철저히 감시해.”
“예. 알겠습니다.”
* * *
“에르젠!”
“엄마!”
헤레이스는 작은 몸의 에르젠이 구멍을 통과하여 나타나자마자 그를 꽉 끌어안았다. 에르젠 또한 반갑기는 마찬가지인지라 아이는 어미를 보자마자 힘차게 몸을 튕겨 그리웠던 품을 파고들었다. 감동적인 상봉에 에르젠을 뒤따라온 미겔이 조용히 모자를 지켜봤다.
그녀는 미겔의 존재는 눈치조차 채지 못한 채 에르젠을 살피기에 바빴다. 몇 주 못 봤을 뿐이었지만 그녀가 보기에 아이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에르젠, 어디 아프니? 누가 널 괴롭혀?”
적당히 살이 오른 뺨에, 아이가 걸치고 있는 옷은 전과 비교할 수 없이 좋았다. 하지만 아들의 얼굴 가득히 진 그늘에 헤레이스는 마음이 아팠다.
에르젠은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괜찮다는 듯 배시시 웃어 보이더니 제 얼굴을 잡은 헤레이스의 손바닥에 얌전히 뺨을 비볐다.
“보고 싶었어, 엄마. 나 엄마가 엄청 보, 보고…… 흐아앙.”
아이는 아이였다. 어미가 걱정할까 의젓하게 굴던 것도 잠시였다. 한참 어리광을 부리던 에르젠은 말을 하다 감정이 북받쳐 올랐는지 울먹인다 싶더니 울음을 터뜨렸다. 그 모습에 헤레이스 또한 꾹 참고 있었던 눈물을 보였다.
“이런, 에르젠. 뚝 그쳐야지.”
지금껏 가만있던 미겔이 재빠르게 다가와 헤레이스에게서 에르젠을 떼어 내고 아우의 입을 막았다. 그리고 헤레이스를 바라보며 곤란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시겠지만 몰래 온 거라서요. 밖으로 소리가 새어 나가면 곤란해요.”
“……미안해. 그보다 아직 인사도 못 했구나. 잘 지냈니, 미겔?”
그제야 미겔을 인지한 헤레이스가 겸연쩍은 얼굴로 인사를 했다. 헤레이스의 시선이 자신에게 닿자 미겔이 과장되게 허리를 굽혔다.
“물론이죠, 부인.”
“정말 고마워. 에르젠을 데리고 오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아니에요. 그보다…….”
“엄마!”
미겔이 환하게 웃으며 헤레이스에게 말을 하자 에르젠이 제 입을 막고 있는 미겔의 손을 뿌리치고 헤레이스에게 매달렸다. 미겔에게 어색한 미소를 보이던 헤레이스가 정신을 차리고 무릎을 굽혀 에르젠과 시선을 마주했다.
“그래, 우리 에르젠.”
아이를 어르는 손짓이 다정했다. 헤레이스는 한 손으로는 에르젠의 얼굴을 쓸며 눈물 자국을 지워 주고, 다른 한 손으로는 아이의 등을 살살 토닥거렸다.
“울지 마. 응? 에르젠이 울면 엄마도 슬퍼.”
“응.”
여전히 훌쩍이고 있던 에르젠이 고개를 주억거리더니 헤레이스의 뺨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 쪽 하는 소리와 함께 말랑한 아이의 입술이 길게 닿았다가 떨어졌다. 해 달라 할 때는 부끄럽다고 해 주지도 않더니……. 헤레이스가 아들의 이마에 짧게 입맞춤하며 웃었다.
“이제 어디 가지 마. 에르젠이랑 같이 있어.”
성에 돌아오기 전까지만 해도 호기심에 가득 차 뛰노는 것을 즐기던 아들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에르젠은 아기처럼 헤레이스에게 달라붙어 떨어질 생각을 안 했다.
헤레이스는 제 옷자락을 꼭 쥔 손이 지나친 힘에 하얗게 질린 것을 보고 순간이지만 숨을 멈췄다. 그리고 에르젠이 아프지 않을 한도 내에서 온 힘을 다해 팔에 힘을 줬다.
‘에르젠, 내 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