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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목을 꺾는 악마여-55화 (55/108)

55화.

쉬고 있으면 머리가 더 지끈거렸다. 때문에 이즈카엘은 쉴 새 없이 일했다. 평소 맡겨 뒀던 영지와 성내 일도 제 눈으로 한 번 더 꼼꼼하게 살폈고, 기사들의 훈련도 전보다 배는 자주 참관했다. 덕분에 그 아래서 일하는 이들의 피로도는 한층 커졌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아우뉴 호수 인근 마을을 담당하는 관리자는 서류 뭉치 여기저기에 그어진 잉크 자국을 보며 퀭한 낯을 했다. 상전은 전에도 까다롭고 꼼꼼한 편이었지만, 최근에는 거의 결벽에 가까울 정도로 업무에 높은 완성도를 추구했다.

“나가 봐.”

“예. 그럼 다시 정리해 올리겠습니다.”

깍듯이 허리를 숙이는 관리의 목소리가 조금 떨렸으나 이즈카엘은 신경도 쓰지 않은 채 다시 펜을 들었다. 곧 잉크와 종이 특유의 건조한 내와 함께 서걱거리는 소리만이 집무실을 가득 채웠다.

완연해진 봄 햇살이 창 너머로 건너와 제법 긴 시간 동안 이즈카엘의 등을 데웠다. 하지만 그는 창밖에 펼쳐진 녹음에는 일말의 시선도 주지 않았다. 이즈카엘은 한참 서류를 읽고 서명을 하다 잉크가 다 떨어지고서야 고개를 돌려 거의 저물어 가는 해를 바라봤다.

아주 잠깐 긴장을 놓았을 뿐이건만 푸른 눈이 그 틈을 순식간에 파고들었다.

이즈카엘은 별채에 있는 헤레이스와 성에 머무는 에르젠을 생각하며 눈을 질끈 감았다. 어떻게든 결정하고 해결할 수 있는 일과 다르게 헤레이스 모자와의 관계는 해결책이 보이지 않았다.

숨구멍이 틀어막아지다 못해 폐가 굳는 기분이었다. 이즈카엘은 거칠게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방 한편에 마련된 장식장에서 술병을 집어 들었다.

호박색 술이 후각을 마비시키는 향과 함께 목구멍으로 넘어갔다. 식도를 태워 버릴 듯 독한 술이 들어오자 숨통이 조금은 트였다.

술을 거의 반병 들이켠 이즈카엘이 책상으로 돌아와 서류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하지만 그의 머릿속을 차지한 모자는 술기운으로도 쫒아낼 수 없었다. 그가 양손으로 지끈거리는 이마를 괴고 눈을 감았다.

‘그러니까 아저씨는 우리 아빠가 아니야!’

순간 에르젠에게 느낀 감정은 분명 미움이나 분노는 아니었다. 이즈카엘은 자신에게 소리치는 작은 아이가 측은했고 또 애틋했다. 그것도 많이.

‘아내가 저지른 부정의 산물.’

아이에게 지니고 있던 감정들은 온통 부정적인 것들뿐이었다. 심지어 그는 자기 자신을 보호할 수도 없는 자그마한 아이에게 지독한 살심마저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왜 이제 와서…….’

그를 밉다고 말하는 아이를 안았던 것이 떠올랐다. 아이는 눈으로 봤던 것보다 더 작고 말랐었다. 이즈카엘은 제 한쪽 손에 겨우 들어차던 아이의 자그마한 머리와 서러운 울음소리를 기억하며 미간을 찌푸렸다.

아이를 처음 안아 본 것도 아니다. 도망친 헤레이스를 끌고 오며 아이를 아내의 품에서 몇 번이고 떼어 내 안았던 것이 그였다.

‘……헤레이스와 닮아 그런가.’

이즈카엘은 풀지 못할 수수께끼에 매달린 사람처럼 굴다가, 결국 그나마 제가 납득할 수 있는 이유를 억지로 갖다 붙였다. 며칠째 같은 짓의 반복이었지만 어쩌겠나, 도무지 답을 모르겠는데.

아이에 대한 생각이 어느 정도 끝나자 당연하다는 듯 아내가 떠올랐다. 별채에 가지 않은 지 일주일이 넘은 탓일까. 아내를 그리는 것만으로도 목이 탔다.

반쯤 남아 있던 술이 목구멍을 타고 흘러갔다. 술병이 바닥을 보이고 시야가 어질한 가운데서도 헤레이스의 얼굴은 점점 더 뚜렷해졌다. 선명해지는 아내의 모습과 더불어 간신히 눌러뒀던 마음이 취기를 타고 고개를 들었다.

“헤레이스…….”

에르젠과 달리 헤레이스에 대한 감정은 곧바로 말할 수 있었다.

이즈카엘은 헤레이스가 미웠다. 원망스러웠다. 자신을 배신한 것도, 자신의 아이가 아닌 다른 사내의 아이를 낳은 것도. 그것도 모자라 제 품에서 도망친 것도 모조리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동시에 그녀는 너무도 사랑스러웠다. 그녀는 어떤 짓을 하더라도 제게 사랑으로 각인될 이였다.

그 양면적인 감정이 그를 좀먹었다. 정반대의 감정들은 어느 한쪽도 사그라지지 않은 채 끝없이 충돌했다.

처음 아내의 부정을 마주했을 때는 그리 생각했다. 아내에게 똑같이 상처를 주면…… 정부를 데려오고 다른 여자에게 아이를 보는 척해 그 여린 마음에 생채기를 내면 원망과 미움이 조금은 가실 줄 알았다. 그러나 아내를 괴롭혀 얻은 저열한 희열은 그 부정적인 것들을 아주 잠깐 잊게 할 뿐이었다.

아내에게 행한 그만의 복수는 약을 한 듯 찰나의 쾌락만 주었다. 종국에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자책감과 두려움, 그리고 여전한 미움과 원망이었다.

‘도망치지만 않았어도 지금쯤 다시 예전처럼 지냈을지도 몰라. 솔직히 죄를 고하고 용서를 빌었으면 내가 헤레이스 당신한테 이러지 않았어.’

견디기 힘들어진 이즈카엘은 3년이라는 세월 동안 도망친 헤레이스를 탓해 봤다. 하나 말하면서도 그는 알았다. 이 또한 세상에서 가장 못나고 비겁한 행동임을.

결국 그는 스스로에게 욕을 지껄이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생각하는 말을 내뱉었다.

“……이대로는 안 되겠지.”

그 말을 뱉은 후 이즈카엘은 자조하며 피식거렸다. 알면 뭐 하는가. 어찌해야 할지 대안이 서지 않는데.

처음 이대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을 때 그는 아내에게 제 아이를 가지게 해 그 핑계로 관계를 되돌려 보려 했다. 샤를과 아내 사이에 아이가 있는 것처럼 저와 아내 사이에도 아이가 생긴다면 헤레이스에 대한 분노를 지울 수 있을 거라 생각했으므로.

하지만 헤레이스는 그의 제안을 단호히 거절했다. 게다가 에르젠에 대한 감정이 묘해진 지금에 와서는 그도 이 방법이 썩 내키지 않았다.

도통 떠오르지 않는 해결책에 이즈카엘이 시가를 꺼내 물고 창을 열었다. 해는 그새 사라지고 하늘은 이미 어두컴컴해져 있었다. 그가 숨을 깊게 내쉴 때마다 매캐한 연기가 어둠이 내린 하늘로 흩어졌다.

이즈카엘은 시가를 연거푸 피우며 생각에 잠겼다. 총 네 대의 시가가 불에 타 사그라들었다.

해가 진 뒤의 공기는 급격히 싸늘해졌다. 이즈카엘은 창을 닫고 다시 책상에 앉으려다 창틀에 쌓인 재를 발견하고는 물끄러미 바라봤다.

가벼운 재는 가느다란 바람에도 쉽사리 쓸려 갈 듯 약해 보였다. 홈이 깊은 창틀이 아니었다면 진즉 바람에 날려 사라졌으리라.

이즈카엘이 홀린 듯이 재를 툭 건드렸다. 손가락이 닿기 무섭게 잿빛의 가루는 흩어졌다.

작은 흔적조차 남지 않은 자리를 한참 응시하던 이즈카엘이 얼굴을 구겼다. 그가 몸을 돌려 밖에 있는 보좌관을 불렀다.

“……들어와.”

* * *

“안 됩니다.”

“놔! 놓으라고!”

“각하께서는 지금…….”

“내가 할 말이 있다고! 미겔의 어미인 내가 공작님께 직접 할 말이 있단 말이야!”

짝!

이른 오전부터 집무실 앞이 소란스러웠다. 이즈카엘은 날카로운 여자의 비명에 인상을 찌푸리다 뺨을 때리는 파공음에 보좌관 중 하나를 불러 고함지르는 이를 데려오게끔 했다.

“이즈카엘!”

보좌관이 나가자마자 샬럿이 씩씩거리며 문을 열었다. 우아하게 말아 올렸을 금발은 여기저기 흘러내려 어수선해 보였으며, 드레스는 실랑이로 잔뜩 구겨졌지만 샬럿은 제 외관에 신경 쓰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의 귀에 들어온 여러 소식으로 미치기 직전이라 다른 곳에 주의를 기울일 틈이 없었다. 샬럿은 이즈카엘이 집무를 보고 있는 책상에 바짝 다가가 독기 오른 목소리로 빠르게 말을 뱉었다.

“뭔가 착오가 있는 것 같아요. 지금 성내에서 준비하는 생일 연회의 주인공이 미겔이 아니라니요.”

생일 연회를 준비하고 있다는 하녀의 말에 미겔의 생일을 기억해 낸 것이 시작이었다.

샬럿은 아들의 생일 연회 준비가 잘 진행되고 있는지 살필 겸 준비가 한창인 1층으로 갔다. 그리고 그녀는 거기서 연회의 주인공이 에르젠임을 알고 한바탕 난동을 부렸다.

하지만 진정으로 심각한 일은 그다음 일어났으니…….

“말도 안 되는 일이라 그 늙은이에게 따지러 갔더니 공작님 당신 부하가 와서 뭐라 했는지 알아요? 날 더러…… 감히 날 더러…….”

“…….”

“이 성에서 나가래요! 그것도 일주일 내로! 당신 명이라면서!”

생각만으로도 분이 치솟는지 샬럿이 드레스를 거의 찢을 듯이 거칠게 잡고 발을 굴렀다.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이 당장에라도 터질 것처럼 그녀는 열을 냈다.

그러나 이즈카엘은 샬럿의 말에도 손에서 펜을 놓지 않았다. 그가 서류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덤덤한 어투로 말했다.

“정확히 전해진 말인데 왜 그러지?”

“뭐, 뭐라고요?”

“들은 그대로야. 일주일 내로 성에서 나가. 약속한 황금과 여비, 마차를 준비하라 이르지. 어디로든 떠나. 그리고 다시는 이곳에 오지 않았으면 좋겠군.”

날씨를 말하는 것과 다르지 않은 무감한 어투였다. 샬럿은 이즈카엘의 말에 믿을 수 없다는 듯 멍한 얼굴을 하다 참지 못하고 책상을 내리쳤다.

쾅!

“내 아들이 이즈카엘 당신의 후계자야! 그런데 나보고 나가라고? 그게 말이 돼?”

충격에 펜이 흔들렸고, 아무렇게나 선이 죽 그였다. 위치를 벗어난 잉크에 이즈카엘이 미간을 좁혔다.

그가 펜을 내려놓고 차가운 눈으로 샬럿을 봤다. 뼛속까지 전해지는 냉기에 샬럿이 침을 삼킨 뒤 조금 전보다 작아진 목소리로 더듬거리며 소리쳤다.

“날 여기 뒀잖아! 당신 옆에! 당신 아들의 어미로 날…… 나를…….”

“…….”

“내, 내가 필요 없었으면 진작 내쳤을 거잖아. 하지만 공작님, 당신은 날 여기 오래도록 뒀잖아요. 그건 날 당신 옆자리에 두려 그리한 거 아니에요?”

거칠게 숨을 내쉬며 손을 파들파들 떠는 샬럿은 꼭 평생 함께한 반려자에게 배신을 당한 것처럼 굴고 있었다. 불안정하게 떨리는 녹색 눈동자가 아니라고 답하라는 듯 소리 없이 말했다. 하지만 이즈카엘은 아무 감정 없는 눈으로 샬럿을 훑어볼 뿐이었다.

“내가 널 이 성에 오래 둔 건 사실이지. 하지만 뭔가 착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우리 거래에서 황금 외 네게 주겠다고 약속한 게 있었나?”

이즈카엘의 말에 저 아래 깊숙이 묻어 뒀던 기억이 물방울 튀듯 퐁 하고 올라와 샬럿의 머릿속을 헤집었다.

‘그때 그리 잔인하게 벌주시더니 왜 다시 부르셨나요?’

‘충분한 황금을 주마. 대신 나와 한 가지 거래를 하지.’

‘거래라면…….’

‘내 정부이자 내 아들의 어미 노릇을 해 줬으면 해. 다만…… 조건이 있다.’

‘……조건?’

이렇게 선명한 기억을 자신은 어떻게 잊고 있었는지. 그녀로서도 알 수가 없었다.

그날 밤의 대화와 상황을 기억한 샬럿의 얼굴이 이제는 새파랗게 변했다. 그녀가 두려움 가득한 얼굴로 괴물 보듯 이즈카엘을 노려봤다. 샬럿의 일그러진 표정에 이즈카엘이 성가시다는 듯이 한숨을 쉬고는 다시 펜을 잡았다.

“……보아하니 기억이 없는 것도 아닌 것 같은데, 약속한 보상을 받고 그만 성에서 나가.”

사내의 시선이 다시 종이 위로 옮겨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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