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목을 꺾는 악마여-54화 (54/108)

54화.

‘저 아이는…….’

미겔을 알아본 헤레이스가 경계 어린 시선으로 주춤거렸다. 하나 흙투성이 미겔은 세상 무해한 웃음을 보이며 입 모양으로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헤레이스는 한참 망설이다 아이가 있는 밖으로 갔다. 유리온실 밖의 높은 담은 여전하여 한낮임에도 그림자를 짙게 드리우고 있었다.

‘이 높은 담을 넘었을 리는 없고…… 혹시?’

흙이 잔뜩 묻은 아이를 훑어본 헤레이스가 혹여나 담에 틈이라도 있나 살피다가 이내 주저하며 아이에게 물었다.

“……여긴 어떻게 들어왔니?”

“인사부터요. 전 미겔이라고 해요. 처음 뵙는 건 아니지만 인사드리는 건 처음이죠? 안녕하세요, 부인.”

나이답지 않게 어른스럽고 당돌한 태도였다. 헤레이스는 아이의 언어 구사 능력에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무리 아이마다 편차가 있다지만 아직 다섯이 채 되지 않은 아이가 저리 말하는 것이 가능할까? 듣고도 믿을 수 없었다.

“스승님들께서는 제가 또래에 비해 배움이 빠르다며 자주 칭찬하세요.”

헤레이스의 속마음을 짐작이라도 한 듯 아이가 웃으며 말했다. 헤레이스는 어쩐지 좀 께름칙한 기분이 들었다.

‘에르젠 또래의 아이잖아. 내 감정이 나쁘다 해서 아이에게 이런 마음을 티 내서는 안 돼. 에르젠만큼 어린아이잖아.’

애초 아이와 그녀는 편할 수 없는 사이였다. 헤레이스는 제 감정 때문에 어른스러운 아이를 괜스레 나쁘게 보고 있다 판단하고 입술을 내리 물었다. 그녀가 서늘해지려는 표정을 애써 감춘 채 덤덤히 인사를 받았다.

“그래. 인사가 늦었구나. 난…….”

“알고 있어요. 에르젠의 어머니시죠? 에르젠하고 닮으셔서 바로 알아봤어요.”

하지만 겨우 억누른 마음은 아들의 이름을 듣는 순간 무너지고 말았다. 헤레이스가 미겔에게 한 발자국 다가갔다.

“에르젠을 알아?”

“네! 아주 잘 알아요. 귀여운 동생인걸요.”

미겔의 말에 분노와 서글픔, 그리고 동시에 안도감이 들었다. 헤레이스 그녀 자신조차 판단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이 폐부를 휘젓다가 심장을 찔렀다. 그녀는 그 고통을 느끼고 굳은 얼굴로 아이를 내려다봤다. 이즈카엘과 닮아도 너무 닮은 얼굴이 그녀에게 눈을 휘어 가며 예쁘게 웃고 있었다.

‘에르젠은…… 나와 에르젠은…….’

그와 꼭 빼닮은 얼굴을 보니 미움이 솟구쳤다. 에르젠은 그의 아이로 인정조차 못 받고 있는데 저 아이는 그와 똑 닮은 얼굴로 에르젠이 가졌을 모든 것을 누리고 있었다. 헤레이스는 저도 모르게 속으로 아이를 향한 감정을 뱉어 냈다.

‘미워.’

그러나 그녀는 아이를 향한 제 감정을 인지하자마자 얼굴을 붉혔다.

자신의 마음이 어떻든 이 아이에게 무슨 죄가 있겠는가. 지금 그녀와 에르젠이 처한 상황의 원인은 이 아이가 아니었다. 가장 미워하고 원망해야 할 상대는…… 이 아이와 닮은 사내였다.

‘나와 에르젠에게 고통을 준 건 그 사람이야. 이 아이가 태어나 내게 고난을 주겠다 말한 것도 아닌데…… 이러면 못써.’

헤레이스가 아이에게서 다가갔던 한 발을 다시 물렸다. 그러자 미겔이 호박색 눈을 한결 더 반짝이며 그녀에게 한 발 다가섰다.

“처음 봤을 때도 느꼈지만 정말 아름다우세요. 저기 있는 조각상만큼이나요. 아주 많이 닮으셨어요.”

헤레이스가 미겔의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돌렸다. 아이가 가리키고 있는 것은 유리온실 안 긴 머리의 분수대 조각상이었다. 헤레이스가 조각상을 보고 저도 모르게 픽 웃었다. 누가 봐도 조각상과 그녀는 별로 닮지 않았다.

“난 눈요정과 별로 닮지 않았는걸. 그래도 칭찬 고마워.”

곡선이 조화를 이루어 전체적으로 유약하고 부드러운 인상의 헤레이스와 달리, 조각상은 조금 무서울 정도로 서늘하고 인간 같지 않은 인상을 풍겼다. 그도 그럴 것이 조각상은 북부의 전설 속에 나오는 인외의 존재를 조각한 것이었다.

눈요정. 북부에서는 눈마녀라 불리는 조각상은 그 이름이 알려 주듯 차갑고 오만해 뵈는, 함부로 다가가기 힘든 미인의 표상이었다.

“눈요정이 아니라 눈마녀예요. 눈요정은 과거 중앙에서 북부의 전설인 눈마녀를 약하고 여리게 표현하기 위해 불렀던 멸칭에서 유래했다 들었어요. 북부의 진정한 역사를 알고 있는 자긍심 강한 북부 사람이라면 눈마녀라 불러야 한다고 생각해요.”

미겔이 헤레이스의 말에 인상을 살짝 찌푸리더니 또랑또랑한 목소리를 냈다. 고맙다며 작게 미소를 짓고 있던 헤레이스는 아이의 깊은 지식에 또 한 번 놀라고 말았다.

신성 전쟁 이후 마녀라는 단어 자체가 매우 나쁘게 쓰이는 지금에야 북부에서도 눈요정이라는 단어를 더 많이 쓰지만, 자긍심 깊은 북부 가문 중 일부는 아직도 자손들에게 눈요정을 눈마녀라 불러야 한다고 가르치고는 했다.

“공부를 많이 했구나. 스승들에게 칭찬을 많이 받았겠어.”

“이건 아버지께서 가르쳐 주셨어요. 눈요정이라 불러도 된다고 하셨지만 전 눈마녀라는 단어가 더 좋아요.”

헤레이스는 칭찬이 기쁘다는 듯 얼굴을 붉히는 미겔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려다, 이즈카엘에게 배웠다는 말에 양손을 모아 잡았다. 그녀가 에르젠을 생각하며 씁쓸한 얼굴로 물었다.

“이즈카……, 아니 아버지가 그런 것도 알려 줬니?”

헤레이스의 말에 아이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아이가 제 은발을 만지작거리며 수줍게, 그러나 확신하는 목소리로 답했다.

“네. 아버지는 누구보다 저와 가까운 사이니까요. 많은 가르침을 주세요.”

“……널 많이 아끼는 모양이야.”

아이의 답을 들으며 헤레이스는 깨달았다. 자신이 에르젠의 어미인 이상 자신은 영원히 진심으로 이 아이를 좋아할 수 없으리라. 지금처럼 미워하는 마음을 꾹 숨긴 채 대하는 것이 최선이겠지.

전대 공작의 사생아인 이즈카엘을 미워하던 율리스 황녀가 생각났다. 전에는 이즈카엘을 죽일 듯이 미워하며 구박하던 그녀가 심하다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자신보다 그녀가 나았다. 그녀는 적어도 솔직했으니까.

‘옹졸한 마음이야. 하지만 더는…….’

이 이상 미겔을 보기 힘들다고 판단한 헤레이스가 아이를 돌려보내기 전 마지막 질문을 했다.

“그런데 미겔, 아까도 물어봤지만 여기는 어떻게 들어왔니? 입구가 없었을 텐데.”

“여기는 아주아주 오래전부터 제가 있던 곳이에요. 덕분에 전 이곳에 대해서 모르는 게 없어요!”

아이가 양손을 허리에 올린 채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어떠한 의도도 없다는 듯 순수한 얼굴과 해맑은 목소리에 헤레이스가 차마 그게 어디냐 싶어 더는 묻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혹시 제가 어디로 들어왔는지 알고 싶으신 거예요?”

크고 동그란 눈이 순식간에 가느스름해졌다. 목소리 또한 은근한 것이 조금 전과 달랐다. 헤레이스는 문뜩 세르펜스 성으로 다시 잡혀 들어오던 날, 혼절하기 직전에 들었던 목소리를 떠올렸다.

‘내가 도와줄까?’

분명 착각이었을 텐데 기억은 왜 이리 선명한지.

헤레이스가 미겔을 유심히 살폈다. 하나 다시 본 아이의 얼굴은 순수함 그 자체였다. 미겔이 말 없는 헤레이스를 마주 보다 경쾌한 동작으로 몸을 돌리며 따라오라는 손짓을 했다.

유리온실 밖 야외 정원은 정원보다는 뜰에 가까웠다. 담과 온실 외벽의 거리는 열 걸음 안쪽이었으니까. 그리고 그마저 여러 화초와 관목으로 꾸며진 터라 실제 돌아다닐 수 있는 공간은 현저히 좁았다. 미겔은 그 좁은 공간에서도 가장 구석진 곳으로 가더니 동그란 어느 관목 옆에 바짝 붙었다.

미겔의 시선을 따라 관목의 뒤를 보자 아주 작은 구멍이 보였다. 작은 아이조차 몸을 구겨 넣어야 겨우 들어갈 구멍. 게다가 벽 바깥쪽에도 무성한 관목이 있는지 나뭇가지로 빽빽했다. 그러나 헤레이스는 그조차 기뻤다. 이 밖과 통하는 통로가 있는 셈이니.

미겔이 상기된 헤레이스의 얼굴을 살피다 비밀을 말해 주듯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어른들은 다닐 수 없는 비밀 통로예요. 하지만 저랑 루시는 가능해요.”

“루시?”

“하얗고 자그마한 강아지예요. 에르젠에게도 보여 줬는데 엄청 좋아했어요.”

에르젠의 이름이 다시 튀어나오자 헤레이스가 더욱 집요하게 구멍을 바라봤다. 구멍 아래 흙을 좀 더 파면…….

“여긴 몸이 조금 더 크면 비밀 통로를 사용할 수 없을 거 같아요. 흙을 파 봤는데 이 아래 나무뿌리가 닿아 있거든요. 지금도 겨우 지나가는데…….”

하나 소망은 금세 깨졌다. 미겔이 몸을 숙여 끙끙거리며 관목과 벽 사이를 비틀고 들어간다 싶더니, 헤레이스의 속마음을 듣기라도 한 듯 아쉬운 소리를 했다.

헤레이스는 마음을 들킨 것 같아 움찔거리다 다시 자신이 있는 쪽으로 나온 미겔의 앞에서 몸을 수그렸다. 그리고 흙과 나뭇잎으로 엉망이 된 아이와 눈을 맞추고 머리를 쓰다듬어 줬다. 진심으로 좋아할 수는 없었지만 갖가지 더러운 것을 묻혀 가며 노력한 아이에게 친절을 베풀어야 마땅했다.

“내게 네 비밀을 알려 줘서 고마워, 미겔.”

“…….”

“하지만 다시는 여기에 오지 마렴. 비밀 통로라지만 밖에 있는 나뭇가지들은 널 다치게 할 수 있단다. 그리고 예쁜 옷에 이렇게 흙이 묻으면…….”

나뭇잎을 떼어 주고 흙을 털어 주는 모양새가 퍽 다정했다. 미겔은 제 머리와 옷차림을 정돈해 주는 헤레이스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그녀의 말을 잘랐다.

“기회가 되면 에르젠을 데리고 올게요.”

“…….”

에르젠. 아들의 이름에 헤레이스의 말이 멈췄다.

에르젠을 볼 수 있어? 그가 억지로 떼어 낸 아들과 만날 수 있다면……. 거대한 유혹이 아들을 갈망하는 헤레이스를 집어삼켰다. 그녀가 고개를 숙여 미겔의 눈동자를 피했다.

“제가 동생과 놀고 싶다고 부탁드리면 스승님들께서도 아주 가끔은 눈감아 주실 거예요. 잠이 많으신 분들이거든요. 그러면 여기로 같이 올 수 있을걸요.”

“…….”

“에르젠이 부인을 보고 싶다며 울어서 마음이 아파요. 저는 어머니랑 같이 사는데…… 혼자인 동생은 너무 가엾잖아요. 그리고 나뭇가지는 조심하면 되고 옷은 빨면 되니까 걱정 마세요.”

갈등으로 잘게 흔들리던 눈동자가 가엾다는 말에 멈췄다. 자신은 혼자 있었다. 그리고 에르젠도 혼자였다.

‘에르젠이 울어? 날 찾으면서?’

헤레이스가 고개를 천천히 들었다. 눈물 가득한 푸른 눈으로 애원하듯 미겔을 바라봤다. 그러나 그녀는 턱을 덜덜 떨면서도 미겔에게 에르젠을 데려와 달라 말하지 않았다.

침묵이 길어지자 미겔이 보일 듯 말 듯 입매를 비틀었다. 아이가 얄미운 웃음을 보이더니 헤레이스에게서 한 발 뒤로 물러나 관목과 벽 사이 틈에 몸을 넣었다.

“이만 가 봐야겠어요.”

미겔은 헤레이스를 구멍으로 안내할 때처럼 끙끙거리며 힘겹게 틈을 파고들지 않았다. 아이의 몸이 유연한 뱀처럼 스르륵 부드러이 관목 사이로 들어갔다. 양 무릎을 꿇은 채 멍하니 있는 헤레이스의 귓가에 벽 너머로 도착한 아이의 목소리가 울렸다.

“다음에 또 올 테니 기다려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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