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에르젠을 안은 중년의 여인이 안절부절못한 채 떨었다. 본래라면 아이도, 자신도 이 시각 이곳에 있어서는 안 됐다. 아이는 지금 선생과 마주 앉아 공부를 하고 있을 시간이지, 복도를 뛰어다닐 때가 아니었다.
‘쪼그만 게 왜 가만있지를 못 해서…….’
여인의 마음속에 에르젠에 대한 불만이 쌓였다. 에르젠은 작고 여리게 생긴 것과 다르게 제법 고집이 있었다.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났건만 아이는 아직도 어미를 찾으며 이렇게 종종 밖으로 도망치고는 했다.
‘이번에 들어가면 버릇을 단단히 고쳐 놓겠어.’
여인은 유모인 만큼 아이들의 예상 못 할 행동에 인내심이 강한 편이었다. 하지만 자신의 목숨을 걸 만큼 에르젠을 아끼지는 않았다.
어차피 아비가 신경을 쓰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어미와 불어 있는 아이도 아니었다. 그러니 가장 가까이에 있는 그녀가 윽박을 지른다 한들 아무도 모르리라. 아이를 직접적으로 보호할 사람이 없음을 안 유모는 어린 상전을 약자로 낮잡아 봤다.
“주, 주인님, 그게 도, 도련님께서 멋대로…….”
하나 목이 붙어 있어야 버릇을 고치든 뭐든 할 게 아닌가. 유모는 아이를 감싸 안은 손에 힘을 주다가 이즈카엘과 눈이 마주치고는 아이를 팽개친 채 납작 엎드렸다. 아이는 두렵지 않았으나 눈앞의 공작은 두려웠다.
이즈카엘은 유모에게 별 관심이 없었다. 그가 에르젠 쪽으로 돌아가는 고개를 일부러 틀었다. 보고 싶지 않았다. 아니, 사실 아이의 푸른 눈을 보기가 꺼려졌다.
“……됐으니 그만 가 보도록.”
이즈카엘은 답지 않게 회피를 택했다. 헤레이스를 붙잡아 성으로 올 적에는 아이를 보는 것이 화가 날지언정 어렵지는 않았는데, 날이 갈수록 이상하리만치 아이 얼굴 보기가 힘들었다. 복도 바닥에 붙어 머리를 조아리던 유모가 그의 명이 떨어지기 무섭게 몸을 일으켜 아이를 잡아당겼다.
“도련님, 이리 오세요. 빨리…….”
작은 몸이 쉽사리 끌려갔다. 이즈카엘은 그녀의 거친 동작에 눈살을 찌푸렸으나 곧 몸을 돌렸다.
“도련님!”
이즈카엘이 등을 돌리자마자 여인이 목소리를 높였다. 동시에 가벼운 몸이 탁탁 뛰는 소리가 났고, 등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이즈카엘은 작은 손이 제 팔 옷자락을 꾹 쥐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저도 모르게 몸을 굳혔다.
“아버지?”
들릴 듯 말 듯 작은 물음이었지만 이즈카엘의 귀에 아이의 목소리는 또렷하게 박혔다. 이즈카엘이 이를 꽉 악물어 아득해지는 정신을 간신히 붙잡았다.
“아저씨가 내 아빠예요?”
아이는 재차 물어 왔다. 겁에 질린 듯 떨리는 목소리였지만 답을 꼭 듣겠다는 듯한 고집이 고사리 같은 손에 그대로 드러났다.
“주인님, 죄송합니다. 도련님은 제가 데려가겠습니다. 도련님, 당장 이리 오세요!”
“싫어!”
겁에 질려 있던 유모가 아이를 뜯어냈다. 아이가 가지 않겠다며 그를 붙잡고 늘어지다가 와아앙 크게 울음을 터뜨렸다.
‘그러니까 제발 잘해 줘요. 내가 없어도 울지 않게…….’
순간 아내의 목소리가 이즈카엘의 귓가를 때렸다. 이즈카엘이 뒤돌아 아이를 유모에게서 떼어 냈다.
“됐으니 물러나.”
“예?”
“떨어져 있으라 했다.”
주인의 갑작스러운 태도 변화에 유모가 눈을 끔뻑이다 흉흉한 시선을 마주하고 도망치듯 물러났다. 여인이 저 멀리 떨어지자 이즈카엘이 한쪽 무릎을 굽혀 아이와 시선을 맞추었다.
눈물이 가득한 푸른 눈이 아내와 비슷했으나 자세히 보면 조금 더 올라가 있었다. 이즈카엘은 아이의 젖은 눈가를 닦아 주다 지금 제가 느끼는 감정이 죄책감임을 깨닫고 충격을 받았다.
‘왜…….’
잠든 아이를 볼 때면 분노가 치밀었는데 울고 있는 아이를 보니 마음이 쓰렸다.
갈팡질팡하는 감정에 당황한 그가 아이에게서 손을 떼고 몸을 일으키려 했다. 그러나 아이가 제 눈을 뚫어져라 보고 있음을 인지하자 온몸이 튼튼한 쇠사슬에 묶인 듯 꼼짝할 수가 없었다. 이즈카엘은 한참 고민하다 힘겹게 입을 열었다.
“……그래.”
말간 얼굴이 환하게 변했다. 아이의 웃음에 이즈카엘은 마음 한쪽이 조금 가벼워진 느낌을 받았다. 그가 턱에 긴장을 풀고 아이를 마주 봤다. 하지만 예쁘게 웃던 아이는 짧은 찰나에 무언가를 떠올린 듯 얼굴을 찌푸리더니 순식간에 미움 가득한 얼굴로 그를 노려봤다.
“거짓말!”
거울 같은 에르젠의 눈이 감정을 그대로 비췄다. 한 손으로도 쉽사리 제압 가능한 아이였건만 이즈카엘은 에르젠의 눈동자를 보며 끝없는 무력감을 느꼈다. 이기지 못할 상대와 맞닥뜨린 기분이었다. 에르젠이 공황 상태에 빠진 그에게 소리쳤다.
“아빠가 왜 엄마를 괴롭혀요? 마르셀네는 그러지 않았어!”
“…….”
“그러니까 아저씨는 우리 아빠가 아니야!”
* * *
“아…….”
샬럿은 복도 끝 모서리에 몸을 숨긴 채 침음을 흘렸다. 손이 하얗게 될 정도로 꽉 쥔 그녀의 얼굴에는 숨길 수 없는 불안감이 자리했다.
‘저 애새끼한테 관심 없는 거 아니었어?’
벽 너머 복도 끝에서 사내가 어떤 이유에서인지 아이를 꼭 안고 있었다. 전혀 닮지 않은 사내와 아이였다. 하지만 샬럿은 미겔과 사내보다 저 둘이 더 부자 사이 같다고 느꼈다.
‘이, 이대로면 미겔이, 내, 내 아들이 자리를 빼앗길 거야. 그러면 난…….’
이즈카엘은 미겔을 저렇게 안아 주지 않았다. 그 여자 앞에서 보란 듯이 몇 번 끌어안기는 했지만 저렇게 애틋한 모습은 아니었다. 거짓과 진실은 뚜렷이 구분됐다. 아무리 연기를 잘한다 해도 마음을 모조리 숨길 수는 없었다.
“이건 당연히 해야 할 일이야. 난 어, 어미니까. 그래. 난 미겔의 어미니까 미겔의 자리를 지켜 주려고 이러는 거야. 다들 그러잖아. 자식을 지키려…….”
불안감에 손톱을 씹던 샬럿이 왼쪽 손가락의 네 번째 반지를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커다란 보석이 각도에 따라 살아 움직이듯 일렁였다.
* * *
“이즈카엘은 왜 오지 않지?”
“…….”
“……그럼 에르젠, 그 아이는 어때? 잘 지내고 있어?”
헤레이스가 식탁을 정리하는 하녀의 팔을 꼭 잡고 물었다. 접시를 들고 트레이로 옮기던 하녀는 갑작스러운 헤레이스의 접촉에 몸을 움찔거리며 곤혹스러운 낯을 했다. 하지만 단단히 명받은 것이 있는지 꾹 다물린 입술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
“나와 말해서는 안 된다 명받은 거 알아. 하지만…….”
이즈카엘이 이곳에 오지 않은 지도 벌써 나흘. 헤레이스는 그가 이대로 영영 오지 않을까 걱정이었다. 함께 있으면 괴로운 사내였으나 에르젠의 소식을 전해 주는 유일한 창구였는데……. 아들에 대해 어떤 것도 듣지 못한 헤레이스는 초조함에 거의 미칠 지경이었다.
“짧은 답이라도 줘. 부탁이야. 제발…… 헬렌, 제발…….”
헤레이스가 달달 떨며 이름까지 부르자 하녀 헬렌의 얼굴이 한층 어두워졌다. 그녀는 무언가 고민하는 듯 입술을 달싹이다 애타 보이는 헤레이스의 얼굴에 고개를 떨구고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저도 자세히는 몰라요. 다만 주인님께서는 요새 방 밖으로 잘 나오지 않으세요. 그리고 에르젠 도련님은…….”
“에, 에르젠은?”
“……큰 문제 없이 잘 지내고 계신다 들었어요.”
“아…….”
긴장이 풀린 듯 헤레이스가 손에 힘을 놓았다. 헬렌은 자유로워진 팔을 부산스레 움직이며 헤레이스를 동정 어린 눈으로 힐끔거렸다. 잠시 멍하니 있던 헤레이스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 다시 하녀의 손을 잡았다.
“울진 않니? 나를 찾지는 않고? 어디 아파 보이지는 않았어?”
조금 전보다 빨라진 말속에는 걱정이 한가득하였다. 헬렌은 제 손을 구원 줄인 것처럼 붙든 헤레이스를 보며 난처한 얼굴을 했다.
“죄송해요. 전 에르젠 도련님을 뵐 기회가 많지 않아서 거기까지는……. 그보다 부인, 이만 나가 봐야 할 거 같아요. 더 지체했다가는 밖에서 의심할 거예요.”
식탁은 금세 말끔히 치워져 있었다. 헤레이스는 한 번 더 매달려 볼까 하다가 그만두고 헬렌의 손을 놓았다. 이 아이 처지에서는 이 정도 대답도 큰 모험을 한 것이리라. 자신이 더 붙잡고 늘어져 혹여나 대화한 것이 이즈카엘의 귀에 들어가면 분명 호되게 당할 뿐 아니라 목숨을 잃을지도 몰랐다.
“그래. 미안하구나. 어서 가 보렴.”
헤레이스가 실망을 감추며 헬렌에게 억지 미소를 지어 보였다. 헬렌이 초조한 얼굴로 뒤돌아 트레이를 끌고 문으로 향했다.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멀어지자 헤레이스가 눈물을 참지 못하고 고개를 떨궜다.
“부인.”
툭툭 떨어지는 물방울이 식탁보를 적실 때였다. 헬렌이 못 견디겠다는 얼굴로 헤레이스를 부르더니 다시 그녀의 곁에 와 섰다. 불안한 듯 연신 문을 살피면서도 그녀는 헤레이스 귓가에 들릴 듯 말 듯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에르젠 도련님을 자주 뵙지는 못하지만 보게 되면 부인께 말씀드릴게요.”
헤레이스가 눈을 크게 뜨고 헬렌을 바라봤다. 왜 이런 위험을 감수하냐는 무언의 질문에 하녀가 결연한 얼굴을 했다.
“……안나 언니가 떠나기 전에 부인을 부탁한다고 말했어요.”
“안나가?”
똑똑.
문 두드리는 소리가 무언가를 설명하려던 헬렌의 입을 막았다. 헬렌이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문을 향해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곧 문이 열리며 틈 사이로 나이가 지긋한 노집사가 언뜻 모습을 드러냈다. 그가 안쪽을 힐끗 살피다 굳은 얼굴로 헬렌을 내려다봤다.
“뭐 하느라 늦어. 그리고 함부로 말을 꺼내서는 안 된다고 했을 텐데.”
“죄송합니다. 식탁을 정리하다 물을 쏟는 바람에 정리를 한다고…….”
집사의 노기 어린 음성과 함께 헬렌의 겁먹은 목소리가 들린다 싶더니, 문이 탁 하고 닫혔다. 헤레이스는 또다시 홀로 방에 남겨졌다.
“안나…….”
에르젠 생각에 가득 차 걱정조차 제대로 못 해 준 안나였다. 채찍 50대는 견디는 것조차 어려웠을 텐데 그런 일을 당한 후에도 저를 미워하기는커녕 걱정했을 얼굴이 떠오르자 왈칵 눈물이 솟았다.
헤레이스는 아릴 정도로 얼굴을 문지르다 큰 동작으로 일어섰다. 아무렇게나 밀치고 일어난 덕에 의자가 뒤로 넘어가 큰 소리가 났지만 그녀는 신경도 쓰지 않고 유리온실로 향하는 문을 열었다.
그동안 아무것도 하지 못했고, 또 하지 못한 채 있었다는 생각을 하니 숨이 콱 막혔다. 뭐라도 해야 한다고 다짐한 지가 언제인데 자신은 늘 제자리였다.
이를 악물고 빠르게 걷자 곧 물 흐르는 소리와 함께 분수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헤레이스는 그 앞에 털썩 주저앉아 흐르는 물을 보다가 그 속에 한쪽 손을 넣었다.
차가운 물이 손에 닿자 답답함이 조금 가셨다. 그러나 사방이 막힌 유리온실 또한 숨을 조여 오기는 마찬가지였기에 헤레이스는 저도 모르게 가슴에 손을 올린 채 헐떡였다.
똑똑.
평소라면 들릴 리 없는 인기척에 놀란 헤레이스가 앞을 살피며 일어섰다. 그러자 유리 벽 너머 그녀를 이곳에 가둬 둔 사내와 똑같은 색의 머리카락을 가진 작은 아이가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