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목을 꺾는 악마여-52화 (52/108)

52화.

7장. 에르젠

침대에 앉은 에르젠의 옷은 몇 달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고급스러워졌다. 은실이 수놓아져 있는 셔츠와, 넓게 접어 단추를 채운 벨벳 외투, 부드러운 가죽 신 등 지금의 에르젠은 완전한 귀족 아이의 태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아이의 눈가는 오늘도 어김없이 빨갛게 부어 있었다. 바로 옆에 앉은 미겔은 그런 에르젠의 눈을 살피다 주머니에서 반듯하게 접힌 종이봉투 하나를 꺼냈다.

“울지 말고 이거 먹어 봐. 너 주려고 몰래 가져온 거야, 에르젠.”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붉은 열매가 박힌 쿠키가 나왔다. 에르젠은 따끔거리는 눈을 손등으로 문지르다 미겔이 내민 쿠키를 입으로 가져갔다. 솜씨 좋은 요리사가 좋은 재료를 듬뿍 넣어 그런지 달콤한 것이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맛있어?”

부드러이 묻는 목소리에 에르젠이 고개를 끄덕였다. 온통 무서운 어른들로 가득 찬 이곳에서 또래 아이는 그나마 긴장이 풀리는 존재 중 하나였다.

“다행이네. 다음번에도 가져다줄게.”

미겔의 호의 가득한 얼굴은 에르젠에게 안정감을 가져다주었다. 에르젠이 잠시 고민하다 미겔을 불렀다.

“……형.”

그 짧은 호칭에 미겔의 얼굴에 더욱 진한 웃음이 걸렸다. 미겔이 착한 아이를 칭찬하듯 에르젠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제 그렇게 불러 주는구나.”

“으응…… 형이라 했으니까.”

정말 내 형이니까 이렇게 친절한 거야. 마르셀네도 그랬잖아. 에르젠이 산골짜기 마을에 살 적 몇 번 본 이웃 형제들을 기억하며 고개를 끄덕이다 남은 쿠키를 입 안에 넣었다. 아까보다도 달콤한 맛에 절로 웃음이 지어졌다.

“깨끗하게 먹어야지.”

미겔이 에르젠의 입가에 묻은 쿠키 부스러기를 손수건으로 훔쳤다. 어미처럼 친절한 동작에 에르젠의 눈동자에 담겨 있던 마지막 의심이 사라졌다. 아이가 자신에게 무해하다고 판단한 상대에게 칭얼거리기 시작했다.

“미겔 형, 계속 나랑 같이 있으면 안 돼? 난 형이 좋아.”

어미를 못 본 밤은 이제 열 손가락으로 셀 수도 없었다. 외로움과 두려움에 지친 아이는 자신을 둘러싼 모든 어른들이 두려웠다.

그들은 매번 딱딱한 표정으로 에르젠을 깨우고 예의라는 명목 하에 강제로 식탁에 앉혔으며 강압적으로 무언가를 가르쳤다. 유모라고 붙은 이들은 그나마 친절했지만 어미의 따뜻한 품을 기억하는 에르젠에겐 낯선 여인들의 작위적인 품은 안식처가 될 수 없었다.

“미안, 에르젠. 그건 힘들겠는걸. 아버지께서 너랑 만나는 걸 허락하지 않으셨거든. 사실 비밀인데…… 이것도 몰래 온 거야.”

에르젠의 물음에 미겔이 난처한 얼굴을 했으나 그건 겉으로 보이는 표정을 꾸며 낸 것에 지나지 않았다. 미겔은 일전에 에르젠을 구경하러 왔다가 이즈카엘에게 쫓겨난 일을 기억하며 속으로 피식 웃었다. 제 자식이라 생각하지도 않으면서 보호하려는 꼴이라니. 우스웠다.

‘엄마도, 안나도, 형도 내 곁에 없어. 에르젠 옆에는 아무도…….’

미겔의 답에 에르젠의 푸른 눈에 다시금 눈물이 맺혔다. 그렁그렁한 눈물에 미겔이 에르젠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아이의 슬픔을 살살 끄집어냈다.

“에르젠은 엄마가 보고 싶은 거야?”

“응, 보고 싶어.”

“왜?”

“우리 엄마니까. 난 엄마가 제일 좋아. 엄마는 착하고 예쁘고 또…….”

아직 표현력이 부족한 아이는 제 마음을 온전히 말할 수 없었다. 답답해진 에르젠이 팔을 이용해 커다란 원을 그려 보이다 미겔에게 되물었다.

“여하튼 난 엄마가 이만큼! 아니, 이것보다 훨씬 더 좋아! 형은? 형도 엄마가 좋아?”

에르젠의 물음에 호박색 눈이 가느다랗게 휘어졌다. 답을 어찌 해야 할까. 에르젠이 말하는 어미는 분명 샬럿을 지칭하는 것이겠지만 미겔은 에르젠의 어미인 헤레이스에 대한 답을 하고 싶었다.

“난…….”

“미겔! 미겔! 어디 있니! 미겔!”

하나 미겔이 답을 고민하던 때, 밖에서 날카로운 여인의 목소리가 울렸다. 높은 비명이 샬럿의 것임을 알아챈 미겔이 한숨을 쉬더니 침대에서 일어났다.

“이런 에르젠, 난 이만 가 봐야겠어. 내 어머니께서 날 찾으시는 모양이야.”

“어? 혀, 형 안 가면…….”

“다음에 또 올게, 에르젠.”

침대 옆 창문이 드르륵 소리를 내며 열리더니 미겔이 아이답지 않게 날렵한 몸짓으로 창틀에 올라가 밖으로 뛰어내렸다. 에르젠이 무어라 더 말할 틈도 없이 벌어진 일이었다.

“나, 나도 우리 엄마 찾으러…….”

에르젠은 미겔처럼 창틀에 올라가기 위해 낑낑거렸다. 그러나 머리 위에 있는 창틀에 에르젠이 오를 수 있을 리 없었다. 아이가 울상을 짓다 울음을 터뜨렸다.

“흐아아아앙.”

“에구머니. 내가 언제 잠이 들었지. 이상하다.”

방 안 카우치에 앉은 채 잠들었던 유모가 아이의 울음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 에르젠을 안아 들었다. 넉넉한 여인의 품에서 에르젠이 창밖을 바라보며 계속해서 헤레이스를 불렀다.

“엄마…… 흑.”

* * *

샬럿은 손톱을 잘근잘근 씹으며 방 안을 돌아다녔다. 작금의 상황이 너무도 불안했다. 그 여자는 돌아오고 그 여자의 아이는…….

“그럴 리 없어. 없다고. 하지만 갑자기 왜 그따위 아이에게 선생을 붙이는 거지? 그것도 미겔, 너와 같은 선생들을 말이야.”

“…….”

“괜찮아. 선생이야 그럴 수 있지. 맞아! 얼굴도 제대로 보지 않는다잖아. 관심은 없는 거야. 그저 세르펜스 성을 가진 아이니까…….”

미겔은 어쩔 줄 몰라 하며 방을 서성거리는 어미를 보다가 지겨운 티를 숨기지 않았다. 어쩜 항상 저런 반응일까. 아이가 권태로운 표정으로 어미의 혼잣말에 시큰둥하게 답했다.

“글쎄. 과연 그럴까요?”

샬럿이 아들의 앞으로 한달음에 달려갔다. 작은 아이를 붙잡은 그녀가 미겔을 흔들며 핏발 선 눈을 부라렸다.

“무슨 말이야!”

“어머니, 동생 얼굴 못 보셨어요? 공작 부인을 쏙 빼닮았잖아요. 그 눈도, 머리색도, 또 얼굴도.”

어미의 거친 행동에도 미겔은 균형을 잘 잡고 서 있었다. 오히려 흥분해 비틀거리는 것은 샬럿이었다.

“공작 부인이라니! 그것은 정부야! 이즈카엘이 그렇게 말했어!”

공작 부인. 그 여자를 그리 지칭할 때면 속에서 불이 일었다. 화가 끓어오르고 온몸의 피가 머리끝까지 솟구쳤다.

샬럿의 얼굴이 무시무시한 악귀처럼 변했다. 하나 어미의 얼굴을 본 미겔은 겁에 질리기는커녕 더욱 느릿하게 말했다.

“알면서 일부러 모르는 척하시는 거예요? 화를 내도 어머니는 공작 부인이 될 수 없어요. 아버지께서 똑똑히 말씀하셨잖아요. 공작 부인은 여전히 공작 부인이라고.”

“아악! 아니야! 아니라고! 내, 내가 이즈카엘의 유일한 여자이자 세르펜스의 후계를 낳은 사람이야. 그러니 공작 부인은 나야. 나란 말이야!”

“어머니, 아버지께는 공작 부인만이 여자예요. 어머니는…… 그래. 적당히 필요했던 물건이었을 뿐이죠. 황금으로 산 물건. 그러니 이만 인정하시고 욕심을 좀 버리세요. 아버지의 마음이 공작 부인에게 가 있는데 동생에게 기회가 어찌 안 갈까요? 제가 아무리 아버지를 닮았다 한들 아버지는 결국 동생에게 눈을 돌리실걸요. 왜냐. 사랑하는 여자를 닮은 아이니까.”

“아니라니까! 잠깐일 뿐이야. 그런 감정이 오래갈 일 없어. 그냥 그 얼굴이 좀 반반하니까. 그러니까 그 여자만 없어지면!”

“공작 부인이 될 수 있을 거라고요?”

미겔이 샬럿을 똑바로 바라보며 비웃음을 흘렸다. 그러자 샬럿의 머릿속에 그때의 일이 그려졌다. 미겔은 어미의 머릿속을 짐작이라도 한 듯 눈을 가늘게 떴다.

“어머니, 공작 부인께서 없었던 기간 동안 어머니 위치에 변화가 있었던가요? 아니, 관심이라도 받아 보셨어요? 길다면 긴 그 시간 동안 어머니는 공작 부인의 방조차, 아니 작은 권리 하나 차지하지 못하셨지요.”

공작 부인의 방을 차지하려다 천한 하인들에게 끌려 나갔던 일. 샬럿은 그 치욕을 똑똑히 기억했다. 아니, 그 일뿐일까.

샬럿에게 세르펜스 성에서의 모든 순간은 치욕이었다. 진정한 공작 부인은 그녀인데 누구도 그녀를 공작 부인으로 예우해 주지 않았다. 그녀는 언제나 손가락질받는 정부일 뿐이었다. 사용인들의 비웃음과 수군거림이 샬럿의 귓가에 윙윙거렸다.

“어머니는 제가 아버지의 후계자가 되길 누구보다 바라고 계세요. 그 이유가 뭘까요? 날 아껴서? 아니. 아버지의 사랑을 통해서는 공작 부인이 될 자신이 없어 그런 거잖아요. 안 그래요?”

달래듯 차분한 목소리였지만 내용은 그렇지 않았다. 미겔이 내뱉는 단어 하나하나가 샬럿의 가장 밑바닥을 긁었다. 그렇잖아도 격분된 감정이 실려 있던 차에, 꾹꾹 눌러 왔던 열등감과 불안감이 자극까지 받자 샬럿은 이성을 잃고 아이에게 손을 휘둘렀다.

“너!”

그러나 미겔은 어미를 뿌리치더니 자신을 향한 손을 단숨에 피했다. 균형을 잃고 샬럿이 바닥으로 엎어졌다.

“아악!”

“어머니, 당신은…….”

“흐으…….”

미겔이 바닥에서 헐떡이는 샬럿의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아이가 앳된 목소리로 읊조렸다.

“……이미 졌어. 아니, 애초 이길 수 없는 싸움을 혼자 하고 있잖아. 그만해.”

“너…… 내가 공작 부인이 될 수 있다 했잖아. 네가 후계자가 되면…….”

“후계자가 되면 그렇다 했지요. 하지만 난 후계자 자리에는 관심이 없는걸. 게다가 그때 분명…….”

그때까지 당신이 살아 있으면 그리된다 말했지.

미겔이 손을 뻗어 쓰러진 샬럿의 이마에 가져다 댔다. 이마에 닿는 서늘한 손가락에 샬럿이 움찔거리다 딱딱하게 몸을 굳혔다.

“이, 이 괴물!”

까맣게 잊고 있었던 순간이 선명해졌다. 동침하지도 않았건만 단숨에 부풀었던 배, 한참 늦어졌던 출산, 배를 가르고 태어나자마자 고맙다 말하던 저것.

눈앞의 아이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저 인간의 탈을 쓴 괴물일 뿐.

“아, 아니야! 기억나지 않아! 미겔, 넌 내가 배 아파 낳은 아이야. 내게 공작 부인 자리를 줄…… 모든 것을 줄 내 아이! 네, 네가 후계가 되면 난…….”

그러나 진실을 마주했음에도 샬럿은 고개를 흔들며 부정했다. 미겔이 자신의 아이가 아니라면 제게 공작 부인 자리 역시 줄 수 없지 않은가. 미겔은 분명 제 아이였다. 세르펜스의 씨와 제 피를 타고난 아이.

“역시 기대를 저버리시지 않네요. 하기야 어머니의 이런 모습은 지루하지만 한편으로는 제 오랜 식사였으니까요. 대다수의 인간들도 그렇잖아요. 지겹더라도 일상에서는 항상 비슷한 걸 먹지요.”

어미의 반응에 미겔이 웃음을 터뜨렸다. 아이가 작은 손으로 어미의 손을 꼭 잡은 채 그녀가 일어나는 것을 도왔다.

“이거 놔!”

샬럿은 미겔의 부축을 받아 자리에 서자 황금으로 장식된 화려한 화장대로 뛰어갔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그녀가 화장대 서랍과 보석함을 뒤지자 황금으로 만들어진 장신구와 온갖 보석들이 튀어나와 바닥을 굴렀다. 헤레이스가 미겔의 백일을 맞이하여 선물로 줬던 목걸이도 그중 하나였다.

미겔이 제 발치에 떨어진 목걸이를 주워 주머니에 쑤셔 넣고는 샬럿을 향해 말했다.

“그래도 지금껏 저를 키워 준 정이 있으니 충고 하나 드릴게요. 꼭 들으시면 좋겠어요. 마지막 기회거든요.”

“어디 갔지. 챙겨 놨는데…… 여기 뒀는데…… 어디 있어!”

샬럿은 미겔의 말을 듣지 못한 듯 여전히 화장대를 뒤엎는 중이었다.

그녀가 한참 만에 화장대 가장 아래 서랍 깊숙한 곳에서 작은 나무 상자 하나를 찾았다. 상자가 부서질 듯 열리고 샬럿의 손에서 손가락 두 마디 길이의 보라색 병이 반짝이며 존재를 드러냈다. 병 안에 찰랑이는 액체에 미겔이 한숨을 쉰 뒤 말을 이었다.

“그거 내려놓고 그날의 약조대로 황금을 챙겨 떠나세요. 그게 어머니의 인생이 가장 행복해지는 길이랍니다. 제가 장담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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