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아니. 같지 않아.”
아비의 마지막을 그리던 이즈카엘이 고개를 저었다. 아비는 어미를 먼저 보냈으나 자신은 헤레이스와 쭉 함께할 것이다. 사는 것도, 죽는 것도.
이즈카엘이 아이에게 다시 이불을 덮어 준 뒤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문밖으로 나오기가 무섭게 그는 얼굴을 구기고 말았다. 방 안 침대에 누워 있는 아이보다 조금 더 큰, 그를 꼭 닮은 아이가 어쩔 줄 몰라 하는 중년의 여인에게 붙잡힌 채 빙글거리며 웃고 있었다. 그것이 이즈카엘의 뒤에 있는, 살짝 열린 문 틈새를 훔쳐보며 말했다.
“동생을 보러 왔어요, 아버지.”
이즈카엘은 미겔의 말에 저도 모르게 방문을 닫고 그 앞을 지키듯 섰다. 제법 결연해 보이는 얼굴에 미겔이 웃더니 이즈카엘에게 한 발 더 다가갔다. 이즈카엘이 망설임 없이 미겔을 밀쳤다. 아이는 비틀거리더니 간신히 균형을 잡은 채 섰다.
“헉!”
주인의 거친 행동에 미겔의 유모가 놀란 듯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하지만 미겔을 내려다본 이즈카엘은 냉랭한 목소리로 살기를 숨기지 않은 채 말했다.
“경고하지. 이곳으로는 발도 들이지 마.”
* * *
견디겠다 했지만 쉽지는 않았다. 헤레이스는 나날이 말라 가고 있었다. 아들에 대한 그리움과 폐쇄적인 공간, 그리고 눈앞의 사내 때문에.
“예전에는 내가 이리 해 줬지. 꼭 당신의 노예처럼 말이야.”
헤레이스는 카우치에 기대앉아 있는 이즈카엘의 발치에 무릎을 꿇고 그의 다리를 주무르고 있었다. 이즈카엘은 근래 들어 그녀를 정부로 취급하다 못해 몸종처럼 부리려 했다.
“제대로 해.”
원체 단단한 사내의 몸이라 작고 여린 그녀의 손으로는 있는 힘을 다해야 했지만 그가 핀잔에도 헤레이스는 한마디 불평조차 하지 않았다. 그녀가 묵묵히 손만 움직이자 카우치에 파묻혀 있던 이즈카엘이 상체를 일으켜 헤레이스의 얼굴 바로 앞까지 숙였다.
“그래도 나붓한 계집의 몸이 좋아. 손도 그렇고 어디든 말이야.”
느릿한 말과 함께 그가 헤레이스의 젖은 머리카락을 집어 들고 숨을 들이켰다. 씻고 난 뒤 얇은 드레스만을 걸쳤기 때문일까, 향유 냄새 사이로 아내의 체취가 은은하게 났다. 노골적인 그의 행동에 헤레이스가 잠시나마 몸을 굳혔으나 곧 모른 척 고개를 숙인 채 손을 움직였다.
그런 헤레이스를 가만히 내려다보던 이즈카엘이 신경질적으로 일어서 방 한편에 자리한 식탁으로 갔다. 하루의 마지막 식사는 종류가 많지는 않았지만 먹음직스러웠고 적당히 따뜻했다.
“……당신도 앉아.”
깨끗한 천으로 손을 닦은 헤레이스가 기다렸다는 듯 이즈카엘의 맞은편에 착석했다. 속은 불편했으나 헤레이스는 이즈카엘과 함께하는 저녁 식사 시간만은 손꼽아 기다렸다. 어쩐 영문인지는 몰랐지만 그가 이 시간에 에르젠에 관한 이야기를 해 줬기 때문이다.
“당신 아들은 여전해.”
헤레이스가 포크를 들자 이즈카엘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헤레이스는 어떻게 여전한지 답을 재촉하고 싶은 것을 꾹 참은 채 잘 구워진 채소를 잘게 잘라 입으로 가져갔다. 그녀가 음식을 씹고 삼키는 것을 확인한 이즈카엘이 말을 이었다.
“크게 투정을 부리지도 않고, 밖에서 자라 그런지 가리는 것도 없어. 다만 당신을 보고 싶다며 하루에도 몇 번이고 울어 성안이 시끄럽지.”
에르젠이 운다는 말에 헤레이스의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자신을 찾으며 울고 있을 아이가 눈에 선했다. 이즈카엘은 아내의 떨림을 보다 입꼬리를 올렸다.
“그래도 걱정 마. 예절 선생을 붙였으니까. 시끄럽게 울어 재끼는 걸 도무지 들어 줄 수가 없었거든. 찬찬히 가르치다 보면 나아지겠지.”
덜그럭.
식기가 요란하게 부딪히는 소리가 남과 동시에 원망스러운 눈빛이 이즈카엘에게 향했다. 이즈카엘이 아내의 눈을 마주 보다 칼로 고기를 썰어 헤레이스의 얼굴 앞에 내밀었다. 적당히 묻은 소스가 육즙과 뒤섞여 꽤나 먹음직스러웠으나 헤레이스에게는 역겹게 느껴질 뿐이었다.
“먹어. 먹지 않으면 이다음은 말하지 않겠어.”
헤레이스가 입가를 씰룩이다 입을 열었다. 하지만 입에 넣자마자 녹을 것같이 부드러운 고기를 그녀는 제대로 씹을 수도, 삼킬 수도 없었다. 울지 않으려 했건만 저를 찾고 있을 에르젠의 얼굴을 그리자 저절로 눈물이 떨어졌다.
“울어도 마찬가지야. 울지 마. 난 정부 따위가 내 앞에서 질질 짜는 걸 보고 싶지 않아. 당신은 내 즐거움을 위해 있어. 그러니 식사 자리에서 그런 얼굴은 불쾌해.”
“흐읍…… 흑.”
“두 번 말해야 하나? 아니면 이만 식사를 치우라 할까?”
헤레이스가 거칠게 고개를 젓다 손등으로 눈가를 문질렀다. 이즈카엘은 그녀가 끅끅거리다 힘겹게 고기를 씹는 것을 눈 한번 깜빡이지 않고 지켜봤다. 그리고 마침내 헤레이스가 고기를 삼키자 그는 다시 입을 열었다.
“……다른 공부도 시작해야겠지만 의사 말이 아이 몸이 그리 건강하지 못하다 하더군. 체력도 그렇지만 몸에 영양이 많이 부족하다 들었어.”
당신처럼. 하지 못한 말이 입 안을 맴돌다 사라졌다. 이즈카엘이 고깃덩이를 조금 더 작게 잘라 다시 헤레이스 앞에 내밀었다. 헤레이스는 입술을 달달 떨면서도 순종적으로 고기를 받아먹었다.
“손 부르트도록 일해도 아이 하나 먹여 살리는 게 쉽지는 않았던 모양이지?”
어미 새가 아기 새에게 먹이를 먹이듯 부지런한 손길과 달리, 이즈카엘의 입은 여전히 악랄했다. 그가 헤레이스의 몸을 살피다 짜증스레 내뱉었다.
“하긴 당신은 이제껏 아무것도 해 본 적 없는 여자니까. 아무것도 챙겨 나가지도 않은 것치고는 오히려 오래 견딘 편이지.”
방에 그대로 남아 있던 보석과 패물들을 생각하자 다시 부아가 치밀었다. 그렇게 구질구질하게 살면서도 내 곁을 떠나고 싶었나.
아내의 가느다란 목의 보던 이즈카엘이 둥근 어깨를 따라 얇은 팔을, 또 둥글게 튀어나온 손목뼈로 시선을 두다가, 종국에는 그녀의 손을 바라보았다. 헤레이스의 손은 귀한 향유로 그새 부드러워져 있었지만 전과 같아지려면 한참의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았다.
탁.
이즈카엘이 들고 있던 나이프와 포크를 탁자에 소리 나게 놓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의자 끌리는 소리가 나고 그가 헤레이스의 뒤로 가 허리를 숙였다. 사내의 단단한 팔과 함께 핏줄 솟은 손이 헤레이스의 어깨를 지나 곧 그녀의 손을 옭아매듯 잡아채 깍지를 꼈다.
“……내가 헤레이스 당신을 어떻게 찾았는지 알아?”
가까이 들리는 사내의 숨소리에 헤레이스가 눈을 내리깔았다. 어떻게 찾았건 그게 이제 와 무슨 소용인가. 헤레이스가 잡힌 손을 풀려 미약하게 반항했다. 이즈카엘이 더욱 세게 깍지를 끼며 속삭였다.
“당신 솜씨는 여전하더군. 백합을 수놓은 끝자락만 봐도 알 수 있었어. 누구 솜씨인지.”
* * *
눈이 번쩍 떠짐과 동시에 이른 시간 특유의 냉기가 돌았다. 헤레이스는 제 옆자리 온기가 사라졌음을 깨닫고 사방을 살폈다.
‘……갔구나.’
이즈카엘이 떠났음을 확인한 그녀가 조심스레 일어나 창가로 다가갔다. 천장부터 바닥까지 길게 늘어진 커튼은 제법 두꺼워 빛을 거의 다 가리고 있었다.
헤레이스가 있는 힘껏 커튼을 쳤다. 그러자 푸르스름한 새벽빛과 함께 온갖 식물로 무성한 유리온실이 보였다.
‘……아직 시간이 있어.’
유리창에 손을 올린 채 멍하니 온실을 보던 헤레이스가 굳은 얼굴을 했다. 그녀가 침대로 돌아가 푹신한 침실용 신에 발을 밀어 넣고 유리온실과 연결된 문 앞에 섰다. 바깥의 색을 가늠하건대 하녀가 아침을 들고 올 시간까지 아직 한 시간 이상 남았음이 분명했다.
‘방법이 생각나지 않는다면 움직여야 해. 뭐든 해서 에르젠을 위한 방법을 찾아야 해.’
이즈카엘에게는 도망친 기간만큼 이곳에 얌전히 있겠다 했지만 헤레이스는 이대로 가만히 갇혀 울고만 있을 생각 따위 없었다. 며칠 동안 눈물은 흘릴 만큼 흘렸다. 이제 무엇이든 할 차례였다.
‘에르젠을 세르펜스의 일원으로 받아들이겠다 했지만…… 자식으로 생각지 않는다 했잖아. 그렇다면 보호도…….’
관심도, 보호도 받지 못할 아이에게 무슨 일이 생길지 몰랐다. 헤레이스는 저를 죽일 듯 노려봤던 샬럿의 눈을 기억하고 몸을 떨었다.
설마 어린아이에게 그러지는 않겠지만 혹여나 그 살기 어린 눈이 에르젠에게 닿는다면……. 귀족가의 후계 다툼에 어린 핏줄이 희생되는 일은 지금도 빈번하게 일어났다. 최악을 상상한 헤레이스의 등 뒤가 서늘해졌다.
‘만일을 대비해 이곳을 빠져나갈 방법을 미리 찾아야 해. 성이 에르젠에게 위험해지면 몰래 데리고 나가야 해.’
경험으로 비춰 보건대 성 밖 또한 성 못지않게 위험했다. 하나 적어도 제 품 안이라면 이 목숨을 바쳐 에르젠을 살릴 기회가 있지 않은가. 어미를 잃고 겁에 질려 있을 에르젠을 생각하며 헤레이스가 문을 힘껏 밀었다.
끼익.
유리온실로 가는 문은 쉽사리 열렸다. 헤레이스는 낮은 문턱을 넘으며 낯선 장소를 긴장된 눈으로 살폈다.
아름다운 유리온실은 아주 간혹 사람의 손을 탔는지 화초도, 이끼도, 넝쿨도 우거져 있었다. 길을 막을 정도는 아니었지만 질서를 중시 여기는 사람이라면 관리를 못했다 질색했으리라.
헤레이스의 시선이 정원의 높은 천장에 닿았다. 담쟁이 넝쿨이 높게 뻗어 유리 천장의 일부를 가린 탓에 새벽빛은 어느 정도 막혔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조금 전 헤레이스가 누워 있던 방보다는 밝았으므로 사물을 식별하는 데 어려움은 없었다.
‘사람이 머물지 않았던 것치고는 관리가 잘됐어.’
헤레이스는 공작 부인으로서 세르펜스 성에 살면서도 현재 갇혀 있는 방과 이곳 유리온실은 방문하지 않았다.
원체 외진 곳에 있기도 했지만 이곳은 전대 공작의 정부인 이즈카엘의 어미가 머물렀던 곳으로, 마녀라 불렸던 그녀가 죽은 불길한 장소였다. 다정했던 시절에도 이즈카엘은 어미 이야기라면 입을 다문 채 불쾌한 낯을 숨기지 않았기에 헤레이스는 일부러 이곳을 잊고 살았다.
‘이즈카엘의 어머니…….’
본적도 없었건만 죽은 이를 생각하자 오싹 소름이 돋았다. 이곳에 끌려온 뒤 안나를 떠나보내고 에르젠 일이 생겨 생각조차 못하고 있었지만 망자가 머물렀던 장소라는 게 썩 좋은 기분은 아니었다.
“어릴 때는 무섭지 않았는데. 오히려 오고 싶어 했지.”
헤레이스가 소름 돋은 어깨를 더듬다 씁쓸한 얼굴을 했다. 그녀에게 친절했던 샤를의 어미, 즉 전대 공작 부인이었던 율리스 황녀는 샤를과 헤레이스가 이 별채 쪽으로 고개만 돌려도 대단히 예민하게 반응했다. 그 신경질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샤를과 헤레이스는 본채에서 나가기도 쉽지 않았다.
물론 쉽지 않았을 뿐이지 가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헤레이스와 샤를은 율리스 황녀 몰래 샤를과 별채를 방문하고는 했다. 이유는 하나. 이즈카엘을 보기 위해.
하지만 그때도 별채에 숨어든 게 몇 번일 뿐 유리온실은 한 번 들어와 봤던 것이 다였다. 당시 공작이었던 이즈카엘의 아비가 자신을 제외한 누구의 발걸음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세상에.”
어릴 적 희미한 기억을 더듬으며 걷던 헤레이스가 분수대 앞에 서 저도 모르게 탄식을 뱉었다. 아무것도 모르던 어린 시절에는 눈치채지 못했지만 성인의 눈으로 본 이곳의 쓰임새는 명확했다.
감금.
유리온실의 입구는 문이 잠긴 방과 연결되었고, 입구 반대편 출구는 나가 봤자 높디높은 담장에 둘러싸인 작은 야외 정원이었다. 유리온실 너머 문은 고사하고 틈새 하나 없는 담장에 헤레이스의 얼굴이 창백히 질렸다.